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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수강궁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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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예문관 제학 윤사윤이 고했다.

"돈녕부사 송현수와 돈녕부 판관 권완이 반역을 도모합니다."

수양이 즉시 대소신료들을 불러들였다. 영의정 정인지, 우의정 정창손, 우찬성 신숙주, 우참찬 박중손, 병조판서 홍달손, 예조판서 홍윤성, 영중추원사 윤사로, 판중추원사 이인손, 공조판서 양정, 이조판서 권남, 병조참판 구치관, 형조참판 황효원, 도승지 한명회, 좌승지 조석문, 우부승지 권지, 동부승지 김질이 입시했다.

계유년 정난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판서급으로 성장했고 한명회가 도승지를 꿰찼다. 뿐만 아니라 성삼문 사건에 불을 붙인 김질이 승지로 등장했고 사위를 등에 업었던 정창손은 우의정에 올랐다.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사간원과 사헌부를 양사(兩司)라 한다. 여기에 홍문관이 가세하면 삼사(三司)가 된다. 최고 권력자가 언론으로부터 추동력을 얻어 정치적인 사건을 처리하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에 더 욕심을 내면 홍문관이 빠지고 형조가 가담하는 삼성(三省)을 이용할 수 있다. 헌데, 일반 백성 김정수의 제보를 전 예문관 제학 윤사윤이 발고하는 형식을 취했다.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자연스러운 여론 냄새를 풍겼지만 뭔가 어색했다.

송현수와 권완은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이다. 수양이 어린 조카를 장가들이려고 규수를 고를 때 마지막 간택에서 송현수의 딸과 권완의 딸이 마주쳤다. 경쟁자였다. 송현수의 딸이 왕비가 되었고 권완의 딸은 후궁이 되었다. 동시에 임금의 여자가 된 것이다. 허나, 하나는 왕비로 하나는 잉(媵)으로 운명이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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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금부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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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수와 권완을 조옥에 가둔 금부는 그들의 계집종 동백과 덕비를 잡아들였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 들어온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들이 갇힌 이곳이 제 발로 걸어 나갈 수 없는 의금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겁먹은 그들은 형졸들이 책상을 '탁' 치기만 해도 사시나무 떨 듯 떨었고 묻는 말에 "예, 예"로 답했다. 원하는 답을 받아 낸 의금부가 공초를 갖춰 보고했다.

"계집종들이 말하기를 권완의 집에 송현수가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하고, 권완이 실토하기를 '송현수와 밀통하면서 상왕을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권완과 송현수를 능지처사하소서."

"송현수도 그리 자백했는가?"
"완강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권완은 하옥하고 송현수는 방면하라."

송현수의 석방에 불만을 품은 대사헌 김연지와 좌사간 김종순이 상소를 올렸다. 대간이 본격 등장한 것이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신(臣)은 역린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역린(逆鱗)의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베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벌이 죄에 합당하지 않으면 악한 짓을 징계할 길이 없다'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송현수를 법대로 처치하여 나라의 법을 바로잡아 주소서."

"종들은 자복했으나 본인이 토설하지 않으니 죄 줄 수 없다."

수양이 살짝 비켜갔다.

"송현수가 성삼문 반역에 가담하여 죽을죄를 지었으나 성상의 너그러운 은혜로 면죄하여 주었는데 이제 또 권완과 몰래 내통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죄가 큰데도 죽기를 무릅쓰고 죄를 고백하지 않으니 청컨대 법에 의하여 단죄하소서."

"역모를 꾀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느냐?"

"송현수가 대역의 죄를 두 번이나 범하였는데 두 번 다 용서하신다면 적(賊)을 치고 악(惡)을 징계하는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 번인들 못하겠느냐?"

"송현수가 죄를 자복하지 않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죄가 크기 때문에 죽을까봐 실토하지 않은 것입니다. 율문으로 결단하소서."

"증거 없는 징벌은 법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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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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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의 윤허를 받아내지 못한 대소신료들이 표적을 바꿨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 홀로 있는 상왕이다. 각본에 따른 유도였는지 모른다. 의정부의 원로 정인지가 총대를 멨다. 우의정 정창손, 좌찬성 강맹경, 우찬성 신숙주, 좌참찬 황수신과 함께 몰려왔다.

"지금 상왕의 명위(名位)가 전하와 같아 이를 빌미로 난을 꾀하는 자가 있습니다. 성삼문의 대역이 그렇고 권완과 송현수의 역모가 그렇습니다. 상왕으로 하여금 한양을 떠나 다른 곳에 있게 하소서."

금기가 깨졌다. 상왕 폐출이다. 그것은 아직까지 아무도 거론한 바 없고 거론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 됐다. 금단의 언어에 족쇄가 풀린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호조판서 이인손, 이조판서 권남, 병조판서 홍달손, 예조판서 박중손, 공조판서 김하, 형조판서 성봉조, 이조참판 박원형, 호조참판 어효첨 등 정난의 주역들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두 임금 사이에 틈을 타서 난을 꾀하는 자가 있으니 청컨대 상왕으로 하여금 피하여 있게 하여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소서."

"과인과 상왕 사이에는 틈이 없다."

"비록 친 부자 사이라도 혐의스러운 일이 있으면 피하는 것이니 청컨대 신 등의 청을 따라서 종사의 계책을 공고하게 하소서."

"중국에 정통고사(正統故事)가 있고 또 내 뜻이 본래 이와 같지 않으니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봇물이 터졌으니 시간은 수양 편이다. 서두를 것이 없다. 시간이 가면 해결해 준다. 수양과 신하들의 공방을 지켜보는 상왕과 의덕왕비는 바늘방석이었다. 내보내기 전에 나가고 싶었다. 허나,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종실의 좌장 양녕대군은 왕위 찬탈을 왜 도왔을까?

마지막으로 종실의 좌장 양녕대군이 나섰다. 양녕대군 이제는 수양의 아버지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큰 어른이다. 수양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양녕대군이 여러 종친을 거느리고 영의정 정인지, 문무백관과 함께 입궐했다.

"상왕을 궁에서 내보내소서."

이제는 수양도 자신의 장자방이 써준 답을 내놓아야 한다. 수순이다. 송현수를 거론한 것은 본론을 꺼내기 위한 변죽이었다. 수양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상왕도 모의에 참여하였다.' 하였으므로 종친과 백관들이 합사하여 '상왕도 죄를 지었으니 도성에 편안히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과인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처음에 먹은 마음을 지키려 하였다.

허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심이 안정되지 아니하고 계속 잇달아 난(亂)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운 은의(恩誼)로써 나라의 큰 법을 굽힐 수 있겠는가?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 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궁에서 내보내 영월에 거주케 하고 의덕왕대비는 서인으로 강등하여 궁에서 폐출하라."

올 것이 왔다. 정난으로부터 3년 8개월. 참으로 먼 길 에둘러 왔다. '조카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려고 세월을 보내며 꼼수를 부려봤지만 종착지는 찬탈(簒奪)이다. 역사는 행하는 자가 쓰지 않는다. 시대를 호흡했던 자는 역사에 부역할 뿐이다. 하여, 시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의 가치를 정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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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강궁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궁궐터에 고목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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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의 우익이 인왕이라면 좌익은 매봉이다. 백악으로 달리던 삼각산 줄기가 타락으로 달리려다 잠시 쉬어가는 곳. 그곳에 매봉이 있다.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매봉은 솟아오르지 않고 평평한 봉우리다. 때문에 사람들은 남자의 기상을 닮은 백악을 양산(陽山)이라 부르고 매봉을 음산(陰山)이라 부른다.

야심한 밤. 매봉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궐 사람들은 궁궐의 뒷산 매봉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리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부~엉' 하는 울음소리도 음산하지만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거나 왕자들이 죽었다. 그래서 궁인들은 뒷산의 부엉이를 저승사자의 현신이라 생각했다.

나이 어린 왕과 왕비,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

구중궁궐 깊은 곳 수강궁. 상왕의 유폐공간이다.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시중드는 나인들을 제외하곤 하루 종일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적적하기 이를데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 상왕의 처소에도 밤은 깊어갔다. 궁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전하! 옥체를 보존하소서."

의덕왕비 송씨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폐서인이 되어 궁 밖으로 쫓겨난다는 사실보다도 의지할 데 없는 어린 임금이 머나먼 타향 영월로 가게 된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지만 그것도 나라에서 허락해 주어야 가능한 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왕비를 통곡하게 했다.

조선 최초의 국모가 되어 대궐에 들어올 때는 온 세상을 품에 안은 듯 가슴 벅찼다. 훌륭한 왕비가 되어 백성을 어여삐 생각하는 국모가 되리라 다짐했다. 허나, 그것도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궁궐 깊은 곳에 유폐되면서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고 생이별을 해야 한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중전도 더욱 힘쓰시오."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이 없다. 누나 같은 왕비였고 엄마 같은 중전이었다. 어린 임금에겐 소중한 여인이었다.

세상에 태어나던 날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어린 자신을 남겨두고 문종이 승하했다. 용상에 올라 만인지상이 되었지만 하늘아래 천애고아였다. 누이 경혜공주가 있지만 만날 길이 없다. 의지했던 매형 영양위 정종은 귀양살이 떠났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란 왕비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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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업원 구기 전봉후암어천만년 이라는 글씨는 영조가 정순왕후를 기리기 위하여 직접 쓴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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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지 않은 이른 새벽.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의덕 왕비가 궁을 나섰다. 호송단을 꾸려야 하는 상왕보다 먼저 궁을 나선 것이다.

궁을 나온 의덕왕비는 흥인문 밖 정업원에 들어갔다. 정업원은 태조 이성계가 세운 궁궐 여인들의 노후 안식처다. 맨 처음 들어간 여인은 공민왕이 총애했던 혜비였다. 멸망한 고려 왕실의 여인들을 홀대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정업원을 개설했지만 그 이면에는 혜비와의 특별한 인연이 작용했다.

여자는 정절을 지켰고 남자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노국공주와 혼인한 공민왕은 8년이 되어도 후사가 없자 아들을 낳기 위하여 여자를 들였다. 이 때 들어온 후궁이 혜비, 익비, 정비, 신비다. 허나, 이들도 회임 기미가 없었다. 뒤늦게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했다. 준수한 젊은이들을 뽑아 좌우에 둔 공민왕은 후궁들에게 이들과 동침할 것을 명했다. 이때 끝까지 왕명을 거역한 여자가 혜비였고 그녀의 뒤를 봐준 사람이 이성계였다. 여자는 정절을 지켰고 이성계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정업원에 자신의 막내 딸이 들어가리라고는 태조 이성계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이성계의 셋째 딸로 태어난 경순공주는 흥안군 이제와 혼인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그의 매부 이제를 주살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지아비와 형제를 잃고 망연자실한 경순공주의 머리를 이성계가 손수 깎아주었다. 그리고 명했다. 정업원에 들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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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망정 정순왕후가 매일 아침 언덕에 올라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영월로 떠난 단종의 안위를 빌었던 동망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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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에 들어간 의덕왕비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신을 궁에서 쫓아낸 권력가(家) 집안 딸의 환영이 어른거리는 정업원이 싫었다.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했다. 곤궁하게 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수양이 식량과 옷감을 내려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목구멍에 거미줄이 치는 한이 있어도 그 식량으로 풀칠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길쌈을 하고 채소를 심었다. 찬물 한 번 만져보지 않았던 손이 천연 물감을 만지며 형형색색 물들어 갔다. 궁에서 데리고 나온 시종이 옷감과 채소를 아랫마을 여인시장에 내다 팔아 식량을 사왔다. 궁중생활을 하던 왕비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소문을 접한 주변의 아낙들이 식량과 푸성귀를 가지고 찾아와 왕비를 위로하고 함께 슬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