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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시가지의 서쪽은 산에 막히면서 끝이 난다. 산은 금구리 현대아파트 담장 옆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등산로의 입구를 찾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입구가 워낙 특이하기 때문이다.

 

입구는 엄밀히 말하면 길이 아니다. 흙길도 아니고, 심지어 하루치기로 포장된 시멘트 길도 아니다. 아파트 단지를 빙 두르는 차도와 등산로 입구를 잇는 것은 길이 아니라 손잡이가 달린 계단. 흔히 삼성산이라 부르는 옥천의 관산성을 오르는 길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라 옥천에서는 야산, 백제 구진벼루에서는 가파른 절벽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따라서 이 정도의 얕은 산에 과연 삼국 시대의 성이 있었을까 싶은 의심부터 난다. 하지만 꼭대기 턱밑에 올라 신라군들의 우물터 유적을 보게 되면 생각이 확 바뀐다. 특히 지금까지 올라온 길이 아닌, 반대편의 산비탈을 이루는 절벽과 그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 이제는 거꾸로 분명히 산성이 있었다는 확신이 든다.

 

백제 성왕이 전사한 구진벼루 쪽, 즉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이 손에 잡힐 듯 환하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보다 더 산성 구축에 적합한 요지도 없을 듯하다. 꼭대기에는 정지용의 <산에서 온 새>를 새겨놓은 빗돌도 있지만, 역사 유적지다운 안내판도 어김없이 세워져 있다.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산6-2에 자리잡은 이 '삼성산(三城山) 성터(城址)'는 '삼국 시대의 전형적인 석축 삼태기형 산성으로 남쪽을 방어하도록' 축조되었다. '남쪽으로 옥천 시가지가 발아래 있고, 멀리 마니산성(이원면 평계리)이 아스라이 보이며, 북쪽으로는 서산성(옥천읍 서정리)이 손에 닿을 듯 가깝고, 멀리 고리산성(군북면 환평리)과 노고성(군북면 이백리)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서 가장 탁 트인 전망을 보여주는 방향은 동북쪽이다. 동북쪽의 시가지 일대와, 그 너머로 들판을 지나 푸른 하늘 위까지 가로로 길게 걸쳐져 있는 속리산의 파르스름한 줄기는 밝은 화풍의 수채화가가 그려낸 풍경화처럼 맑고 곱다. 아까 산을 오르면서 '전망대가 왜 정상도 아닌 곳에, 이렇게 동북쪽을 바라보게 건립돼 있을까' 의아했었는데, 이제 그 궁금증은 다 풀렸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에 진지한 애정을 가진 답사자는 시원하게 펼쳐지는 동북쪽이 아닌, 수풀에 가려 조금은 답답한 서북쪽을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세월의 풍상을 물리치고 끊임없이 자라난 온갖 나무들 때문에 전망이 좀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나무들 사이로 줄기차게 이어지는 풍경 속에 담긴 뜻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산의 북쪽을 휘도는 강물은 마치 그리스 문자의 마지막 자모인 오메가(ῼ)처럼 굽이치며 흘러간다. 경치도 아름답지만, 지금 서 있는 이곳 관산성(管山城)과, 저 아래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구진벼루에 서린 애통한 역사를 알기에 답사자는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관산성 아래 서화천의 구진벼루, 백제 27대 임금인 성왕이 죽은 곳이다.

 

절벽 이어지는 서화천 강변, 왕이 죽은 궂은 곳

 

'구진벼루'는 '궂은 벼랑'이라는 뜻이다. 관산성은 당시 신라의 땅이었지만, 서화천 강변의 월전리 일대는 백제의 영토였다. 그러니 자기 땅에서 신라군에게 피살된 임금을 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강물을 따라 죽 이어지는 벼랑들이 예전에는 그저 아름답기만 했는데, 국왕이 피살된 이후로는 궂게만 보였을 터이다.

 

관산성에서 내려와 구진벼루로 나아간다. 현대아파트에서 왼쪽으로 도로를 따라가면 금세 삼양사거리가 나온다. 이 사거리에서 다시 왼쪽으로 접어든다. 만약 신호를 받아서 정차를 했다면, 왼쪽으로 산비탈을 응시하라. 옥천척화비(斥和碑)가 보인다.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산 4-4번지에 세워져 있는 척화비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6호이다.

 

왼쪽에는 관산성, 오른쪽에 서화천을 두고 있는 오르막 도로로 들어선다. '성왕로'이다. 500m쯤 갔을까, 강을 따라 오른쪽으로 굽은 좁은 도로가 나타난다. 길은 고가도로 아래를 통과한다. 하지만 이 길로 들어서면 안 된다. 길은 강을 건넜다가 산 아래에서 막혀버린다.

 

그러나 허탈하게 돌아나오는 답사지라고 해서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막힌 길은 구진벼루 일대의 군사적 성격을 깨닫게 해준다. 구진벼루의 하류인 이 볼록한 땅에는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이곳이 군사를 숨겨두기에 적지라는 사실을 백제의 성왕은 알지 못했거나 무시한 반면,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신라 장군 무력(武力)은 매복군을 배치하여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다.

 

월전리 사람들, 성왕 유적지라는 자부심 가득

 

지금까지 오른 만큼 또 오르면 도로는 다시 강과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강을 바라보며 내려간다. 강을 건너고,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면 월전리가 나타난다. 월전리는 구진벼루가 만들어낸 농토에 건설된 마을이다. 아마 성왕이 죽을 당시에도 이곳에는 백제의 백성들이 살고 있었으리라.

 

과연 월전리는 역사를 간직한 마을답다. 마을 복판에 '월전리 마을자랑비'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마을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것이라 꾸밈없이 소박하다. 작은 빗돌을 읽어본다. 성실한 답사자라면 어느 곳에서든 현장에 제시돼 있는 안내문을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법이다.

 

"월전리(月田里)는 다리골(月谷)과 군전(軍田)으로 서화천(西華川)의 맑은 물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식장산(食藏山)의 푸르름이 마을을 한층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용(龍)이 하늘에 오르려다 바위가 되었다는 용바위와, 남자의 씩씩한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는 장군대좌(將軍大座) 길지(吉地)는 부락의 신비스러움을 느끼게 하며, 앞산의 관산성(管山城)과 뒷산의 할미성(老姑城)은 삼국의 국경임을 증명하고, 말무덤과 구즌벼루는 백제(百濟) 성왕(聖王)의 슬픈 사연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전설과 문학적 유산으로 둘러싸인 자랑스러운 마을답게 오늘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문화유산을 잘 보전함은 물론 이를 널리 소개하고 바르게 생활하여 더욱 자랑스러운 마을로 가꾸자는 울의 의지를 여기 자랑비에 새깁니다."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러면 어떤가. 이 빗돌을 발견한 답사자는 더 이상 구진벼루(마을 빗돌에는 '구즌벼루')를 찾느라 헤매지 않아도 되니 그만하면 주민들의 빗돌은 성왕을 위한 신도비(神道碑) 역할까지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서화천은 관산성 비탈을 타고 옥천 읍내로 흘러들어갔다가 이윽고 금강에 닿는다. 서화천 물길을 따라 들어가면 길은 구진벼루로 이어진다. 왼쪽에 들판을 두고 오른쪽에 굽이굽이 흐느끼는 물결을 따라 걷는다. '벼랑'에 기암괴석이 많고 나무가 울창한데다 자갈과 모래가 천변에 많은 구진벼루 일대는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물놀이 장소. 백제 중흥을 꿈꾸던 성왕은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었지만, 아이들은 그런 역사와 아무런 상관없이 시원한 물놀이가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백제 영웅 전사지, 지금은 여름철 유명 유원지

 

구진벼루의 역사를 <삼국사기>에서 읽어본다. 진흥왕 15년(554)의 기록이다.

 

"백제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 대가야)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했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밀렸다. 신주(新州)의 군주(軍主) 김무력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본래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기로 약속했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남침에 시달리느라 나제 연합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침내 백제는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참살된 이후 거의 100년 동안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하류를 수복했고, 신라도 한강 상류를 차지하게 됐다.

 

백제 성왕은 수세에 몰린 고구려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신라에 재차 북침을 제안했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다. 만일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면서 "(백제의 연합 침략 제안을) 고구려에 전했다. 고구려는 진흥왕의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고 말했단다.

 

진흥왕의 실익 추구 양다리 작전, 성왕에게는 독이 되고

 

그러면서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가 맞수가 돼 싸우느라 신라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는 틈을 노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은 550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3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하는 등 '피곤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갑사(甲士) 천 명을 배치하여 지키게 했다'. 신라는 고구려만이 아니라 동맹국인 백제의 땅까지 가로챈 것이었다.

 

백제의 성왕이 화를 머리끝까지 낸 것은 당연했다. 고구려에 대패해 서울까지 옮긴 지 근 100년만에 나라의 중흥을 도모하여 제법 성과를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신라의 배신으로 '백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으니 백제왕으로서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성왕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다.

 

총지휘관는 왕자 여창(餘昌)이었다. 여창은 신라군과 잘 싸웠지만 불운하게도 전쟁 중에 병에 걸리고 말았다. 성왕은 아들이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듣고 한밤중에 말을 달려 백제 진중으로 향했다. 아마도 왕은 서화천 반대편의 구진벼루 쪽은 백제 땅이라는 이유로 방심을 했던 듯하다. 왕이 거느린 군사는 불과 50명이었다.

 

백제와 성왕으로서는 더 이상 불행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들은 신라군이 거기서 매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성왕은 결국 포로로 잡힌다. <일본서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신라 삼년산성의 말 먹이는 노비 도도가 성왕을 사로잡았다. 도도가 두 번 절하고 왕을 참수하려 하니 성왕이 '종놈이 감히 왕의 머리를 베려 하느냐'고 꾸짖었다. 도도가 '우리나라 법은 약속을 어긴 자는 왕이라도 종놈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성왕은 '과인은 늘 너희 나라의 배신에 골수가 사무쳐 왔다'고 탄식했고, 마침내 목이 잘렸다."

 

백제 장관은 6명, 그 중 4명 관산성 전투에서 죽어

 

왕자 여창도 포위를 뚫지 못해 거의 죽을 지경이 됐다. <일본서기>는 왜군 장수 "축자국조(筑紫國造)가 활을 쏘아 신라 기병 중 최강자를 떨어뜨리고, 이어 비오듯 계속 화살을 날려 포위군을 물리쳐 살길이 터지자 여창과 장수들이 그리로 도망쳐 나왔다"고 전한다. 이 사건을 <삼국사기>는 "(성왕의 목을 벤) 승세를 탄 신라군이 대승을 거뒀으며 (본래 백제에는 장관급인 좌평이 여섯 명인데 그 중)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9천6백 명을 참살했다. 백제구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한 나라의 제왕으로서 성왕의 그날 행동은 너무나 가벼웠다. 그 탓에, 五十(오십) 명이 아니라 五千(오천) 명인데 <일본서기>의 기록자가 한 획을 빠뜨리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당시 5천 명이면 지금의 5만 명에 해당되는데 그리 쉽게 국왕이 포로까지 되었을까.

 

어쨌든 구진벼루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포로가 됐다가 참수(斬首)돼 죽는 것을 보면, 백제군의 숫자가 몇 명이었느냐와 관계없이 성왕(聖王)은 (백제인들이 자신의 왕명에 성스러울 성 자를 넣을 정도로) 뛰어난 지도자였음에도 그날 밤의 오판으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성왕의 마지막 탄식이 정말 안타깝다. 도도는 신라가 먼저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신라 조정은 백제가 배신했다고 널리 강조해 자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래야 전쟁에 나서는 장수와 군사들이 더욱 뜨겁게 싸우기 때문이다.

 

성왕의 목을 벤 도도는 종이었을까, 중간 간부였을까

 

성왕은 '종'과 다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려 달라'고 애걸을 할 수도 없었다. 일국의 왕인 자신의 목을 베려는 자가 신라의 임금도 아니고, 총지휘관인 무력(武力)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군도 아닌, 말 먹이는 '종'. 하지만 어쩔 것인가. '종'이 '왕'의 목을 베면 이는 두고두고 역사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신라는 성왕의 목을 '말 먹이는 종' 도도에게 맡겼던 듯하다.

 

하지만 <일본서기>와 달리 <삼국사기>에는 도도가 '말 먹이는 종'이 아니라 '고간(高干)'으로 나온다. 고간은 경직(京職)의 '급벌찬'에 해당하는 외직(外職)의 벼슬이다. 즉, 급벌찬이 서울에서 근무하는 17등급의 벼슬 중 9등급쯤 되는 관직이니 고간은 외직에서 중간 정도 되는 벼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종'이 백제 성왕의 목을 베었다는 <일본서기>의 기술보다는 <삼국유사>의 '고간' 표현이 훨씬 사실에 가까울 듯하다.

 

용전리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서화천 강변을 타고 북쪽 하류로 내려가면, 구진벼루 중 물굽이가 가장 심하게 돌아가는 곳이 나타난다. 이곳에 성왕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비 뒤로는 길이 강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저 혼자 왼쪽의 작은 고개를 넘어서는 농로가 되고 임도가 되면서 사라져 버린다. '하늘향기'라는 예쁜 이름의 민박집 한 채가 사실상 길의 끝이다.

 

슬픈 역사 서려 있지만 구진벼루의 강물은 도도히 흐른다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답사자는 되돌아와 검은 바탕돌에 '百濟國二十六代聖王遺跡地(백제국 이십육대 성왕 유적지)'라고 새겨진 흰 글자들이 관산성 쪽을 응시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서화천 푸른 물줄기는, 작아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보려고 발버둥쳤던 성왕의 생애가 이렇게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막을 내렸다는 지난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서화천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태그:#성왕, #관산성, #구진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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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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