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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일 이집트 포트사이드시의 축구 경기장에서는 원정팀인 알-아할리의 팬과 선수들이 홈팀 알-마스리팀 팬들로 추정되는 다수의 군중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알-아할리팀의 팬과 선수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당해야 했다. 퇴로는 막혀 있었고 그들은 저항할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 목격자들은 증언했다. 이날의 충돌로 70여 명이 죽고 1000여 명이 다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 축구역사상 가장 끔찍한 이날의 유혈충돌은 시민혁명 1주기와 맞물려 전국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후 불과 며칠 동안 이집트 전국에서 발생한 시위 관련 사상자 수는 이미 200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포트사이드에서 불어온 피바람 소식에 나는 가장 먼저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시 타흐리르광장 부근에서 민박집을 하고 있는 지인을 떠올렸다. 평소에도 아픈 사람, 다친 사람을 그냥 스쳐지나지 못하는 분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

"언니, 어디 나가지 말고, 이럴 땐 잠잠해질 때까지 그냥 집에 있는 게 상책이야. 이상해. 지난 혁명 때랑 분위기가 비슷해."

역시 타흐리르광장 부근에 사무실이 있는 나 역시도 집에서 며칠간 추이를 지켜보면서 출근을 자제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벌써 나갔다 왔어. 이젠 안 나가."

그때가 이미 밤이었고, 그것이 김은주씨와 내가 나눈 마지막 전화통화였다.

시위 부상자를 치료하다 느닷없이 체포된 그녀

개인적인 업무가 있어 며칠 뒤에야 나는 그녀가 잘 있는지 안부를 물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약혼자 요셉이었다. 그녀가 부상 입은 시위자들을 간호하던 도중 들이닥친 경찰에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했다.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음성이었다.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에서 김은주씨가 체포되자마자 찾아왔다는 말에 나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상황을 파악 중이며 대사관에서 식사와 담요 등을 공급하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지금 가도 면회할 수 없다고 했다. 정확한 죄목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도 이집트 당국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다. 나는 때마침 요셉이 음식을 넣어주러 간다고 하여 그를 따라나섰다. 아무래도 혼자서 경찰서 유치장을 찾아가기가 나는 무서웠다. 그녀가 감금되어 있는 아부딘경찰서는 매우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시설도 열악했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겼으며 근무하고 있는 경찰들은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녁에 한 번 있는 면회시간을 어기고 대낮에 찾아온 우리를 그들은 꽤 오랫동안 힐난했다. 내가 '나는 저녁에는 절대로 밖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시간에 왔으니 이해해달라'고 사정을 한 후에야 그들은 마치 선심을 쓰듯 나를 그녀의 유치장으로 안내했다. 저녁에 다시 올 계획이 있던 요셉은 면회를 허락받지 못했다.

김은주씨와 나는 서로를 알아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서로를 얼싸안았다. 힘없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꼭 꺼내줄게"라는 공수표가 전부였다. 내가 싸간 도시락에는 쇠수저가 포함되어 있어 간수가 걸러내었고, 그녀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평소의 화통하고 대범했던 그녀답지 않게 그녀는 매우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져 있었다. 나에게 허락된 그 짧은 면회시간 동안에 그녀는 계속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다들 거짓말을 하고 있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그날 돌아와 페이스북에 그녀의 소식을 올렸다.

이미 '카이로 시위 관련 첫 한국인 체포'라는 제목의 기사가 국내 신문에 보도된 때였고, 때마침 시나이반도를 여행하던 우리나라 성지순례단 중 가이드 포함 세 명의 한국인이 무장괴한에게 납치되었다는 뉴스가 그날의 매스컴과 포털사이트를 도배하고 있었다.

나는 "김은주씨를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사방에 뿌렸다. 그리고 한국대사관의 서기관님으로부터 전화도 받았다. 사실은 매일 방문하여 돕고 있다는 말씀을 주셨고, 그동안 한국대사관이 도와주지 않고 있다고 오해했는데,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했다.

'제발 그녀를 거기서 나오게만 해주세요.'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언젠가 그녀가 이집트에 온 이유가 기후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과거에 암환자였고 심장도 좋지 않으며, 절대 과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체 내가 뭘 했길래?" 서럽게 울던 그녀

며칠 뒤인 2월 14일, 그녀는 갑작스럽게 지방에 있는 여자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서기관님도 당황하셨고 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건강검진을 한다며 입은 옷차림 그대로 데리고 나가서는 몇 가지 건강체크를 한 뒤 곧장 교도소로 실어갔다고 했다.

경찰서 유치장에는 이 겨울에 반드시 그녀에게 필요한 담요와 옷가지들, 그리고 안경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는데도 그 경찰서의 누구 하나 그것들을 챙겨가라고 귀띔해준 사람이 없었고 챙겨준 사람도 없었다. '아… 이집트라서인가'라고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규정에도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 공관에조차 사후통보라니.

김은주씨가 여자 교도소로 이감된 바로 다음 날인 2월 15일 오전에 나는 득달같이 대사관차에 올라탔다. 서기관님이 김은주씨를 방문하신다고 했기에 전날 밤 소식을 듣자마자 졸라서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는 카이로를 벗어나 나일강 하류로 두 시간 넘게 달려갔다. 중도에 시골들을 지났고 군부대 몇도 지났으며 나일강 다리도 두어 번 건너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워낙 외진 곳이라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도 조금 가서 다시 물어 전진해야 했다.

그렇게 찾아간 여자 교도소 앞길은 수감자들을 면회하러 온 가족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번 면회를 오면 그 다음 12일째 되는 날에야 재면회가 가능하다고 했다. 수감자 가족들은 2주일치 사식을 넣어주려 먹을 것 입을 것들을 이고 지고 왔다.

갓난아기를 비롯하여 아이들까지 데려온 가족들이 적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나서야 우리도 무언가를 가져왔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감옥에 들어가면 밖에서 입던 옷과 소지품들은 일체 쓰지 못한다는 생각만 했던 것일까.

교도소를 소개하는 교도소장의 얼굴에는 기름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는 수감자들에게 하루 세 끼가 틀림없이 나오며, 최고의 병원과 의료진이 교도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고 머물기 좋으며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장소는 바로 그 교도소라고 믿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얀 죄수복 차림의 김은주씨가 들어서자마자 그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김은주씨는 우리만큼이나 놀라고 당황한 듯이 보였다. 경찰서 유치장에서보다도 더 서럽게 울었다.

"대체 내가 뭘 했길래?"

그녀가 반문했다. 나도 서기관님도 차마 무어라 답해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쫓겨오다시피 이감된 그녀는 이곳에서는 새하얀 색이 아닌 것은 모조리 압수된다고 했다. 그녀는이 한겨울에 가운 같은 하얀 죄수복 한 장만 걸치고 떨고 있었다. 식사도 매우 비싼 값을 지불하고 사먹어야 하고, 담배가 현금처럼 유통된다고 했다. 교도소장의 자랑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현실에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재판이 20일이라고 하였기에 우리는 그날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여 카이로의 법정에서 재회하자고 약속했다.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는 내 말을 그녀는 십분이해했다.

그녀의 평소 성품으로 봐서 절대로 불미스런 선택을 할 리는 없겠지만,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다보면 혹시 누가 아는가. 나는 내내 마음을 졸이며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녀는 외려 나를 위로했고, 차분히 서기관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대사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노라고.

변론도 없는 재판... 그녀를 만날 날은 언제일까

2월 20일 오전 10시에 열릴 거라던 김은주씨의 재판은 무려 두 시간 반이나 지연되었다. 정치범으로 분류된 시위자들 및 일반 잡범들까지 무려 70여 명이 그녀와 같은 재판정에서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사는 모두 세 사람이었다. 비좁은 철창 안에 장정을 30여 명씩 나누어 밀어넣고, 김은주씨는 유일한 여죄수였으므로 경찰과 함께 맨 앞에 앉게 했다.

수감자가 많아서 재판이 길어진 것인지, 재판 시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변론을 듣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정 안에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김은주씨를 비롯하여 수감자들은 판사가 이름 확인을 할 때에만 입을 열어 자기 이름을 말하고, 나머지는 판사 세 명이서 서류를 훑어보고 뭔가 적고는 다음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변호사가 굳이 필요도 없었고, 변론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김은주씨를 빼낼 수 있을 것인가. 눈앞이 아득해졌다. 판사는 '우리 셋이 의논하여 판결을 내리면 공지하겠다'고 말하고는 퇴정해버렸다. 그녀가 추방되기만을 바라던 우리는(추방이 현재로선 그녀에게 내려질 수 있는 가장 가벼운 형벌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다시 한번 좌절해야만 했다.

나는 그 며칠 전 이날의 재판 일정을 인터넷에 공지하면서 한국인들이 많이 참여하여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 일이 있었다. 많이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나 혼자면 어떡하지, 그럼 정말 실망할 텐데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20일 오전 법원 앞에 모인 우리 교민들을 보고 나는 너무나 감사했고 감격했다. 그 아침에 모인 우리들 사이에는 '좋은 일 하다 잡힌 것이다. 우리 중 누가 또 이런 일을 겪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무언의 동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힘이 닿는 데까지 김은주씨가 필요로 할 물품들을 마련했고, 무사히 전달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날들을 죄없는 그녀가 교도소에서 보내게 될는지 현재로서 결정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음 재판은 15일 뒤이고, 그녀를 면회하기에 가능한 날은 바로 나흘 뒤라는 사실 외에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의 <마담 아미라의 이집트여행> 카페에도 동시에 실립니다



태그:#이집트시위, #한국인체포, #김은주, #서주선생, #한국인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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