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생전의 함석헌
▲ 함석헌 생전의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지난 4일은 '한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던 함석헌(1901~1989) 선생이 돌아가신지 23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나는 두문불출하고 집안에서 하루 종일 그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지냈다.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고 싶었지만 몸살로 건강이 안 좋았고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인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 어둠을 가르고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전화를 한 지인은 "함선생님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즉시 택시를 타고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택시안의 라디오뉴스에선 벌써 "함석헌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록 이른 새벽이었지만, 서울대병원 영안실엔 벌써 몇 사람의 조문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관을 보고, 그의 시신을 보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이 그 관속에 누워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신 앞에 예를 올린 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삶, 그의 죽음, 그리고 나의 인생…. 3시간 후, 나는 8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92년,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 에섹스대학교에서 학사논문으로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썼다. 5년 반 후인 1994년, 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으로 나는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를 제출했다. 9년 반 후인 1998년, 나는 영국 쉐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으로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연구>를 집필했다.

 

10년간의 영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0년 귀국 한 나는 2001년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함석헌평전>을 냈고, 지난해 원고를 보완, 수정하여 개정판을 냈다. 1980년 봄 그를 만난 이래 하루도 그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었고, 그는 나를 매순간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끄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다.

 

어려운 함석헌?

 
 
함석헌과 필자. 1988년 1월 1일 함석헌 쌍문동 자택에서
▲ 함석헌 함석헌과 필자. 1988년 1월 1일 함석헌 쌍문동 자택에서
ⓒ 김성수

관련사진보기



지난 10여 년 동안 함석헌과 관련한 세미나나 학회를 수도 없이 다녔고 많은 분들을 만났다. 때로는 내가 직접 발표할 기회도 있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의 발표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함석헌에 관한 강연을 들으며 말 못할 감동을 받은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떤 강연에서는 강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많았다. 마치 군대시절의 풀리지 않는 암호 같은 이야기와 이상한 이론을 동원해서 '열심히' 함석헌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그 강사의 얼굴을 보면서 "저이가 제정신인가? 정신병자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 적도 많았다. 강연을 들으러 온 것을 시간이 아까워서 후회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함석헌연구'는 물론 절대 필요한 일이다. 영국유학시절 간디에 대한 연구물이 수만 수십만 권이 있는 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그에 비해 함석헌에 대한 연구물은 국내외에 너무도 열악한 실정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나 함석헌에 대해서 몇십 년 연구한 연구자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이론과 표현을 통해서야만 함석헌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함석헌에 대한 연구가 아니다. 발표하는 사람의 자기만족일 뿐이고 함석헌에 대한 추상화, 우상화작업일 뿐이다. 함석헌 말대로 "진리는 독점되어선 안 되고 독점 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혼자만 이해 할 수 있는 사상, 몇 사람만 아는 사상은, 적어도 내겐 아무의미가 없는 공허한 궤변과 소음에 불과하다. 

 

'초월자' 함석헌?

 

함석헌에 대한 존경심이 지나쳐서 어떤 이들은 함석헌을 좌우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사상가로 또 심한 경우는 그를 좌우를 초월한 '초월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신도 아니다. '중립' 혹은 '초월'적인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두 편향되어있다.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국가폭력이 만연했고(용산참사의 경우는 현재진행형이다), 정경유착과 그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양극화가 극심한 나라에서 '중립'을 내세우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이거나 현실에 안주하고픈 자기의 비겁함을 합리화하는 '겁쟁이 지식인'들이 라고 단언한다.

 

독재자 박정희-전두환과 함석헌 둘 다를 좋아하는 변태적 지식인들도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한국현대사 속에서 국가폭력으로 인해서 발생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화해, 박정희-전두환과 함석헌 사이의 화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상식은 가해자는 화해를 논할 자격이 없다. 이근안이 김근태에게 화해하자고 할 수 있는가? 화해는 피해자만이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피해자에게 화해를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화해는 신의영역이다. 나는 화해보다는 사회정의가, 특별히 우리나라처럼 불의와 부조리가 강물처럼 넘치는 나라에서는, 선행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함석헌에 대한 경애심이 도를 넘어서 그를 좌우논쟁을 넘어선 '초월자' 로 묘사하는 추종자들 있다. 나는 어느 한 인간을 '초월자'로 만들고 떠받드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그 '초월자'는 범인들이 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탈역사화'한 존재로 박제화 된다. 그런 우상화된 인간들을 우리는 많은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다. 결국 함석헌을 '초월자'로 대우하는 것은 그를 스탈린이나 김일성처럼 우상화하는 것이고 독재자로 만드는 것이다.

 

극좌파 함석헌

 

함석헌은 개신교의 한 부류인 퀘이커교도로 그 삶을 마감했다. 함석헌의 지인이기도 했던 미국의 퀘이커 역사가 하워드 브린톤(1884-1973)은 그의 저서 <퀘이커 300년>에서 "퀘이커 신앙은 영국 종교개혁의 극좌익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말은 퀘이커교도는 최소한 "파이 키우기"를 옹호하는 우파보다는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는 좌파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한 퀘이커교도는 천박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적 가치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권이나 일방주의를 내세우던 미국의 부시 정권보다는 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힘쓰던 노무현 정부나 미국의 오바마 정부에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퀘이커 모임에 종종 나오는 사람들이나 함석헌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 중엔 함석헌은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고 중립적 인물이었거나 차라리 우파에 가까웠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함석헌에 대한 평가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약자가 강자의 폭압에 의해 수탈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데 '중립'은 곧 강자에 기생한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비겁한 기회주의적 변명에 불과하다.

 

예수도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보다 어렵다"고 목숨을 걸고 가르쳤고 결국 정치권력의 손에 생명을 잃었다. 이런 예수의 삶과 말도 좌파의 전형이었고 그런 예수와 퀘이커신앙을 따르던 함석헌도 당연히 좌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일찍이 오산학교 시절인 1936년 함석헌은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우리가 정치가를 생각한다면 어떤 것을 참말 위대한 정치가라 하겠나? 내 생각으로는 사회의 억눌린 계급의 민중을 살길로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상류사회를 위한 시설을 아무리 잘하고라도 하층에 짓밟히고 억눌린 민중이 있으면 국가는 위협을 느낀다. 국가의 운명은 하층민의 손에 달린 것이지 결코 상층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위정자의 재능의 척도는 하층사회에 대한 시설에 있다." 이런 함석헌의 글은 마치 내가 <자본론>을 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연구는 행동이 아니다?  '함석헌연구' 더 필요하다!

 
 
최근의 필자(왼쪽)
▲ 김성수 최근의 필자(왼쪽)
ⓒ 김성수

관련사진보기



함석헌 추종자 중엔 집필이나 연구는 행동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 이들 중엔 '함석헌연구'보다는 함석헌처럼 행동하며 살자고 강변하는 이들도 있다. 중국의 사마천은 궁형(거세형)을 당하면서도 <사기>를 썼다. 그의 <사기>가 동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과 공헌을 필설로 다 기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럼 사마천의 집필행위는 '행동'이 아닌가? 독일 종교개혁의 불씨를 담긴 마틴 루터는 <기독자의 자유>라는 짧은글을 써서 유럽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지폈다. 토마스 페인은 <상식>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대영제국에 대항한 미국독립전쟁의 이론적 정당성을 마련해 주었다. 

 

사람은 다 자기 그릇이 있다. 안창호에게 안중근 같이 이등박문을 향하여 총을 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튼에게 셰익스피어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을 쓰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말이다. 내가 함석헌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누구에게 '무엇을 하시오'라고 권유하거나 지시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 옳다고 믿으면, 그는 누구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변하기보다는,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혼자서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기꺼이 그로인해 오는 고난을 받아들였고 희생을 당했다. 그가 받은 고난과 희생의 결과로 오늘 한국인들이, 이나마 부족하지만,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자유를 쟁취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 자체는 함석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를 처음 만난 지가 어느덧 32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23년이 넘었다. 삶을 살아 갈수록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함석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의식하게 된다. 특별히 그의 영향으로 나는 철도공무원에서 역사가, 근본주의자에서 보편주의자, 복음주의자에서 인본주의자, 교조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내게 역사와 철학의 '맛'을 알게 해 준분도 함석헌이고, 무엇이 인생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준 분도 함석헌이다. 내게 함석헌은 진리, 도(道), 하느님을 보여준 마음의 창문과 같은 존재다. 그가 살아서 그의 가르침과 영감(inspiration)이 내 인생에 어떤 열매를 거두게 했나 보셨으면 하는 염원도 감히 해본다. 그가 남겨준 따스한 사랑과 들사람얼(野人精神)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나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

 

돌아가신지 23주년에 스승 함석헌을 생각하며......
 

덧붙이는 글 | * 김성수 기자는 <함석헌평전> 저자입니다.


태그:#함석헌, #김성수, #함석헌연구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