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그는 "나이에 얽매이는 것 자체가 싫다"며 37세부터 줄곧 '37세'라고 말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그는 "나이에 얽매이는 것 자체가 싫다"며 37세부터 줄곧 '37세'라고 말했다.
ⓒ 최경준

관련사진보기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세상을 뜬 뒤 이상봉씨에게는 '국민 디자이너'란 별칭이 붙었다.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얻게 된 건 한글 문양을 통해서다. 세계무대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의무감'으로 시작한 일이 그를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디자이너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글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이상봉씨는 "(한글 패션 디자이너라는) 책임감이 너무 무거워서 도망가고 싶은 적도 있었다"면서도 "비록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디자인을 하는 동안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6년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 출연하면서 젊은이들에게도 친숙한 디자이너가 됐다. 당시 <무한도전> 멤버들은 이씨가 디자인한 한글 옷을 입고 패션쇼를 열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씨도 이씨가 만든 옷을 입었다. 김씨는 2009년 10월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아이스쇼에서 한글이 새겨진 스케이팅복을 입고 은반 위를 수놓았다.

비욘세, 레이디 가가, 리한나 등 세계적인 스타들도 그의 옷을 입고 공식석상에 섰다. 휴대폰, 침구, 주방용품, 담배, 아파트 등에서도 그의 디자인을 볼 수 있다. 이상봉씨의 다음 행보는 탁구 국가대표 선수들의 유니폼이다.

그는 "우리 국가대표 유니폼을 일본에서 디자인해서 만들어 온다고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된다"며 "탁구 국가대표 유니폼을 디자인하기로 현정화 감독과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탁구이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간다고 한다.

미국 뉴욕 패션위크 기간에 열린 '컨셉코리아 FW12' 행사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이상봉씨를 지난 11일 맨해튼 챌시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요지이다.

"100년 뒤 우리 한글 사라진다고 했더니... '미친 소리'"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 최경준

관련사진보기


- 200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패션쇼에 한글 패션 바람을 몰고 왔다. 한글을 패션에 접목시키겠다는 생각을 한 계기는?
"우리나라에서만 패션쇼를 했다면 한글로 옷을 만들겠다는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또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해도 용기가 없어서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파리에서 하는 쇼였고, 약간의 사명감도 생기더라. '이제는 패션에 우리 문화적인 접목을 조금 해야 하는데, 뭘 할까'하고 고민하다가 한글을 떠올렸다. 그것이 의외의 반응을 얻어서 지금까지 하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용기 자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의무감이었으니까."

- 좀 씁쓸하다. 안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밖에서 인정받아야 '이게 우리 것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것 자체가 사대주의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그 수준은 넘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세계무대에 나가서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왜소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문화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100년 뒤에 우리 한글이 사라진다고 트위터에 올렸더니, 일부 사람들은 '미친 소리 한다'는 반응을 보이더라. 놀라고 반성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 한글을 디자인에 적용해 세계화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 문화와 접목되는 것을 외국에 가져갈 때는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같이 이해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중국에서 쇼를 할 때 옷에 한글과 한문을 같이 디자인했다. 러시아에서는 모델 중 한 사람에겐 푸시킨의 시가 쓰인 옷을 만들어 입히고, 다른 한 사람은 김소월의 사랑의 시를 쓴 옷을 입혔다. 그랬더니 함께 행사를 준비했던 러시아의 한 유명 화가가 거의 감격의 눈물을 흘리더라. 푸시킨의 시를 보면서 감동을 받게 되면 옆에 있는 김소월의 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는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소통은 그들에게 반감만 줄 수 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 최경준

관련사진보기

- '한글 패션 디자이너'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붙는다. 한글 외에 다른 디자인적 모드가 결여됐다는 지적이 있던데.
"실제 한글을 디자인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것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한글 이외에 다른 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지만,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는 더욱 책임감이 생겼다. 그 책임감이 너무 무거워 도망가고 싶은 적도 있었다. 혹자는 '당신 발목 잡혔어. 한국적인 것이 세계무대에서 되레 짐이 될 거야'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런 게 신경이 쓰인다. 시간도 많이 빼앗긴다. 내 작업의 절반 이상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내가 받는 사랑을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응원한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은 이 일을 계속 하는 것이다. 비록 내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디자인을 하는 동안 계속 해야 할 일이다. 저를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벌써 기존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그래서 한국 것은 촌스러워'라고 비아냥댄다. 한국적인 것을 하겠다는 것은 외국 것을 따라한 것보다 역사가 짧다. 외국 디자인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믿고 응원하고 격려해줘야 한다."

- 좋은 옷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입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케팅은 잘 못한다고 하던데.
"처음에 파리에서 전시할 때는 잘 팔았다. 그런데 쇼를 하면서는 바뀌었다. (내 옷을) 외국에 알리는 게 시급했다. 한국의 디자인 자체가 외국에서 인정받을 때가 아니었다. 잡지에 실리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지 않는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옷이 평범하면 잡지에 구찌나 유명한 옷을 싣지, 내 옷을 실을 이유가 없지 않나. 그래서 조금 더 조각적이고, 더 (개성이) 강조되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옷을 팔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2년 전 뉴욕에 와서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싶었다. 세계 경제가 악화되면서 뉴욕 디자이너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유럽의 창조적인 디자인보다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뉴욕의 디자인이 더 부각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예전에 뉴욕은 단순히 패션이 소비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파리랑 견줄 수 있는 곳이 밀라노가 아니라 뉴욕이 됐다. 그만큼 뉴욕이 세계 중심이기도 하지만 패션의 중요성을 인정받을 만한 곳으로 성장한 것이다."

"노스페이스·몽클레어 논란, 한국 브랜드 없어서"

- 그러나 여전히 한국 디자이너들의 옷은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잘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작품이 많은 것 같은데.
"패션은 선진국의 문화다. 못 사는 사람들에게…. 지난해 11월 아프리카에 봉사를 다녀왔는데, 그곳에는 패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천 쪼가리 하나가 너무 소중해서 내가 반성을 많이 하고 왔다. 안방에서 화장실을 같이 쓰는데 문이 없기에 커튼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천을 사오려고 했지만, 천 쪼가리 하나 구하기가 힘들더라. 우리는 남아서 쓰레기로 버리는데 말이다.

패션은 선진국의 예술이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그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심리가 있다. 패션은 옷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생산되어지는 것의 파장이 엄청나게 크다. 백화점 자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 자체가 패션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그것에 대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못 사는 곳에서는 의자를 디자인할 필요가 없다. 박스만 놓고 앉으면 의자가 되는 것 아닌가. 돈이 있고 여유가 생겨야 나에게 맞는 디자인, 아름다움, 실용성 등을 따지게 된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 최경준

관련사진보기

- '패션은 선진국의 예술'이라고 했는데, 실제 패션쇼는 돈 많은 상류층 등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쇼라는 인식이 강하다. 누구나 함께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패션쇼는 불가능한 것인가?
"가장 폐쇄된 사회가 패션이다. 앉아있는 좌석까지도 철저하게 선별되어 있다. 패션쇼의 가장 앞자리인 프론트로는 가장 폐쇄적인 최고의 자리다. 특별한 연예인, 기자, 바이어 등이 앉고, 능력에 따라 좀 더 위쪽으로 올라온다. 일반 사람들은 들어올 수도 없다.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고, 앞서서 보여지는 예술인데다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 폐쇄적으로 된 게 아닌가싶다."

- 부잣집 사모님이 아닌 평범한 우리 어머니, 누이들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 생각은 없나?
"지금은 양대 산맥이라고 한다. 자라, 유니클로 등 대량 생산을 해서 싸게 파는 스파 브랜드와 가장 사치스러운 디자이너 브랜드로 나뉜다. 그런데 이제는 디자이너 브랜드 쪽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과도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디자이너 브랜드도 세컨 브랜드를 시도하든가, 아니면 스파 브랜드와 손을 잡고 지원하는 식으로 가고 있다. 필요에 의해서 서로 손을 잡는 것이다.

나도 세컨 브랜드에 대해 고민 중이다. 어떻게 하면 내 옷을 가지고 더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의 감성을 같이 공유할 수 있을까. 외국 디자이너들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워낙 패션업계가 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선뜻 용기가 나지 않고 있지만, 나에게 주어진 오랜 숙제다."

- 패션 디자이너로서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노스페이스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이들이 (힘없는 친구들에게) 노스페이스를 사오라고 시킨다는 기사를 읽었다.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한 열풍과 같은 하나의 현상이라고 본다. 그것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는다. 얼마 전에 (이명박 대통령의 손녀가) 몽클레어를 입어서 난리가 났듯이. 다른 면에서 보자면, 그들을 만족시킬 만한 한국 브랜드가 없어서 그런 현상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 마케팅이 됐든 인지도가 됐든, 한국에서도 그만한 브랜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치의 기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꼭 비싼 것이 기준은 아닌데, 그것 자체를 어떻게 본인이 받아들여야 하느냐를 우리가 젊은 학생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살아오면서 실패를 맛본 적이 있었나?
"실패가 없이 어떻게 사람이 성장할 수 있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를 떠나서 한 단계 위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이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제 자신도 세컨 브랜드를 하려다가 몇 번의 실패를 했었다. 그것 때문에 빚 갚는다고 몇 년 동안 상당히 허우적거렸다. 지금도 그런 경제적인 부담은 적지 않다. 개인적인 발전과 상품 수출을 위해서 해외에 나오면 그만큼 경비를 지출하기 때문에 힘든 것도 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휴가를 못 갔다.

그런 것을 보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겠다면서 나를 보고 '일 중독'이라 그런다. 그러나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해외 진출을 포기해야 한다. 개인이 해외 진출해서 성공하는 것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제 와서 지금까지 내가 쌓아놓은 것을 포기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시원한 헤어스타일과 굵은 뿔테 안경, 짙은 수염은 오래전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시원한 헤어스타일과 굵은 뿔테 안경, 짙은 수염은 오래전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 최경준

관련사진보기


- 실패에 대한 두려움, 창작에 대한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예전에는 모든 것을 혼자 고민하거나 소수의 사람과만 소통했지만, 지금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오늘도 뉴욕의 한 식당에서 홍보일을 한다는 분께서 나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의 페이스북 쪽지를 보냈더라. 그런 식으로 소통하고 있고, 그런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용기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살 수는 없는 것 같다. 특히 디자인 세계에서는 시대와 공유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 휴대폰, 침구, 주방용품, 담배, 아파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콜래보레이션(유명 디자이너나 작가의 작품을 다양한 상품에 적용하는 것)'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제 패션에만 멈추지 않고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해야 한다. 원래 처음 시도했던 것은 1993년이었다. 당시 '이상봉 아트컬렉션'이라는 세컨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때는 의자나 거울도 디자인하고, 운동선수들 옷도 만들었다. 자금 문제 등으로 2년 만에 접었지만 지금도 아쉽다. 여전히 그런 것을 하는 게 꿈이고, 그때 그 일을 해 본 게 많은 도움이 됐다."

-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무한도전> 출연이었다. 피겨스케이트 김연아 선수의 의상도 디자인했고, 최근에는 집배원의 근무복을 디자인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탁구 국가대표 유니폼을 디자인하기로 현정화 감독과 얘기를 했다. 우리 국가대표 유니폼을 일본에서 디자인해서 만들어 온다고 하더라. 그것은 말도 안 된다.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운동이 탁구인데.(웃음) 만일 상업적인 옷이라면 어디서 만들든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렇지만 국가대표 옷은 다르다. 한국 기업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본 기업에서 스폰을 하다 보니까 일본 디자이너가 만드는 것이다. 만약 현 감독이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은 계속 일본인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서 뛰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정화 감독에게 너무 고맙다고 했다."


태그:#이상봉, #패션디자이너, #무한도전, #김연아, #노스페이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