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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편전
▲ 사정전 경복궁 편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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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의금부 도제조 윤암과 제조 윤사로, 강맹경, 이인손, 신숙주, 성봉조, 박중손, 어효첨이 결안(結案)을 가지고 편전에 입시했다. 어젯밤 광풍이 언제 그랬냐 는 듯 사정전 앞마당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성삼문, 이개, 하위지, 박중림, 김문기, 성승, 유응부, 윤영손, 권자신, 박쟁, 송석동, 이휘, 상왕의 유모 봉보부인의 여종 아가지, 권자신의 어미 집 여종 불덕, 별감 석을중이 끌려나왔다.

"박팽년·허조·유성원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이개·하위지·성승·유응부·권자신과 함께 당파를 맺고 박중림·김문기·박쟁·송석동·윤영손·아가지·불덕과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초하룻날 거사하려 하였으니 그 죄는 능지처사에 해당합니다.

성삼문은 중시에 장원한 후 교만해져 스스로 남보다 월등하다 생각했으나 오래도록 제학과 참의에 머물러 있어 불만이 많았습니다. 삼문에게 '상왕도 아는가?'라고 물으니 '권자신을 시켜 통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비 성승은 의주 목사로 있을 때 사람을 죽여 관직이 떨어지고 고신과 과전을 몰수당했으나 안평이 계청하여 환급해 주었으므로 이용 사람입니다.

박팽년은 사위 영풍군의 연고로 화가 미칠까 항상 두려워하였고, 하위지는 주상에게 견책을 받은 것을 원한으로 품었으며, 이개와 유성원은 품계 낮은 자급에 불평불만이 많았습니다. 김문기는 도진무로 있을 때 그의 족친 박팽년과 성삼문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성균관 사예로 있던 유성원은 성삼문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자결하고 허조 또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이들의 죄상이 이와 같으니 이미 죽은 자도 시체를 거열하고 목을 베어 효수할 것이며 목을 팔도에 전하여 본보기를 보이도록 하소서. 또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피를 부르는 소리다.

'살인면허'가 떨어지다

군기감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표지석. 세조12년 군기시로 개칭되었다.
▲ 군기시 터 군기감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표지석. 세조12년 군기시로 개칭되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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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식들은 모조리 교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조손·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극변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라. 백부·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노비로 소속시키되 아가지와 불덕은 연좌시키지 말라. 백관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군기감에 나아가 역도들이 처형되는 모습을 볼 것이며 죄인들의 목은 3일 동안 저자에 효수하라."

명이 떨어졌다.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살인면허다. 의금부 나장들의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동서남북으로 뛰고 성 밖으로 뛰었다. 조옥(詔獄)에 갇혀있는 혐의자들은 언제라도 끌어내어 처형하면 된다. 하지만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는 족친은 정보가 새나가기 전에 급습하여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한다.

성삼문 집에 도착한 나졸들이 맹첨, 맹년, 맹종과 갓난아기 등 네 아들을 모두 교형에 처하고 여자들은 끌고 갔다. 또 다른 패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집으로 쳐들어가 삼고, 삼빙, 삼성 등 성삼문의 아우 세 명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박팽년의 집을 기습한 나장은 그의 아들 헌, 순, 분, 파, 녹대, 개동, 흔산, 그리고 올해 태어난 아들 등 여덟 사람을 요절내고 그의 아버지 박중림의 아들 대년, 기년, 영년, 인년 등 박팽년의 아우를 모조리 목 졸라 죽였다. 성삼문과 박팽년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 셈이다. 하지만 기적은 있었다. 갓난아기를 가진 종들의 희생어린 기지가 작동한 것이다.

북촌에 있는 한옥
▲ 서울 북촌에 있는 한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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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은 계속되었다. 이개의 아들 공회, 유응부의 아들 사수, 하위지의 아들 연과 반, 유성원의 아들 귀련과 송련, 권자신의 아들 구지, 허조의 아들 연령, 김문기의 아들 현석이 교형에 처해졌고 송석동의 아들 창, 녕, 안, 태산 등 4형제와 김감의 아들 한지와 선지, 이지영의 아들 사이, 박정의 아들 숭문, 이유기의 아들 은산, 심신의 아들 올미, 봉여해의 아들 유, 이오의 아들 철, 장귀남의 아들 충, 조청로의 아들 영서, 이호의 아들 성손이 죽임을 당했다.

이 밖에도 상왕의 외할머니 화산부원군 부인 최씨와 권서, 권저, 이말생, 최사우, 이휘, 김구지, 이정상, 최치지, 정관, 심상좌, 황선보가 교형에 처해졌고 주인을 잘 못 만난 종 계남, 무손, 금, 구령, 즉동, 득지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김질의 고변으로 불거진 복위사건으로 8백여 명이 희생되었다.

줄초상 당한 북촌, 관운 펴지기는 커녕 빛 좋은 개살구더라

북촌(北村). 왕족은 물론 정승판서와 당상관 이상 사대부들이 선호하는 주거 밀집지역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어 대궐에 드나들기 편리할 뿐만 아니라 관운이 열린다는 속설이 있는 동네다. 하지만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았다는 일단의 술사들은 '그 얘기는 기(氣)가 센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기(氣)가 약한 사람은 기(氣)에 치어 기(氣)가 죽는 흉골(凶谷)'이라고 혹평하는 두 얼굴의 동네다.

아니나 다를까. 한집 건너 한집에 초상이 났고 한 골목은 줄줄이 곡소리가 이어졌다. 기(氣)가 센 터를 피해 돈의문 밖으로 나간 김종서도 죽었으니 터와 죽음은 별 관계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죄인을 싣고 가던 수레
▲ 함거 죄인을 싣고 가던 수레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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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아차산에 걸렸다. 어제의 태양인 것 같지만 분명 오늘의 태양이다. 조옥(詔獄)이 열렸다. 옥문이 열린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악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한 사람씩 나왔다. 형장으로 가기 위해서다. 만신창이가 된 성삼문이 나졸들의 부축을 받으며 함거에 올랐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擊鼓催人命)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回頭日欲斜)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하나 없으니         (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今夜宿誰家)

수레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중사이에서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뛰어나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성삼문이 나장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마지막 가는 사람 소원이니 수레를 잠시만 멈춰주시오."

함거가 멈췄다. 풀린 동공을 가다듬으며 성삼문이 겨우 입을 열었다.

"사내자식은 다 죽을 것이지만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

살 사이로 손을 뻗어 딸아이의 손을 잡았다. 고사리 손가락이 손안에 쏘옥 들어왔다. 언제 잡아 봤는지 기억이 없는 손이다. 평소 다정하게 잡아주지 못했던 아비의 회한이 가슴을 할퀴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를 두고 간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딸아이를 데리고 나온 종이 흐느끼며 술을 올렸다. 몸을 굽혀 목을 축인 성삼문이 다시 한 수 읊었다.

임이 주신 밥 먹고 임이 내린 옷 입어(食人之食衣人衣)
일평생 한 마음 어길 줄 있었으랴     (所一平生莫有違)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一死固知忠義在)
현릉 송백 꿈속에 아른아른 하여라   (顯陵松柏夢依依)

현릉은 단종의 아버지 문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단종의 아버지 조선 제5대왕 문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소나무가 유난히 돋보인다
▲ 현릉 단종의 아버지 조선 제5대왕 문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소나무가 유난히 돋보인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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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가 끌려나왔다. 산발한 머리를 들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이개가 묵묵히 함거에 오르며 시를 한 수 읊었다.

우(禹)의 구정처럼 삶이 중할 경우 삶 또한 중요하거니와(禹鼎重時生亦大)
죽음도 새털처럼 가벼이 봐야 할 때 죽음 또한 영화로세 (鴻毛輕處死有榮)
두 임을 생각하다가 문득 성문 밖을 나가노니               (明發不寐出門去)
현릉(顯陵)의 솔빛이 꿈속에도 푸르러라                      (顯陵松柏夢中靑)

유응부가 함거에 올랐다. 살가죽이 벗겨지는 악형을 당했지만 무골답게 당당하다. 임금의 얼굴을 용안이라 한다. 신하가 용안을 응시하는 것조차 불경이다. 허나, 유응부는 수양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뭐긴 뭐냐?" "내가 틀린 말 했나?"라고 맞받아치던 강골이다.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랴 닐러 무슴 하리오

무인답지 않게 시재(詩才)도 번득인다. 유응부가 함거에 오른 후, 마지막 수레가 도착했다. 헌데, 오르는 자가 없다. 잠시 후, 형졸들이 거적자리에 둘둘 말린 물체를 실어 올렸다. 시신이었다. 악형에서 깨어나지 못한 박팽년이 죽었던 것이다. 옥사(獄死)다.

의금부를 빠져 나온 함거가 광통교를 건너 군기감 앞에 도착했다. 남별궁 앞으로 야트막하게 펼쳐진 공터에 문무백관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애잔한 눈빛으로 성삼문을 바라보았다. 함거에서 내린 성삼문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세를 이룩하라. 성삼문은 흙으로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뵈올 것이다."

KBS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단종의 매형 영양위 정종으로 분했던 이민우가 거열형을 당하는 장면
▲ 거열형 KBS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단종의 매형 영양위 정종으로 분했던 이민우가 거열형을 당하는 장면
ⓒ KBS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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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졸들이 달라붙어 성삼문의 손과 발 그리고 목을 묶어 달구지에 걸었다. 무심한 황소는 큰 눈을 껌벅거리며 고삐 잡은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보 앞으로."

도사의 구령에 따라 다섯 방향으로 퍼져있던 형졸들이 달구지를 움직였다. 묶여 있던 성삼문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백성들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섭고 두려웠다. '휴'하고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오보 앞으로."

형졸들이 움직였다. 고삐 잡힌 소들도 덩달아 움직였다. 그 순간,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성삼문의 몸이 다섯 조각으로 찢어졌다. 참혹한 형벌이다.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어 유응부의 거열형이 집행되었고 이미 숨이 끊어진 박팽년의 시신도 다섯 조각으로 찢겨졌다. 뒤이어 9명이 더 거열형에 처해졌고 이들의 목은 숭례문 밖에 효수(梟首)되었다. 그것도 구경이라고 지나는 행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민초들의 공허한 외침, 숭례문에 울리다

성삼문을 비롯한 상왕복위 실패자들의 목이 효수되었던 곳이다
▲ 숭례문 성삼문을 비롯한 상왕복위 실패자들의 목이 효수되었던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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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었다. 퉤."
"충신들이 죽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욕하면 예의가 아니지유."
"충신들인지 등신들인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내가 뭐 틀린 말 했수?"
"그러면 벌 받아유."

"아, 그 머시냐, 잔칫날 칼을 뺏으면 죄다 아작을 냈을 텐데 무슨 놈의 만전은? 만전 찾느라고 그 기회를 놓쳐버렸으니 등신들 아니고 뭐란 말이요? 내, 그 생각만 하면 열불 뻗쳐 못살겠다니깐요."
"재수 없으면 잡혀가서 경쳐요."

"어휴, 울고 싶은 놈 뺨 때린다고 차라리 잡혀가서 몇 대 맞았음 좋겠수. 실컷 울기나 하게."
"울지도 못하게 목을 쳐버리면?"
"에끼 여보슈, 재섭는 소리 그만 하시오."
"히히히."
"흐흐흐."

이때였다. 벙거지에 육모방망이를 찬 포졸 두 명이 먼발치에 나타났다. 효수된 머리를 보며 낄낄거리던 사람들이 물 빠진 갯벌에 나와 있던 게들이 망둥이 뛰는 소리에 놀라 게구멍으로 숨어들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헌데 가까이 오던 포졸들이 군중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되돌아갔다.

"아니, 저치들은 왜 오다가 되돌아 가는겨?"
"산발한 머리통이 무서운가부지."
"이 사람들아 그것도 모르는가. 포졸들이나 의금부 나졸들은 얼씬거리지 말라는 한방의 지침이 포청애 내려왔다 하더라구."
"그전에는 성벽을 쌓고 사람들을 감시하던데 이번에는 왜?"
"왜는 왜야, 이만큼이라도 숨통을 터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폭발할까봐 그렇지."

"역시 그자는 천하의 머리꾼이야."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지 그자가 영웅을 만드는지 모르겠어."
"건 그렇고 뒈질 놈들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 원한을 어찌 할꼬?"
"그러게 말이요. 저승사자는 뭐하고 있나? 잡아갈 놈들을 잡아가지 않고."
"저승사자가 바빠서 못 온다 합디다."
"크크크."

공허한 웃음이 숭례문에 메아리쳤다.

"바빠서 못 오면 다음에 그놈들 후손이라도 잡아가겠지..."
"쥐새끼는 명이 짧아 보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을 팔자라 하던데..."
"새끼에 새끼 있잖수?"
"그 새끼는 문여리 라는 소문도 못 들어 봤수?"

"칠삭둥이는?"
"그 놈은 명줄이 고래심줄처럼 질겨서 제명대로 산다나 뭐한다나..."
"뼈다귀가 파헤쳐질 사주라던데..."
"말들 조심하시우, 쥐도 새도 모르게 채가니까."
"잡혀가면 죽기보담 더 하겠수."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애꿎은 새끼들 죽어나가니까 그렇지..."

엄혹한 시대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민초들의 공허로운 외침이 숭례문을 울렸다.


태그:#수양대군, #사육신, #성삼문, #거열, #군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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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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