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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화여고 교무주임 시절의 이만규(1929)
 배화여고 교무주임 시절의 이만규(1929)

이만규(1889~1978)는 일제시대에 3·1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년 7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민족을 배반하던 무리들과 달리 민족적 양심을 고수하면서 35년간을 민족교육에 헌신한 교육자였고, <조선교육사> 저술 작업을 하였으며, 민족어를 연구한 민족주의 교육사상가이자 민족해방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글이 <오마이뉴스>에 올라왔다. 이길상 교수는 조선어학회 핵심 이만규, 사실은 친일파였다(2012.2.4)라는 글에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초반의 이만규의 활동에서 아주 강한 친일의 흔적이 엿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이 교수가 작성한 글에서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 필자는 이 교수가 이만규를 친일파로 주장하는 내용을 10가지로 요약하고, 이것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있음을 하나하나 지적하려고 한다.

'국어' '내지'라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첫째로, 1936년 1월 일제가 발표한 초등교육확충 10년 계획에 대해 이 교수는 이만규가 이를 지지하고 있고,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을 '내지'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만규에게 국가는 '일본'이었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만규는 일제의 교육계획으로는 조선에서 완전한 의무교육이 실시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조선의 미취학 1백만 아동을 위한 대책이 없기에, 완전한 의무교육을 위한 대안으로 서당을 개량하고 강습소를 늘려 단기(短期) 과정으로 교육을 이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만규의 요구를 일제는 들어주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는 국어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이만규가 일본어를 국어라고 했다고 해서 친일의 흔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조선어를 말살하고 일본어만을 교육하자고 주장하였다면 친일파로 볼 수 있다. 그가 일본어를 '국어'로 인정했다면, 우리말의 규범을 수립하는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만규는 1930~40년대에 걸쳐 민족어 규범 수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1년에 조직된 조선어학회에 참여하여 중추적인 활동을 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만든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과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은 해방 뒤에 우리나라의 국어 규범집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땅에 강제로 편입되었다. 이만규가 일본제국의 땅(일본 열도, 조선, 대만, 만주 포함) 가운데 일본 열도를 내지로 기술하였다고 친일의 흔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이만규는 일본의 의무교육은 세계의 2위도 양보하지 않을 만큼 높은데 반해 조선의 경우 매우 낮은 지경이라고 조선과 일본을 대비하여 기술하였다. 따라서 이만규에게 국가는 '식민지 조선'이었다.

"조선어 과목 필수" 주장한 이만규인데...

 '교육가들의 개정교육령관'(<조선일보>, 1938, 2, 25)
 '교육가들의 개정교육령관'(<조선일보>, 1938, 2, 25)

둘째로, 이 교수는 "이만규는 이미 1938년 2월 2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개정교육령 지상좌담회'와 3월 17일자 기고문을 통해서도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위한 수신교육의 강화, 특히 개인주의 중심에서 국가주의 중심으로의 수신교육의 방향 전환에 대해서도 지지를 한 바 있었다"라고 혹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수의 지적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만규는 "조선어 과목을 수의과목으로 하면 조선어가 약화된다"라고 비판하면서 "조선어 과목을 필수과로" 하기를 주장하였다.(교육가들의 개정교육령관- '조선어과목을 필수과로!-배화여고 이만규씨 談', <조선일보> 1938. 2. 25)

'개정교육령 지상(紙上)좌담회'(<조선일보> 1938. 3.17)에서도 이만규는 개정교육령의 시행으로 이전과 달리 변화된 내용만을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의 이만규의 글에 대한 오독이 지나치다고 하겠다. 

견해 개진했을 뿐 일제 교육정책 지지하지 않아

셋째로, 일제가 칙령으로 공포하여 1938년 4월 1일부터 실시하게 된 개정교육령에 대해서, 같은 해 5월 2일에 매일신보가 실제 교육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학교당국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개정교육령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참여하여 발언한 이만규에 대해, 이 교수는 "이만규는 일제의 내선일체 방침에 따른 학교명칭 통일, 일본학생들과 조선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내선공학, 일본교과서의 전면적 사용, 교과서에 대한 총독부 검정제도 등 모든 내선일체 교육정책에 대해 지지를 표시하였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첫째, 일본과 조선의 학교 명칭 통일에 대해 이만규는 '여학생들은 새 학제를 좋게 생각하나 봅니다'라고만 말하였다. 둘째,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공학문제에 대해 '감정문제가 큰 자극이 되는 만큼 심각한 주의와 경계가 절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셋째, 교과서 통일에 대해 그는 '교과서는 조선총독부에서 일괄로 편찬한 것보다 검정제도에 의해서 학자들이 상호경쟁을 해가며 만든 책이 좋다'라고 말하였다. 넷째, 가사나 재봉교과의 교재는 '종전의 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재를 그대로 사용해야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이만규는 매일신보사측에서 요청하여 이루어진 좌담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였을 뿐 일제의 교육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만규가 얼마나 옥고치렀는지 규명했어야

넷째로, 이 교수는 계속하여 이만규가 1938년 5월 2일 매일신보가 개최한 '개정교육령 좌담회'에 참여한 것을 근거로, "이만규는 이미 흥업구락부와 관련된 총독부의 혐의에서 벗어나 있었거나 아니면 총독부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좌담회에 참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대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근거 없는 서술일 뿐이다. 1938년 5월이면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들이 검거되던 시기였고, 더구나 이만규가 조선총독부와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좌담회에 참석한 것도 아니었다.

덧붙여 이 교수는 좌담회 참석 기사를 바탕으로 이만규가 6개월간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기존의 학설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그가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고 주장해왔다. 종래의 주장이 틀렸다면 이 교수는 치밀하게 이만규가 얼마나 옥고를 치렀는지를 규명했어야 한다. 그래야 연구가 진전될 수 있다.

필자도 <민족주의 교육사상가 이만규>(<역사비평>22호, 역사문제연구소, 1993)와 <이만규 연구>(<한국교육사학>제16집, 한국교육학회 교육사연구회, 1994.) 그리고 <일제강점·'해방공간'기 이만규의 기독교 인식>(<한국사상사학>제17집, 한국사상사학회, 2001)에서 6개월 설을 주장했다.

이 교수의 글을 읽고서 필자는 흥업구락부 사건을 세밀히 검토했다. 그 결과 필자도 오류를 범하였음을 발견하였다. <[흥업구락부]관계자 명부>(<연희전문학교 동지회 흥업구락부 관계보고>,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자료임)에 이만규가 1938년 5월 19일에 서대문경찰서에 구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검거된 흥업구락부 회원들은 같은 해 9월 3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전원 석방되었다. 이만규는 이 사건으로 3개월 이상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또 이 교수는 흥업구락부 회원들이 전향성명서를 내고 국방비를 헌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교수도 알고 있듯이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이 석방된 뒤에 친일의 길로 상당수가 돌아섰다.

그러나 이만규는 전향 이후 일제에 협조하지 않았다. 문제는 친일의 길로 가지 않고 비타협 노선을 걸은 인사들도 있다는 점을 이 교수가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만규는 흥업구락부 사건 때문에 배화여고에서 해직된 뒤 자료 수집을 해 민족주의 교육사서인 <조선교육사> 집필을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이만규는 출옥한 뒤 1944년 조선건국동맹에 가담하여 민족해방을 준비하였다.

조선기독교계 인사와 활동했으나 민족주의 노선은 해방까지 지속

다섯째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1939년 2월 이만규가 김종우, 양주삼, 원한경과 함께 이사로 선임된 것을 이 교수는 문제를 삼았다. 그러나 이만규는 친일 행위를 하지 않았다.

1911년부터 이만규는 기독교신자가 된 이후 1920년대에 남감리교회에 속한 서울 종교교회에 다녔다. 그는 송도고보 교사로서 개성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가담하였다. 3.1운동 재판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일제의 소위 '출판물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된 뒤 1919년 4월에 개성경찰서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고 8월 5일에야 석방되었다. 이렇게 4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윤치호는 당시 송도고보의 이만규를 '반일파의 우두머리'로 보고 있었다(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 역사비평사, 2001, 204쪽).

이만규는 1930년대 이후 서울 YMCA에서도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시기 이만규는 조선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사들과 같이 활동해 왔다. 윤치호, 양주삼, 신흥우, 정춘수, 백락준, 유억겸과의 교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이만규의 노선 분기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제의 노선을 추종하는 자발적 또는 소극적 친일파로 나서게 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일관하였다. 반면 이만규는 이들과는 달리 민족주의자로서의 노선을 해방까지 지속하였다.

여섯째로, 이 교수는 이만규가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시가정시간 <질서 있는 생활을 합시다>'라는 연설을 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그가 "전시에 즈음하여 일반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준수해야 할 지침을 전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가 <질서 있는 생활을 합시다>에서 무슨 내용의 연설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구체적인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데, 추측하여 평가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본다.

일곱째로, 이 교수는 이만규가 저술한 "'가정독본'은 친일의 흔적임이 틀림없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놀랍게도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발표한 '의례준칙'의 긍정적 영향을 인정하고 그것의 철저한 준수를 주장하고 있다"라고 이 교수는 그를 혹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이만규는 조선총독부가 만든 의례준칙을 참조하여, 이를 넘어서기 위해 자신이 제시한 8가지 예절의 내용을 가지고 현재에 시행 중인 혼례와 상례와 제례에 대해 고칠 점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예절의 내용 여덟 가지는 오늘날도 되새길 수 있다. 책의 내용 전체에서 가정교육과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모진 고문받은 이만규에게 일제에 타협적이어서 풀렸났다?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제1독회에 참여한 사정위원들이 1935년 1월 4일에 온양에 있는 세조대왕 비각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만규, 네 번째가 이극로, 다섯 번째가 최현배, 여섯 번째 수염을 기른 사람이 문세영임(<한글> 21, 1935, 20쪽; 한글학회, <한글학회 100년사>, 2009, 471쪽)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제1독회에 참여한 사정위원들이 1935년 1월 4일에 온양에 있는 세조대왕 비각 앞에서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만규, 네 번째가 이극로, 다섯 번째가 최현배, 여섯 번째 수염을 기른 사람이 문세영임(<한글> 21, 1935, 20쪽; 한글학회, <한글학회 100년사>, 2009, 471쪽)

여덟째로, 조선어학회의 핵심 간부였던 이만규가 다른 회원들과 달리 기소되지도 않고, 징역형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이만규가 교육부문에서 기왕에 보였던 타협적 활동이 그의 기소유예를 가능하게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라고 이 교수는 그를 혹평하였다. 이 교수는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천착은 하지 않은 채 근거 없는 추측을 여기서도 하고 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1942)을 일으켜 관련자 31인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조선어학회가 탄압받은 이유는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이만규도 1942년 10월 21일에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고, 여기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홍원경찰서에서 1년간 고생한 후 그는 1943년 9월 12일~13일 2회에 나누어 떠나 함흥형무소 미결감으로 이감되었다. 함흥으로 옮아간 지 5, 6일만에 검사의 구류 기한인 1년이 만기되는 1943년 9월 18일에 기소유예로 동지 11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1년여 동안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고생한 이만규에 대해, 이 교수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이만규를 일제에 타협적이었던 활동 때문에 그리 가능했다고 평가한 것은 애국선열을 모독하는 처사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이만규가 일제에 타협적 활동을 하였다면 그들에게 검거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1년여 동안 이만규가 당한 고통이 짧다는 것을 이 교수가 아쉬워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이만규의 막내딸 이미경(李美卿,1918년생)은 "출감 당시 아버지는 몸이 무척 여위시고 일제의 고문으로 귀 한쪽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아울러 이 교수는 "이만규가 초기 기소대상자 16명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담당 검사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수감을 면할 수 있었다. 기소유예 사유는 분명치 않다"라고 기술하였으나 이것도 설득력이 없다. 이만규는 초기 기소대상자 16인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일제는 자신들이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소와 기소유예를 정한 것이다. 기소유예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조선어학회에서의 활동이 결코 적었다고 평가할 수 없다.

이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오히려  이만규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로부터 처벌은 받은 인사들은 대부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이만규와 똑같이 기소유예 판결을 받은 이강래·김윤경·김선기·이병기·윤병호·서민호·이석린은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이만규는 북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하였다. 이 교수는 여기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배화여고 교두가 된 게 일제와 관련?...사실관계부터 확인하시라

아홉째로, 이 교수는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에도 그가 배화여고에서 교두로서 활동을 지속한 것 또한 당시 총독부와 이만규와의 관계가 대립이나 투쟁의 상태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도 사실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것이다.

1940년 배화여고를 운영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9월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자 경영난으로 배화여고에 위기가 닥쳤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일제가 배화여고에 학교재단을 설치하지 못하겠거든 자신들에게 경영권을 넘기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때 해직상태에 있던 이만규가 학교를 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는 이민천 여사와 그의 아들 민병도에게 학교재단을 인수할 것을 설득하여 성사시켰다. 이 일로 해서 그는 1941년 5월 5일에 배화여고에 복직되어 배화여고의 교두가 되었다. 이후 다시 조선어학회사건(1942)으로 투옥되었다가 1943년 9월에 석방된 뒤 배화여고에 복직되었다.

한편 이만규는 복직 이후에도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민족해방을 자주적으로 맞이하기 위해 조선건국동맹(1944)에서 활동했다. 여운형은 1944년 8월 10일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이만규도 여운형의 추천으로 가맹하였다. 그는 조선건국동맹에서 조직 초기부터 활동하였고, 조직 재건에도 기여했다. 그의 장남 이정구와 둘째딸 이각경도 건맹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일제말기 이만규가 친일파였다면 자신의 아들·딸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을까?

민족해방이 다가오는 1945년 8월 11일경 이만규는 여운형의 지시를 받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이 독립선언문은 3·1독립선언문의 뒤를 이은 독립국가의 청사진을 밝힌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오전 민족해방의 날에, 그는 독립선언문을 반듯하게 쓰다가 건국동맹의 소집령을 받았다.

이만규는 친일파 조건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아

열째로, 이 교수는 결론적으로 이만규의 저서 내용을 빗대어 "이만규의 삶을 고려해보면 민족적 양심은 지녔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끝까지 이를 지켜낼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다름없다. 식민지 후반 시기를 이만규는 교육파멸기라고 불렀지만 이 시기는 교육만이 파멸된 것이 아니라 교육자인 이만규 자신도 파멸을 경험한 시기였다"라고 총평하였다. 이만규 자신도 민족적 양심을 파멸한 친일파에 해당하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만규가 친일파였다는 이 교수의 주장이 타당성을 얻으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하여야 한다. 즉 교육·학술 부분 그리고 지식인·종교인·문화예술인으로서 "교육·학술계에 종사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 이론을 합리화하고 이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선 자, 각급 교육기관과 각종 교육·학술단체의 설립자·책임자·운영자로서 전쟁동원을 독려한 자, 고등관 이상의 교육 관리, 조선사편수회의 편수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자, 좌담·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종교계 지도자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친일·전쟁협력 단체의 핵심 간부로 활동한 자"(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1>, 2009)는 친일파로 규정된다. 이만규는 위의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민족적 양심을 고수한 독립운동가였던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연구할 경우 좌우와 앞뒤를 고려하여야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박용규 기자는 한글학회 정회원이자 이극로연구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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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