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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은 좀 특별한 날입니다. 막내딸의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기 때문입니다. 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이고, 고등학교 나아가 대학 진학률까지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 있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입학과 졸업의 의미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중학교에 진학하는 비율이 크지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한두 명 정도.

아내는 세미나 참석하느라 출타 중이고, 큰딸은 새벽 같이 학교에 갔습니다. 막내딸과 단둘이 아침을 차려 먹으면서 저의 고등학교 입학 날이 떠올랐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막내딸이 제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습니다만 알아서 나오는 몸짓 같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의 흐름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까지도 간극을 만듭니다.

저는 참으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읜 저는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해야만 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저와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의 십중팔구는 딴 길로 나갔을 것입니다. 공부와는 먼 길, 입에 풀칠하는 쪽을 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어진 존재가 삶의 내용을 규정한다고 하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아주 기특한 생각입니다.

저는 고입 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으로 정규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교육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던 제가 그렇게 선망하던 학생이 된 것입니다. 주위에는 축하해 줄 만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니 부모 형제와 함께 살아가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길이었기 때문에 축하 거리가 되지 않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저는 혼자 마냥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고등학교에 입학식 날부터 결석을 하고 말았습니다. 버스 요금이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때 제가 살던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학교가 있는 종로구 수송동까지는 16km가 넉넉히 됐을 것입니다. 40리 길에 해당됩니다. 도보로 가기란 무망한 거리입니다. 학교 규칙에 대한 무지도 입학식 날 결석한 것에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루 종일 궁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통비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고학생이 어디 가서 손을 벌릴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오래된 손목시계'입니다. 시침은 눈치 챌 수 없었지만 초침과 분침은 가다가 멈추기를 제멋대로 하는 시계였습니다. 값으로 따지면 계산이 나오지 않을 시계였습니다. 그 시계를 전당포로 가지고 간 것입니다.

딸애가 전당포가 뭐냐고 물어왔습니다. 사라진 지 꽤 되었지만 제가 어린 시절, 전당포는 급한 돈을 빌리는 장소로 아주 유용하게 이용되었습니다. 귀중품을 맡기고 필요한 돈을 빌린 뒤, 일정 기간 내에 이자를 붙여 변제하고 맡긴 귀중품을 되찾아 오는 점포였습니다. 산업이 발전하기 이전이어서 전당포에 맡겨지는 물품은 시계, 라디오, 전축, 만년필 등에서부터 옷가지까지 값나가는 것은 모두 저당물이 되었습니다.

제가 차고 있던 시계는 값으로 따지면 돈이 거의 되지 않을 물건이었습니다. 거저 가지라고 줘도 생각해 보고 받아야 할 만큼 생명력을 다 한 시계였습니다. 제 사정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전당포 주인이 시계와 저를 한참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시계를 보고 버스 요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저의 사정을 고려해서 며칠 분의 버스 요금에 해당하는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입학식 그 다음 날, 저는 들뜬 기분으로 학교에 갔습니다. 검정고시를 보고 진학한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아는 아이라곤 없었습니다. 오직 한 명, 제가 자취하던 동네에 사는 재학이가 유일한 아이였습니다. 재학이는 그 뒤 제게 오랜 시간 좋은 친구가 돼주었습니다. 각 교실 조례 시간, 담임선생님이 기다란 출석부를 옆에 끼고 들어왔습니다. 한 손엔 두툼한 회초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죄 지은 자가 수갑을 보면 몸이 움츠려 드는 것처럼 제 몸이 그렇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입생들의 학교생활과 앞으로의 자세에 대해 담임선생님이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입학식 날 결석한 아이는 앞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결석한 아이'라는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결석한 놈'이라고 했음이 분명합니다. 저는 적어도 저와 같은 어려운 사정에 있고, 따라서 결석한 친구들이 그래도 몇 명은 될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간 아이는 저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결석한 이유를 묻는 말에 제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선생님의 얼굴 표정에서 정상 참작의 여지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속으로 선생님의 저 두툼한 매로 몇 대 정도 맞아야 할까를 어림짐작해 보았습니다. '다섯 대? 그건 좀 적은 대수야. 그럼 열 대? 그 정도라면 좋겠는데.' 그런데 선생님에게서 떨어진 말은 전혀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우리 반은 일심동체다.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란 말이다. 살아도 같아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정신으로 나와 함께 일 년을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어제 입학식 날, 한 명이 결석한 죄과는 반 전체 학생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행동이 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깨우쳐 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반 전체 학생 한 명도 빠짐없이 이 매로 세 대씩을 맞는다. 연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저는 몸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제게로 모아졌습니다. 너 때문에 내가 맞는다는 원망의 눈망울들이었습니다. 60여 명의 반 이아들에게 돌아가면서 매를 내리치고도 결혼을 갓 한 담임선생님은 힘이 남아돌았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가급적 결석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연대 기합은 제게 무언의 압박으로 늘 작용했습니다. 버스 요금이 없을 때 기사 아저씨에게 사정을 말씀 드리고 그냥 탔던 적도 있었고, 또 한 번은 새벽 일찍 출발해 세 시간 반에 걸쳐 겨우 조례 시간 직전에 교실로 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조금만 늦어도 자동차로 데려 달라고 하는 아이들, 몸이 안 좋거나 기상이 불순해도 학교까지 태워달라고 하는 요즘 아이들입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제가 겪은 실화는 막연한 옛날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은 왜 그런 고생까지 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느냐고 되물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부모 나아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생 위에 아이들이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아이 입학식이라고 해서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왔습니다. 아이는 마냥 즐겁습니다. 새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잘 해주며, 선생님들 말씀도 잘 듣고, 무엇보다도 목회자 자녀로서 사랑을 베푸는데 넉넉할 것을 주문했는데도 막내 딸애는 듣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저의 입학식 불참 상황을 조금이라도 마음 속에 남겨두는 딸이 되었으면 합니다.

40여 년 전 있었던 흑백 사진과도 같은 장면이 반추되는 이유가 뭘까요? 값도 안 되는 고물 시계를 잡고 며칠 분의 버스 요금을 빌려준 그 전당포 주인의 선의를 저는 갚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컬러 색상이 온통 세상을 뒤덮고 있는 세태에 마치 한 장의 흑백 사진과도 같은 장면을 붙들고 있는 것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을 이해하며 사랑을 베풀며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제 마음은 내일을 소망하게 해줘 좋습니다.


태그:#입학식, #전당포, #연대기합, #검정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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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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