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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동문이다
▲ 건춘문 경복궁의 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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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춘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궁녀와 내관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궁노들은 마루 밑을 파고들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백성들은 수양의 폭정에 하늘이 노한 것이라 수군거렸고 수양은 이를 애써 외면했다.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은 도읍을 감싸고도는 성곽에 동·서·남·북문을 두고 궁성에도 4대문을 두었다. 경복궁 그 동쪽 문이 건춘문이다.

"과인이 왕업을 이어 받아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건춘문에 벼락이 떨어졌으니 그 허물을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다. 근자에 역적도당을 죽이고 귀양 보낼 적에도 너그러운 법전을 따랐다. 소소하게 관련된 자들은 불문에 부쳤으나 잡아 가둔 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으니 형옥이 알맞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망과 탄식이 하늘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부와 육조 당상관들은 과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살펴 보필하라."

하늘의 운행을 살피는 곳이 서운관이다. 군주는 그들의 보고를 경청했다. 궐밖에 나가는 것도 그들의 조언을 존중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서다. 가뭄과 홍수, 벼락, 지진 등 기상이변이 발생나면 부덕의 소치로 받아들여 몸을 낮추었다. 즐기던 술과 고기를 멀리하고 사람을 보내 백악과 목멱 등 명산에 제를 올리기도 했다. 헌데, 수양은 아니었다.

심양 외곽에 있으며 사신교통로다.
▲ 사하포 심양 외곽에 있으며 사신교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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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李瑈)를 조선국 국왕으로 책봉해주어 고맙습니다'라는 임무를 띠고 명나라를 다녀오던 사은사 한확이 귀국하던 중 칠가령에서 병이 났다. 비상이 걸린 사신단은 한확을 객관이 있는 심양으로 옮기던 중 사하포에서 죽었다. 사위인 왕세자와 세자빈이 자신의 집을 찾아와 전송연을 베풀어줄 때만 해도 객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은사로 낙점되었을 때 한확이 수양에게 요청했다.

"첩보에 의하면 동팔참(東八站)에 군마를 가진 초적(草賊)들이 둔을 치고 있다 합니다. 약한 호송군 2백 명은 쓸모가 없으니 평안도의 갑사와 별시위에서 날쌔고 용감한 자 1백 명을 차출하여 주시고 총통군 4명에게 화포를 가지게 하여 무예가 있는 수령으로 하여금 호송케 하여 주옵소서."

압록강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길은 하루 종일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은 평원을 지나고 험준한 산을 넘어야 한다. 그 중에서 천산산맥(千山山脈) 요소요소에 박혀있는 천연 요새는 도적들 소굴로 악명 높았다. 조선의 특산물과 진귀한 조공품을 바리바리 싣고 가는 조선 사신단은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치안부재를 알고 있는 명나라 병부에서 요동에 있는 군사를 붙여주지만 그들과 한통속으로 털어가는 데는 당할 수가 없었다.

산 밑을 지날 때 산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죄를 지은 자는 천둥번개가 칠 때 가슴이 쫄아 들고 산 밑을 지날 때 바위가 구르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을까봐 단단히 준비하고 떠난 한확이 몸속의 적에 의해 불귀의 객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선 사신이 북경에 가기 위해 대궐을 떠날 때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임금이 직접 전송을 하는 경우도 있고 왕이 총애하는 대전 내관의 환송을 받는다. 돈의문을 나와 반송정에서 가족 친지들을 만날 때 한껏 고무된다. 수양의 외할아버지 심온은 여기에서 벌어진 너무 크고 화려한 환송연이 빌미가 되어 죽임을 당했다.

무악재 고개를 넘어 의주에 이를 때까지는 각 고을 수령들의 환송을 받으며 목에 힘을 줄 수 있다. 허나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산해관까지 참(站)이 있는 여덟 군데에서는 객관이나 여관에 들어 잠을 잘 수 있지만 그 외는 노숙해야 한다. 조선 땅에서 떵떵거리는 고관대작도 나라 나가면 개고생이다.

의주에서 요동 가는 길목에 있는 산
▲ 봉황산 의주에서 요동 가는 길목에 있는 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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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작은 게 한이다, 그 사람 잘못한 것 없다

비보를 받아든 군부인은 슬픔에 빠졌고 수양은 한명회를 의주에 급파하여 시신을 정중히 운구 하도록 했으나 백성들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벼락이 건춘문을 내리치더니만 한확을 잡아갔으니 그 다음은 누굴 잡아갈까?"
"그야, 한가 성 가진 놈 아니면 골골 한다는 쥐새끼겠지."

수양의 맏아들 도원군은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다.

"도적질한 왕위를 양위라고 읍소했다며?"
"도적질을 양위라고 하는 놈은 도적놈보다 더 날강도지."
"벼슬에 눈이 멀어 되놈들에게 누이를 팔아먹지를 않나, 도둑놈을 등에 업고 양심을 팔아먹지를 않나, 그런 파렴치한 놈은 잘 죽었다. 퉤."
"거, 그런 소리 마쇼. 나라가 작은 게 한이지 그 사람 잘못한 게 뭐가 있소?"
"명나라에서도 벼슬 받고 우리나라에서도 벼슬 받은 그놈이 결국 사대의 골을 깊게 했으니 매국노지 뭐유?"
"능력 있으면 할 수 있는 게지 뭐 그게 흠이유?"
"실력 있어 그렇게 했으면 나 말을 안 해, 누이 갖다 바쳐 그렇게 된 거 아니유?"

공녀로 바쳐진 한확의 누이가 황제의 여자가 되었다. 여자의 미모는 자산이라 했던가? 조선에서 바쳐진 여자였지만 출중한 미모가 황제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된 것이다. 이 때 명 태종 문황제가 한확에게 내려준 벼슬이 광록시소경이다.

"황제가 북경 들어와 벼슬하라는 것도 뿌리치고 조선에 있으면서 중국통으로 봉사한 것은 애국자지 뭐유?"
"애국자 좋아하시네. 중국에 간도 쓸개도 다 빼다 바친 게 애국이유?"
"대국 거슬러서 득 될 게 뭐가 있소? 그 사람이 그래도 북경 드나들면서 주물러놔서 요만큼이라도 태평한 거지. 되놈들에게 맞서보쇼. 벌써 귀싸대기 맞아도 허천나게 얻어터졌지."
"옛날에는 대륙과 당당히 맞서면서 살았잖수."
"호랑이 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네. 뒤통수 치는 놈들이 있는데 맞서면 뭐하우? 지만 깨지지. 자존? 자주? 다 부질없는 소리우. 나라가 작은데 어떡할꺼요?"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드린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뒤에 보이는 것이 의주 백마산성이다
▲ 위화도 뒤에 보이는 것이 의주 백마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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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패배에 찌들은 소심한 생각이오. 작아도 힘을 기르면 될 거 아니우?"
"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힘 기를 때 그놈들은 두 손 놓고 있다 합디까?"
"요행을 바라면 되지요."
"살다 보니까 곰 발바닥에 징 박는 소리 들어보겠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요행이 있수? 오로지 먹고 먹히는 힘뿐이우."
"우리가 힘을 기를 때 그들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으면 요동 땅을 찾아올 수 있는 거 아니요. 그러면 되놈들하고 한 번 붙어볼만 하지."

고려 말. 요동 정벌론이 그랬다. 대륙의 맹주를 자처하던 원나라가 몽골 구석으로 패주하고 그 뒤를 명나라가 뒤쫓을 때, 요동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 이성계를 장수로 내보내어 그가 패해도 나쁠 것이 없었던 최영과 사지에 들어가느냐? 마느냐? 압록강에서 고민하던 이성계가 군사를 돌렸다. 위화도 회군이다.

"꿈도 야무지요. 그들 집안싸움 나기를 바라기 전에 우리나 갈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수."
"맞는 말이요. 건초에도 대륙의 정세변동을 모르고 친원이다. 친명이다. 싸우다가 주원장한테 혼구멍이 난 일이 있잖수."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한 젊은 유학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대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친원정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의리파와 원나라는 스러져 가는 나라이니 떠오르는 새로운 맹주 명나라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친명파가 극렬하게 대립했다. 대세는 명나라였으나 원나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주춤거리는 사이 돌아온 것은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명나라의 외교 보복과 종계변무였다.

조선 사신들이 북경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두 손이 닳도록 빌어 조선 임금을 임금으로 취급하지 않는 권지국사는 철회되었지만 종계변무(宗系辨誣)는 아직도 시정되지 않고 조선을 압박하고 있다. 자신들이 잘못 기록한 내용을 조선 길들이는 외교 무기로 삼는 중국이다.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삼배고두례를 행하는 인조. 그는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청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려는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화(戰禍)를 불러왔다.
▲ 삼전도의 굴욕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삼배고두례를 행하는 인조. 그는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청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려는 광해군의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화(戰禍)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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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실수를 200년 이상 우려먹은 중국

명 태조 주원장을 기록한 명나라의 역사서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이것을 발견한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정정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자신들의 실수로 야기된 명백한 오류임에도 정정은커녕 그것을 조선 길들이는데 사용하다 청나라에 패망하기 48년 전, 즉 1588년 선조 대에 와서야 비로소 정정되었다. 실로 200년 이상을 우려먹은 것이다.

한반도의 위정자들은 대륙의 지각변동을 잘못 짚어 조국에 우환을 불러왔다. 원명 교체기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고 청명 교체기에는 힘없는 백성이 청나라 군대에 도륙되는 참화(慘禍)를 겪었으며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에 찧으며 항복하는 치욕을 당했다. 청공 교체기에도 그렇다.

중공(中共)이 대륙의 맹주로 떠올랐지만 반도의 반 위정자는 그들을 외면했다. 중공이 부상하자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마지못해 잡아 준 그들의 손은 따뜻하기는커녕 분단을 즐기는 차가운 손이었다. 중공이 굴기하자 그마져 놓치지 않으려고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그들에게 끌려갔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멀리하고 자유중국(대만)을 가까이 했던 시절 한국의 중국인은 대부분 대만계였다. 대만의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뚜렷하다.
▲ 인천화교소학교 중화인민공화국을 멀리하고 자유중국(대만)을 가까이 했던 시절 한국의 중국인은 대부분 대만계였다. 대만의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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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우."
"지금이라고 뭐 달라진 게 있수? 세종대왕이 암글을 만들어서 명나라의 심기를 거슬러 놨는데, 두고 보쇼. 이런 식으로 명나라에 기어오르다간 된통 한 번 당할꺼요. 200년 내에 그런 일이 없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소."
"당신이 200년이나 살수 있간?"
"흐 흐 흐."
"히 히 히."

한확의 죽음을 놓고 저잣거리에서는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다. '매국노다', '애국자다' 상반된 주장이 봇물을 이루었다. 그러나 뚜렷하게 선을 긋는 정답은 없었다. 시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을 만들 것이다.

군부인은 시름에 잠겼다.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는 슬픔만은 아니었다. 친정아버지 한확이 살아 있어야 자신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밀어 올릴 수 있는데 한쪽 날개가 꺾였으니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이 절망으로 다가왔다.


태그:#수양대군, #한확, #권지국사, #종계변무, #건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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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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