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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수리 두물머리에 떠있는 임자 없는 나룻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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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리를 지난 배가 도미나루에 도착했다. 승객 없는 나룻배가 졸고 있는 한적한 나루다. 수군들이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사이 고개를 들어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지나는 과객들이 임금이 계신 한양을 바라보며 예를 갖추었다 하여 예봉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을 내렸다. 조개껍질을 엎어 놓은 듯한 초가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바댕이(八堂) 마을이다. 시선을 강물에 띄웠다. 여울지는 강물위에 한 여인의 얼굴이 겹쳐왔다.

미모가 빼어난 부인이 있었다. 그 부인에게 흑심을 품은 왕이 여인의 지아비에게 제의했다. '네 아낙이 나의 유혹에 넘어오면 부인을 나에게 주고 정절을 지키면 벼슬을 내리겠다.' 왕과 백성은 갑과 을이다. 마지못해 응한 도미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데...혹시?' 하지만 도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 기지를 발휘한 부인이 몸종을 단장시켜 왕의 잠자리에 밀어 넣어 위기를 모면했다.

사실을 뒤늦게 안 개루왕은 대노했다. 도미의 두 눈을 뽑아 작은 배에 실어 하류로 흘려보내고 부인을 겁탈하려했다. 이 때 부인의 기지가 또 한 번 번득였다. '지엄하신 몸, 목욕재계하고 받아들이겠다'고. 입이 귀에 걸린 개루왕은 목욕을 허락했다. 왕궁을 벗어난 여인은 이곳 나루터까지 앞만 보고 뛰었다. 허나, 나룻배는 없었다.

군사들은 쫓아오고 배는 없고 절망이다. 기도했다. 하늘이 감읍했을까. 상류에서 배가 한 척 내려왔다. 그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간 부인은 소경이 되었지만 아내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던 지아비를 만났다.

절망에 울부짖던 도미부인, 기적이 일어났다

시강원 시절, 삼국사기에서 도미부인을 읽으며 '나는 군주가 되더라도 부인 하나만 사랑하리'라고 다짐했다. 각오가 주효해서일까? 나이가 어려서일까? 후궁으로 뽑힌 두 여인은 출궁 당할 때까지 처녀였다. 그 도미부인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나루터를 지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3년 후, 도미나루를 지나던 26세의 젊은 청년이 시 한수 읊었다.

도미나루 물은 이끼보다 파란데
관동 가는 길은 멀기도 멀구나
등 뒤에 지팡이 비껴 멘 나그네
강 그림자 속에 부질없이 배회 하네

김시습이었다. 님 향한 일편단심으로 수락산에 은거하던 그가 강원도로 떠나면서 노산군의 발자국을 밟은 것이다. 설잠(雪岑)이라 자칭하며 팔도를 떠돌던 그가 도미나루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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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알미동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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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 나루를 떠난 배가 배알미동에 이르렀다. 강 언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 있었다. 봉학골·샘재·작평·창모루·고양골·가지울·거문다리·굽들이·어둔이골은 물론 조금 멀리 떨어진 장례말과 신장례말 사람들까지 몰려나왔다. 억울하게 귀양 가는 임금에게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몰려나온 것이다.

원래 배알미동은 관직을 마친 관리가 낙향하거나 귀양 갈 때 한양을 향해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인사를 올리던 곳이라 하여 배알미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오늘은 다르다. 임금이 죄 아닌 죄를 얻어 귀양을 가니 누구를 향해 배알할 것인가? 백성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배알미동을 지난 배가 남남동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예빈산 끝자락 양지바른 곳에 꽤 큰 묘가 도드라져 보였다. 초계 중계 하계로 구획하고 석물을 갖춘 웅장한 묘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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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확 묘역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다. 훗날 인수대비가 된 그의 딸은 아버지 묘역에 거대한 신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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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사후지지입니까?"
"좌의정 한확의 묘입니다."
"형님의 빙장어른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노산군 어릴 때 가장 따르던 형이 수양의 맏아들 도원군이다. 그 역시 어린 임금을 깍듯이 예우했고 조카를 흔들려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허나, 대세는 거역할 수 없는 일. 용상에 있던 아우는 유배 길에 올랐고 아버지를 미워하던 아들은 세자에 올랐다.

"꽤 크군요."
"그래서 동네이름이 능내리가 되었다 하옵니다."
"그래요?"

반문하는 노산군의 얼굴이 유쾌하지 않은 낯빛이다. 아버지 문종을 따라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가보았고 할아버지 태종의 헌릉과 세종의 영릉을 참배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승하한 아버지 문종의 현릉도 다녀왔다. 그에 못지않게 큰 묘역인 것 같았다.

왕릉보다 큰 묘는 처벌의 대상이었다

비록 귀양 가는 군주이지만 왕실 법도와 사대부의 도리를 꿰뚫어 보고 있는 노산군이다. 부귀영화를 누린 자라도 임금 앞에선 한낱 신하에 불과하다. 때문에 고위관직을 영위한 사대부라도 왕릉을 넘어설 수 없다.

"장명등과 문인석은 세웠으나 곡장을 두르지 않았고 석수와 무인석은 세우지 않았다 합니다."
"당연한 것을 무엇 하러 말씀하십니까?"

왕릉이 아닌 일반인들의 묘에 호랑이나 말 등 동물의 형상을 세우거나 투구에 칼을 짚고 서있는 무인석을 세우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군권에 도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처벌의 대상이다.

"편히 쉬시오."

노산군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조선왕실과 인연을 맺었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신덕왕후를 배출한 강씨가 그랬고, 원경왕후의 친정 민씨가 그랬다. 수양의 외가 청송 심씨도 그 화(禍)를 피해가지 못했다. 노산의 처가 송씨는 화중(禍中)에 있고 한확은 진행 중이다.

임금의 장인이 되고 싶어 실력자의 아들을 사위로 삼았다. 그 사위가 세자에 올랐다. 세자 사위가 용상에 오르고 못 오르고는 하늘의 뜻이다. 천명(天命)을 못 보고 하늘의 부름을 받았지만 지하에서도 기대할 것이다. 훗날, 천하의 장자방 한명회도 부관참시를 당했는데 한확은 비켜갔다. 묘를 잘 써서일까? 인수대비라는 걸출한 딸이 있어서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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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운탄 겸재 정선이 강 중심에서 바라본 녹운탄. 한강제일의 절경은 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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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금까지 보이던 삼각산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예빈산이 눈앞을 가렸다. 빈과 봉은 쌍둥이 산이다. 경안천이 합류하는 지점을 통과했다. 눈앞에 수려한 경관이 펼쳐졌다. 기암괴석이 병풍을 두른 듯 자태를 뽐내고 깎아지른 절벽에 뿌리 내린 한 그루 소나무가 일품이었다.

"이곳이 어디오?"
"녹운탄이라 하옵니다."

홍득경이 두 손을 모았다.

"금강산을 그림으로 보았는데 그에 못지않을 듯 하오."
"경강을 제외한 한강 팔경 중 으뜸입니다."

녹운탄을 지나 약간 북상하니 북한강 물줄기와 남한강 물줄기가 서로 만나 어깨를 부딪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일렁이는 물결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그들 만남을 바라보는 순간, 부인 송씨가 망막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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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수리 두물머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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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상공에 머물던 비구름 형제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동쪽으로 흘러갔다. 형제애도 백두대간 영마루가 고비다. 이별의 순간이 왔다. 손을 꼭 잡은 모습을 시기한 바람이 훼방을 놓았다. 빗방울이 되어 영서에 내린 형은 서해로 흘러갔고 영동에 내린 아우는 동해로 흘러 태평양으로 나갔다. 두 형제가 언제 다시 만날런지 알 수 없다.

행운의 형제도 있었다. 영서에 내린 형제 구름이다. 금강산에 내린 형은 북한강을 타고 내려왔고 태백산에 내린 아우는 제당궁 샘에 현신했다 지하로 스며들어 검룡소에서 다시 솟아올랐다. 그리고 흘러흘러 형제는 만났다. 두물머리에서. 이렇듯 하잘 것 없는 빗방울도 서로 만나 기쁨을 노래하는데 잠시 헤어진 부인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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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강리 단종이 쉬어갔던 자리를 커다란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으며 어린이들이 뛰놀던 초등학교는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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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가 짙어갈 무렵 이포나루에 도착했다. 강원도의 삼림자원과 경기도의 곡물이 집산되는 경강 이북에서 제일 번다한 나루다. 이포에서 하룻밤을 묵은 노산군 일행은 배를 버리고 말을 탔다. 흥원창이 있는 흥호나루까지 배로 갈 수 있지만 안전을 위해 육로를 택한 것이다.

여주 상구리에 도착했다. 군사들이 다리쉼을 하는 동안 목을 축였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깨끗했다.

"어! 시원하다."
"사람들이 어수정(御水井)이라 부르겠습니다."
"난, 임금도 아니고 귀양 가는 몸인데 어수정은 무슨?"
"이런 두메산골에서야 용상에 계셨던 분이 마시기만 해도 영광입지요."

홍득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원통고개를 넘은 행렬은 흥호리에서 1박하고 단강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제부터는 험악한 산악지형이다. 말을 버리고 나귀를 탔다. 말은 평야는 잘 달리지만 가파른 언덕에서는 힘을 못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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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지형 단종 유배길 가까운 곳에 있는 한반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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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내려와 화당리에서 하룻밤을 묵은 행렬은 구령재를 넘고 용암리를 지나 신림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묵은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제까지는 백운산 자락을 끼고 돌았지만 이제 부터는 더 험준한 감악산을 넘어야 한다. 고개를 내려오면 또 다시 고개가 나타났다. 싸리치를 넘고 솔치를 오르니 갈증이 밀려왔다.

"주천의 물맛은 조선의 일품입니다."
"그렇게 좋은가?"
"같은 재료로 담가도 이곳 물로 담그면 명주(名酒)가 된다하옵니다."

홍득경이 물그릇을 올렸다.

"과연 명물이구나."

노산군이 사발을 내려놓으며 감탄했다.

"후세 사람들이 어음정(御飮井)이라 이르겠습니다."
"또 어음인가?"

노산군이 장난기어린 눈으로 홍득경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김자행이 끼어들었다.

"귀하신 몸, 해갈지처라 하겠지요."

조롱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다. 신흥역에서 하룻밤을 묵고 공순원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제부터는 영월 땅이다. 유배지가 멀지 않았다. 노산군도 지치고 호송하는 군사들도 다리가 풀렸다. 고개 마루에 올랐다. 솔바람이 상쾌하다.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데 이다지도 험준한가?"
"아직 이름은 없으나 마마께서 오르셨으니 사람들이 군등치(君登峙)라 부를 것입니다."
"내가 용포를 벗은 지 얼마인데 임금이란 말인가?"
"노산군도 군(君)입지요."

김자행이 어깃장을 놓았다.

"후세 사람들은 나를 노산군으로 기억하기보다 군주로서 기억할 걸세."

꼭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말이 목구멍을 넘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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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일치고개 정상에는 서쪽의 해를 보고 절하는 단종 조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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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고개에 이르렀다. 노산군이 나귀에서 내렸다. 먼 하늘을 바라보던 노산군이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절을 올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행동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임금이 계신 곳에 절을 올리셨습니까?"

김자행이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수양을 임금으로 인정하느냐는 비웃음이었다.

"서쪽 하늘에 해가 있지를 않습니까?"

뼈있는 한 마디에 말을 잃은 김자행이 입을 닫았다. 갈골, 옥녀봉, 선돌, 문개실 마을을 지나 청령포에 도착했다. 한양을 떠난 지 7일만이다. 포구는 잔잔하고 나룻배 한 척이 외롭게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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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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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가 드세 보이는데 이름을 뭐라 하는가?"
"도산(刀山)이라 하옵니다.

영접 나온 강원도 관찰사 김광수가 머리를 조아렸다.

"칼 도(刀)자가 제격이군요."
"지명에는 다 유래가 있습죠."

동문서답인지 현문우답인지 알 수 없다.

"깎아지른 절벽에 대여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모습이 육지고도(陸地孤島)같소이다."

관찰사와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아뭇소리 못하고 있을 때 나룻배가 가까이 왔다.

"오르소서."
일다경(一茶頃)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배가 건너편 강안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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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가 단종이 유배생활 했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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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렸다. 자갈밭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자갈밭을 지나 조금 가니 기와집 한 채와 초가집 한 채가 덩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 꽤 오래된 집이었다. 기와집을 보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숙부는 '성삼문이 상왕을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몄기에 나를 노산군으로 강등시키고 영월로 보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삼문이 경솔하지 않았나? 생각해보기도 했다. 헌데, 이 집은 꽤 오래전에 지어진 집이 아닌가? 이렇게 험악한 곳에 그 누가 살 집을 지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삼문은 구실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래도 숙부이기 때문에 믿고 싶었다. 허나. 이제 접어야겠다. 성삼문 사건 이전부터 이미 날 여기로 보내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증거가 바로 이 집이지 않은가?"

밤이 깊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밖으로 나왔다. 관음송 솔바람이 스산하다. 이 밤, 중전 송씨는 무얼 하고 있을까? 보고 싶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송씨를 닮은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