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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버스 앞의 하반영 화백. 마이산을 주제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캔버스 앞의 하반영 화백. 마이산을 주제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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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꾸준히 창작에 몰두하는 노(老) 화백을 찾았다. 주인공은 전북 군산시 영화동에 거주하는 원로 서양화가 하반영(96) 화백. 기자가 아틀리에를 방문한 무진년 정월대보름(6일)에도 화필을 쥔 그의 손은 캔버스 위를 여행하고 있었다.

한쪽 눈의 시력이 약해지고 거동이 조금 불편해서 그렇지 그림 작업에는 지장이 없단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가벼운 산책과 아침 식사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캔버스 앞에서 보낸다니, 그의 예술에 대한 집념과 열정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어렸을 적부터 꼭 하고 싶었던 그림을 지금까지 그리고 있거든. 그런데 이가 아파서 3개월 전부터 치과에 다니는 바람에 그림 그리는 시간이 줄었어. 그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화가)을 걷고 있으니 조물주에게 감사할 일이지."

"창작에 정신을 쏟으면 세상의 모든 걱정·근심이 사라진다"는 하 화백은 "30분 정도의 낮잠은 건강을 지켜주기도 하고,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몸이 피곤하면 그림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일곱 살 때 서당에서 서예와 수묵화를 배우며 시작한 화폭인생. 올해 아흔여섯이니 그림 나이도 이제 미수(米壽)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하 화백의 화폭인생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아직 미완성이라며 겸손하게 말한다. 치과에 가는 시간조차 아깝단다.

 달력을 들여다보며 만날 약속날짜를 확인하는 하반영 화백.
 달력을 들여다보며 만날 약속날짜를 확인하는 하반영 화백.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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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화백 아틀리에 방문은 작년(2011) 10월에 이어 두 번째. 음력 정월(正月)은 친척과 이웃어른들께 인사하는 달이어서 세배를 하러 갔다. 하 화백이 금방 알아보고 자리를 권하기에 큰절을 올리니 덕담에 조롱박이 그려진 소품을 얹어주었다. 조롱박은 복(福)을 상징한단다. 하 화백은 해마다 오던 박 장수가 올 정월에는 안 왔다며 챙기기도 했다.

하 화백은 소문대로 살아 움직이는 근대박물관이었고, 20대 못잖은 총명한 기운과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다. 70~8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어울렸던 친구들, 그리고 수개월 전에 했던 약속과 명함을 몇 장 받았던 것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경탄을 금치 못했다.

'하반영' 화백의 본명은 '김구풍'

하반영 화백은 1917년(丁巳) 경상북도 금릉군(지금의 김천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군산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다섯 살 때 조선철도국 잡역부로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북 옥구군 산북리(지금의 군산시 산북동)로 이사한다. 그래서 태어난 고향에 대해 추억은커녕 희미한 기억조차 없단다.

  하반영이 다녔던 군산의 신풍초등학교 전경. 1960년대 모습.
 하반영이 다녔던 군산의 신풍초등학교 전경. 1960년대 모습.
ⓒ <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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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화백의 학력은 코흘리개 시절에 다녔던 서당과 일제가 설립(1925년)한 4년제 군산 신풍보통학교(신풍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그러나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수상 경력과 100회가 넘는 국내외 전시회 출품 등 그의 발자취는 A4용지 한 면을 가득 메우고도 부족하다.

13세 때 금릉 김영창 선생 권유로 조선총독부미술전람회(선전)에 정물화 <나팔꽃>을 익명으로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은 하반영. 그러나 화가가 되는 것을 부모가 완강히 반대하자 가출, 스스로 고아의 길을 택했다. 선전 최고상의 영예는 완성도 높은 그림을 찾아 떠도는 보헤미안의 첫걸음일 뿐이었다.

소년 하반영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머슴살이도 마다치 않았다.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조선과 만주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고달픈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은 행복했다. 그때까지 이름은 '김구풍'. 그러나 집에서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하반영'으로 바꿨다. 

하반영으로의 개명(改名)은 "그림으로 '환쟁이'가 되려는 너는 네 자식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길을 반대하는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서당 훈장도 재능을 인정했고, 보통학교 교장(도게 모이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미술교사(이노우에 사이키)는 일본으로 데려가려 했다고 한다.

 그림처럼 예쁘게 그린 한자, 한글 팻말. 아틀리에 입구에 걸려 있다.
 그림처럼 예쁘게 그린 한자, 한글 팻말. 아틀리에 입구에 걸려 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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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화백은 "붓질을 하며 완성하기까지가 내 그림이지, 낙관을 쓰고 나면 내 것이 아니다"라며 초기에서 마흔 살까지는 영어로 'banyong'을 썼고, 쉰 살부터는 한글로 '반영'을, 예순이 되면서 한자 정자체 '影(영)'을 사용하다가 최근 작품에는 '影'을 흘림체로 남긴다고 했다.

하반영(河畔影)은 '냇가의 논 반 마지기에 어룽거리는 그림자'라는 뜻이란다. 아버지가 만석꾼 부자임에도 집을 뛰쳐나와 가난한 화가의 길을 걷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겠다 싶어 그렇게 지었다고 말하는 노화백의 표정에서 순탄치 않았던 삶의 고뇌가 엿보이기도. 

군산과 만주에서 보낸 고달팠던 청소년 시절

 담담한 표정으로 고달팠던 청년 시절을 회고하는 하반영 화백.
 담담한 표정으로 고달팠던 청년 시절을 회고하는 하반영 화백.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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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에서 최고상을 받은 소년 하반영은 도화지를 살 돈이 없어 길바닥에 나뒹구는 종이와 담뱃갑을 주워 그림을 그렸다. 한과 서러움이 담긴 그림 그리기를 1년여, 돈을 벌기 위해 군산부(府) 6조통(명산동)에 자리한 완구 도매상 점원으로 들어간다.

밥만 먹여줘도 감사하게 생각하던 시절, 열심히 일해서 주인이 주는 용돈으로 도화지와 물감을 샀다. 2년 남짓 완구점에 있으면서 군산 시내는 물론 이리(익산) 김제, 부안까지 완구를 배달하러 다녔다. 그 덕에 자전거는 원도 한도 없이 타봤다고 한다.

극장에 새로운 굿(영화·연극)이 들어오면 삐라(광고지)를 뿌리거나, 프로그램 깃발이 나부끼는 홍보용 깃대를 들고 시내를 도는 일명 '양치기'(알바)도 했다. 삐라를 뿌리면 10전(錢), 깃대를 들고 오전·오후 하루에 두 차례 돌면 10전을 받았다. 당시 국밥 한 그릇에 5전이었다고.

쌀 수탈에 눈이 뒤집힌 일제의 감시 아래 군산항 부두에서 노동자 생활도 했다. 쌀 네 통(4말)짜리 스무 가마를 나르면 1전짜리 '맘보'(딱지) 20개를 받았다. 맘보를 돈놀이하는 사람(환전상)에게 바꾸면 1할을 뗀 18전을 손에 쥐는데 막걸리와 밥을 사먹고 그림 도구도 구입했다.

 1940년 9월 평양 능라도에서 바라본 대동강 모습. 하반영 화백이 촬영한 사진으로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경의선 철교, 황포돛배 등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1940년 9월 평양 능라도에서 바라본 대동강 모습. 하반영 화백이 촬영한 사진으로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경의선 철교, 황포돛배 등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 하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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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를 군산에서 힘겹게 보낸 하반영은 열아홉 살 때 평양을 거쳐 만주로 건너간다. 꽁꽁 언 압록강·두만강을 넘나들며 뭔가도 모르고 전주에서 만주까지 독립군 군자금 심부름도 했단다. 만주에서 보드카 만드는 양조장에서 일할 때도 무척 고생했으나 그림 그리는 시간은 행복했다고.

스물일곱 살 때 헌병에게 잡혀 만주 흑룡강성(헤이룽장성) '치치알' 부근 일본군 부대로 끌려가 황군으로 복무하면서 친구(전상록) 소개로 박정희 소위를 만난다. 처음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키는 걸 보면서 미워하게 되었단다.

영화에도 출연 "주연급 배우보다 그림 그리는 게 더 좋아"

 1954년 제작된 영화 <피아골> 촬영 모습
 1954년 제작된 영화 <피아골> 촬영 모습
ⓒ 이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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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영 화백은 함경도가 고향인 신상옥 감독(1926~2006)과 이강천 감독(1920∼1993)이 군산에 거주할 때 함께 극장 포스터를 그렸다. 이 감독은 원래 화가였는데, 절친하게 지내면서 애틋한 추억을 많이 남겼으며 훗날 그의 영화에도 출연하게 된다.

"내 단골 배역은 엿장수와 빨치산이었지. 엿장수 가위질 배우느라 무척 고생했어. 영화 <피아골>에서 여자(노경희)하고 놀아난다고 아가리(이예춘)에 총 맞아 죽는 빨치산으로 출연했지. 지리산에서 촬영했는데, 이승만 박사가 '왜 경찰만 많이 죽느냐?', '인공기만 나오고 태극기는 왜 안 나오느냐?'라고 트집을 잡아서 늦게 개봉했지."

하 화백은 "이강천 감독이 나더러 주연으로 출연해보라고 권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좋았고, 성숙한 화가가 되는 게 꿈이어서 사양했다"며 "영화 <산색시> <밤을 통곡한다> <아름다운 악녀> <서울 이야기>와 '계몽 및 홍보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다"며 옛날을 회상했다.

1944년 개교한 '전주여자상업고등학교'(지금의 전주영상미디어고)에 미술교사로 잠시 몸을 담기도 했다. 미술교사 재직시절 그는 아이들과 순수함을 교감했고, 자연으로부터 평화를 배웠다. 인간의 원초적 그리움인 정, 그리고 학생들의 화폭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자연을 보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한국전쟁(1950~1953)이 터지자 하 화백은 부산에 1년 남짓 거주하면서 극장 간판을 그렸다. 하루는 국제시장 근처에 나갔다가 소(牛)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1916~1956)을 만나 대폿집과 국숫집을 드나들며 전시하의 고달픔을 막걸리로 달랬다.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러 군산으로 돌아온 하반영은 운보 김기창(1913~2001) 화백과 미군비행장 PX 근처에서 미군들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계를 꾸려나갔다. 운보 처가(妻家)가 군산이었던 것. 미군들은 유화로 그린 하 화백 초상화보다 동양화 기법으로 그린 운보 작품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저 그림 속 어부(漁夫)는 참 못난 사람이야!"

 5년 전 전시회에서 만난 하반영 화백(좌)과 고은 시인(우)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군산출신 예술계 선후배 사이
 5년 전 전시회에서 만난 하반영 화백(좌)과 고은 시인(우)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군산출신 예술계 선후배 사이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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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예술가', '동양의 피카소' 등으로 불리는 하반영 화백은 서예, 한국화, 구상화, 풍경화, 인물화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후배와 젊은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작품을 통해 불우이웃 돕기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하반영미술상'을 제정(1994년), 가난한 후배 화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대화를 잠시 멈추고 차를 마시며 화실을 둘러보다가 '노을이 지는 바다'와 '들녘'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하 화백은 하나는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이고 하나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 모두 들어 있다고 설명하며 무질서하게 돌아가는 세태를 살며시 꼬집었다.

"5년 전에 그렸는데, 풍경이 아니고 자화상(自畵像)이야. 내 머릿속에 있는 꿈이고, 사상(思想)이라고 할 수 있지. 눈도 안 보이고, 가족도 없고, 그저 나 혼자 외롭게 태양을 향해 가는 거야. 어두워져 가는 바다에서 갈매기가 어부를 인도하고 있지···. (한참 후) 저 어부는 누군지 모르지만, 못난 사람이야. 고기도 낚지 못하고 가기만 하니까 참 못난 사람이지!

요즈음은 자꾸 서양 것을 쫓아가는 추세인데 왜 그러는지 몰라, 우리 측에서 보면 서양이 새롭지만, 서양에서 보면 동양 것이 새로운 거거든, 예술을 해도 서양 것은 인정하되, 우리의 전통문화에 뿌리를 둬야 생명력이 살아나지. 그래서 재질은 물감으로 하되, 그 바탕엔 동양적 사상과 사고의 가치가 용솟음치는 소재들을 형상화해서 보여줘야 하지···."

 자신의 자화상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하반영 화백.
 자신의 자화상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하반영 화백.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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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조선 각지와 만주를 떠돌면서 이름을 바꾸고, 프랑스 유학시절(1979~1985) 함께 했던 한국인 예술가들까지 하 화백의 무수한 이야기 속에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고, 고향을 향한 사랑이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고, 안타까운 사회가 있고, 예술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하 화백은 진즉 돌아가셨을 부모가 보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 "지금은 성묘도 하고 제사도 지낸다"며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요, 그리움은 세월이 갈수록 가슴에 쌓인다고 했다. 아무리 화가의 길을 막고 반대했다 해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하반영 화백의 건강 비결은 하루 세 끼 모두 챙겨먹는 소식(小食). 그리고 단 1분의 시간도 아까워하며 그림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란다. 그가 그토록 창작에 정신을 쏟는 이유는 화폭 속에서 그 옛날 부모도 만나고, 형제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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