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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영희 선생님을 '사상의 은사'로 모셨던 이상철 선생님.
 리영희 선생님을 '사상의 은사'로 모셨던 이상철 선생님.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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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기독교, 어버이

올해 희수(喜壽 77)이신 선생께서는 삼박자를 고루 갖췄다. 게다가 기업인 출신에다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행동파이니 서울시청과 서울시교육청 등지에서 성조기와 주먹을 휘두르며 '빨갱이 척결', '곽노현· 민주통합당 척결' 등을 외치는 극우파 노인으로 분류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다.

이상철 사학국본 정책자문위원 또한 서울시청 등지에서 열리는 시위집회에 참석한다. 하지만 손엔 성조기가 아닌 촛불이 들려 있다. 기업인으로 인생 전반전을 보냈던 선생께서는 인생 후반전엔 비리사학을 폭로하고 개혁하는 일에 투신하는 등 권력 감시 운동으로 도도하게 흘러왔다. 아울러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기도 한 선생은 "한기총은 무릎 꿇고 회개하라!"고 소리쳤다.

거처를 산본으로 옮긴 뒤에는 이웃에 사시던 리영희 선생을 모시고 수리산으로 운동을 다니거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단독 특강을 듣는 행운을 누렸다. 리 선생과는 네 살 차이지만 사상의 은사로 모셨다. 아울러 동네 지기인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부인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염무웅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와 어울리며 시국을 논하곤 한다.

은사 리영희 선생이 세상을 뜨셨다. 그리고 선생은 허리디스크로 한동안 고생했다. 세상일에 한동안 잠잠했던 이유다. 그런데 지방자치 비리 문제를 목격한 선생은 또 다시 비리척결의 칼을 차고 나서는 등 지방권력 감시운동에 열정을 쏟고 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수리산과 아름다운 숲 속 길 그리고 노인병원 등 편의시설을 잘 갖춘 산본을 사랑하게 됐다는 선생께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동네라도 비리세력을 판치게 놔두면 썩게 마련"이라면서 "투명한 풀뿌리 정착으로 살기 좋은 군포가 되면 좋겠다"고 바라마지 않는다.

박정희 초상화 제거했다가 쫓겨난 이상철 전무이사

 경상도 출신인 선생은 "박정희-박근혜 독재자 부녀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경상도가 부끄럽다"며 안타까워한다.
 경상도 출신인 선생은 "박정희-박근혜 독재자 부녀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경상도가 부끄럽다"며 안타까워한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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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젊은 시절은 승승장구였다. 5·16 쿠데타로 군 출신들이 온 나라를 장악했던 1960년대에 20대의 젊은 나이로 부산시체육회 이사 및 태수도협회장(태권도-공수도협회)을 지냈다.

첫 직장이었던 '벽산그룹'에서는 40대에 전무이사가 됐다. 그리고 '대한종합식품' 전무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육해공군 참모총장 출신이 사장으로 낙하하는 이 회사는 월남전에 보내는 식품을 독점 납품했다. 상여금만 1,200%를 지급할 정도로 최고 대우를 해주었기에 명문대 출신들이 몰려들었다. 이처럼 최고 기업의 전무였던 선생은 회사에 걸린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를 떼어냈다가 잘리고 말았다.

박통의 초상화 제거는 실수가 아니었다. 반체제 인사였던 한완상 서울대 해직교수와 어울리면서 물이 든 것이다. 유신 말기였던 1978년, 한 교수가 권한 리영희-강만길 교수의 저서를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전만 해도 "도산(도시산업선교회)은 빨갱이 단체다. 위장취업자들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는 선생께서는 "그렇게 살았다면 지금쯤 아바이연합회 회원이 되어서 빨갱이 척결을 외치고 다녔을 것"이라며 웃었다.

선생은 한완상 교수를 대한종합식품 고문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한 교수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교양특강을 하면서 기업의 윤리, 노동자의 권리, 기독교의 사회참여 등에 대해 강조했다. 반체제 인사를 회사에 끌어들이고, 불순한 특강을 열더니 각하의 사진까지 떼어낸 이상철 전무이사.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기업조차 사찰하던 유신독재 치하에서 선생의 불온한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9년 5월, 회장이 부르더니 전무이사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하지만 오라는 곳은 많았다. 선생의 투명한 경영능력을 높이 샀던 기업들이 손을 내밀었다. 롯데축산 영업본부장 겸 이사로 자리를 옮겨 일하던 선생에게 대한종합식품 측이 '박통이 죽었으니 다시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다. 그리고 48세이던 1983년 친구와 함께 자동문을 제작하는 중소기업을 설립, 롯데월드에 납품하는 등 기업을 성장시키는데 몰두하면서 50대까지 중소기업체 CEO로 역량을 발휘했다.

사학비리 폭로 그리고 유치장 신세... 사학개혁 전사로 거듭나

 이상철 (왼쪽에서 두번째) 사학국본 정책자문위원이 손봉호 동덕여대 총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상철 (왼쪽에서 두번째) 사학국본 정책자문위원이 손봉호 동덕여대 총장 퇴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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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인생 후반전은 권력 감시 운동에 바쳐졌다. 기득권층이었던 선생이 사회비판 세력으로 전향하는 데는 가문의 반골 정신과 진보적 신앙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에게 눈 뜨임을,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온 해방 예수를 신봉한다.

선생은 1987년 이삼열, 한완상 등 진보 학자들과 함께 초교파 평신도교회인 '새길교회'를 창립했다. 목사 없이 평신도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교회는 모인 헌금으로 해직교사후원회, 문익환 목사, 단병호 의장, 민청련 사형수 김병곤, 여성노동자회 이영순 등을 후원했다. 이 교회 선교부장이었던 선생은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깊이 깨닫고 사회개혁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첫 발은 참여연대였다. 참여연대 창립멤버인 선생은 운영위원과 시민로비단장을 맡아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에 적극 나섰다. 전문경영인으로 쌓은 경력이 권력 감시 운동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공직자의 부패혐의를 밝히는데 팔을 걷어 붙인 선생은 이한동 국무총리 내정자에 대해 뒷조사를 해서 국회에 제출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선생은 구호와 성명서 중심의 시민운동가와 달리 철저한 자료 수집은 물론 처벌 규정까지 샅샅이 뒤져서 공익 제보하고 고발하기에 이른다.

한국 사회는 학연, 지연, 교연(교회인맥) 등으로 얽혀졌다. 진보든 보수든 이 연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선생은 사사로운 연줄에 얽매이지 않는다. 청강문화산업대 이사장인 정희경 장로가 선생에게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면서 이 대학의 사무처장으로 1996년 일하게 됐다. 그런데 이 대학의 법인설립 출연재산 유용 및 족벌체제 등 비리를 목격하고는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이사장과 교회 인맥 관계였지만 사학비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선생은 참여연대에 이 대학의 비리를 제보하면서 고발토록 하는 한편 <한겨레> 등의 언론에 부패사학의 실태를 폭로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부패사학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커녕 비리를 폭로한 공익제보자가 유치장에 갇혔다. 청강학원이 선생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자 당시 김대중 정권의 법무부(장관 박상천)는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등 초유의 공권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면을 보면 이해가 된다. 정희경 청강학원 이사장이 국민회의 부총재이자 전국구 1번 국회의원이었다. 청강학원은 이어서 선생을 상대로 2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선생은 2년 동안 소송에 시달렸지만, 재판부가 비리사학에 대한 폭로와 언론 인터뷰 내용이 사실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며 선생의 손을 들어주었다. 참고로 청강학원의 소송대리인은 민변 언론위원장 출신 변호사였다.

이 정도 고초를 겪으면 뜻을 꺾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생은 외려 비리사학 개혁의 전사가 된다. 청강뿐 아니라 상당수 사학이 비리 구덩이라는 것을 확인, 비리사학을 뿌리 뽑는 길은 법과 제도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사학법 개정운동에 투신한다. 사립학교법개정운동본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게 된 선생은 세종대와 동덕여대를 비롯한 영남대, 경문대, 서일대 등 분쟁사학 개혁과 민주화에 뛰어들었다.

친일파의 후예? 저항정신과 반골정신의 가문

 이상철 선생의 서재에 꽂힌 리영희 선생의 저서 <대화>. 그리고 전교조 후원에 대한 감사패가 놓여 있다.
 이상철 선생의 서재에 꽂힌 리영희 선생의 저서 <대화>. 그리고 전교조 후원에 대한 감사패가 놓여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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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부끄럽게도 친일파의 후예입니다."

경주에는 양대 만석꾼인 '최부자'와 '이부자'가 있었다. 경주 최씨 부자는 굶는 이웃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 일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자금을 댔지만 경주 이씨 부자는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경주 이씨인 선생께서는 "가문의 수치일지라도 사실대로 밝히고 뉘우쳐야 부끄러운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선생은 친일파의 후예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반골정신과 저항정신은 가문의 영향이 크다. 선생은 친가와 외가의 몇몇 어른을 인생 푯대로 삼았다. 첫 번째 푯대는 8대조인 덕봉(德峰) 이진택(1738∼1805) 선생이다. 덕봉은 조선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까지 지내면서 사노비 해방에 앞장선 개혁파로서 공노비 해방에도 영향을 끼쳤다. 청렴과 악습 개혁으로 관직 생활을 일관했던 덕봉은 정약용과 밀부(密符)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삼수갑산(三水甲山)에 유배되기도 했다. 선생은 삼수갑산을 갈지라도 비리와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덕봉 어른에게 배웠다고 했다.

외가 칠촌인 박상진(1884~1921) 독립운동가. 판사 출신인 박 의사는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총사령에 취임, 군자금 모금에 비협조적인 친일파 부호들을 처단하고, 일제가 징수한 세금운반 우편마차를 탈취해 군자금을 확보했다. 박 의사는 그러나 밀고에 의해 체포되면서 순국했다. 아울러 천석꾼이었던 외삼촌(박용진)은 머슴들의 새경을 자신에게 맡기도록 해서 고리로 불려주었다가 논으로 떼어주어 자립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선생은 외가의 두 어른을 통해서 가진 자들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무 그리고, 나눔 정신을 배웠다고 했다.

친삼촌과 아버지에게서는 작지만 소중한 덕목을 배웠다고 했다. 종손인 백부 밑에서 집안 살림을 꾸리던 삼촌은 다른 지주들과 달리 소작농과 종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의 생활을 돌봤다고 했다. 또한 부친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살림을 축내기는 했지만 그 덕을 쌓은 덕분에 토함산 빨치산들이 마을을 습격해서 악덕 지주들을 해쳤지만 선생의 집안은 어떤 해코지도 당하지 않았다.

참여연대 1호 평생회원 "기업 비판하면서 후원받는 시민운동 정당한가"

 이상철 사학국본 정책자문위원은 안태성 전 청강문화산업대 해직교수를 돕는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장애인 차별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상철 사학국본 정책자문위원은 안태성 전 청강문화산업대 해직교수를 돕는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장애인 차별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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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세력과 타협하지 않는 꼿꼿함 때문에 선생은 외롭다. 뒤늦게 사회개혁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앞자리보다는 뒷자리를 택했다. 말보다는 행동을 택하면서 궂은일을 도맡았던 것은 자청한 것이니 서운하지 않다. 그런데 20년간 시민운동을 하면서 얻은 외로움 혹은 속병이 있다. 그것은 부패세력과 비타협 투쟁을 하다 보면 선생은 외떨어져 있고, 어떤 시민운동가 혹은 명망가들은 불의한 세력과 슬그머니 뒷손 잡고 있더라는 것.

선생에게 동지는 진보 또는 운동가가 아니다. 진정한 동지는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진실과 정의다. 그래서 불의와 타협하는 애매한 진보 혹은 시민운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애매한 시민운동가들은 선생의 주도면밀하고 끈질긴 전투력은 높이 사면서도 비타협 투쟁에 대해서는 몹시 불편해한다. 사학 개혁 판에서도 잇속이 생기면서 밥그릇 차지를 놓고 추태가 벌어졌다. 이런 꼴이 벌어지면 선생은 악역을 자처한다. 그가 원로든, 총장이든, 목사이든, 명망가든 벼락같이 호통을 친다.

"이런 나쁜 놈, 그 따위로 하면서 당신이 원로야, 총장이야, 목사야, 시민운동가야…."

그 손길은 선생에게도 뻗쳤다고 했다. 분규 중인 사학으로부터 이사장을 제의받았는데 접근한 거간꾼은 교육부의 고위직을 지낸 마피아라고 했다. 고액 연봉과 운전사 딸린 자가용 등을 제공할 테니 사학비리에 대해 입 다물어달라고 유혹의 손길을 뻗쳤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지만 "좀 더 젊었다면 그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부패사학과 부패 자치단체 세력의 권모술수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고 위험성을 강조했다.

 참여연대 1호 평생회원인 이상철 선생이 애정어린 비판을 참여연대에 가했다.
 참여연대 1호 평생회원인 이상철 선생이 애정어린 비판을 참여연대에 가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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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1호 평생회원(회비 100만 원)인 선생이 참여연대에 대한 애정이 어린 비판을 가했다. 기득권층에 얽매여진 애매한 시민운동 판은 깨져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적당하게 폼만 잡는 시민운동에 어떤 시민이 지지하고 동참하겠는가!"라면서 목청을 높였다.

"개도 무는 개를 돌아본다는 말이 있다. 도둑을 보고도 짖지 않은 개는 처분한다. 마찬가지로 적당히 운동하며 폼만 잡는 시민운동을 이젠 때려치울 때가 됐다. 특히 '권력 감시운동'과 '자선운동'은 분리되어야 한다. '참여연대'와 '아름다운재단'은 일종의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운동 방식은 곤란하지 않나. 참여연대는 기업을 비판하고, 아름다운재단은 기업에게 후원을 받는다. 이게 정당한 시민운동인가."

권력 감시 운동에는 덫이 많다고 했다. 비리사학은 온갖 술수로 학교 돈을 빼먹고 공무원은 결탁해서 놀아나고, 교수를 비롯한 직원들은 묵인하고, 피해자인 학생들은 스펙 쌓기에 정신이 없다. 마찬가지로 비리 단체장은 각종 이권에 개입하면서 선거를 도왔던 관계자들에게 공사와 행사를 잡아준다.그런데 이들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상당수 지식인과 시민운동가 그리고 시민단체들은 비리세력들이 뿌려놓은 각종 자리와 지원금 등 밥그릇에 코가 꿰이면서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독이 든 먹이를 나눠준 자치단체장과 공무원들이 비리를 저지르며 활개를 치는데도 시민운동은 플래카드와 성명서 등 적당한 운동으로 무기력해 지곤 한다.

식사 한 번 하잔다. 한 번 만나잔다. 그렇게 안면 한 번쯤 트는 게 어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식사 한 번 하고, 술 한잔 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이러면서 꿰였다는 것이다. 선생에게도 밥 한 번 먹자, 한 번만 만나자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셈과 수법을 뻔히 알기에 원천봉쇄한다는 것이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눈 부릅뜨고 저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싸우면서 저항해야 시대가 썩지 않는다는 칼날 같은 노(老)운동가.

선생께서 기자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동지를 곤궁하게 빠트리면서 비리사학과 손을 잡았던 시민운동가 그리고, 여전히 그 사학의 손을 잡고 있는 시민운동 원로의 위선을 고발하는 문제로 고민 중이다. 그런데 폭로가 간단치 않다. 자칫 조·중·동 등 보수언론에게 먹이를 주는 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이 문제가 확산되면 총선 등에서 개혁세력을 싸잡아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고백할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참 불편한 진실이다.

부패한 돈, 덕이 없는 권력은 재앙

 부패 권력과 비타협 투쟁으로 희수(77세)를 맞이한 개혁전사. 그는 청정하게 늙는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부패 권력과 비타협 투쟁으로 희수(77세)를 맞이한 개혁전사. 그는 청정하게 늙는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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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를 맞는 선생에게 인생은 어떤 의미일까?

처자식을 돌보느라 사업에 전념했던 인생 전반전과 불의와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싸웠던 후반전. 후반전 인생이 고단하기 했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사학비리 세력들과 싸우면서 권력과 재산을 둘러싸고 부모형제 간에 송사를 벌이는 그들의 목불인견을 숱하게 봤단다. 부패한 돈과 덕이 없는 권력은 재앙이라는 것, 돈과 권력을 둘러싼 집안의 아귀다툼은 극히 자업자득이라는 것이다. 부패한 나무에서 어찌 푸르른 가지가 돋을 수 있으며, 부패한 집안에서 어떻게 정신 맑은 자식이 태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요즘 사는 게 아주 행복합니다."

함께 어울리던 옛친구들처럼 CEO로 살면서 부동산 투기하고, 돈에 환장한 천민의 인생을 살았다면 강남에 집이 몇 채요, 통장에 수억 쌓아 놓고 살았을 테지만 그들의 인생이 전혀 부럽지 않다고 했다. 정말 쿨한 웃음을 지으며 "남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로 사는 지금의 인생이 족하다"고 했다. 그 웃음에서 묻어나는 당당함과 평안함이 부러웠다.

아내와 자신은 건강하고 자녀들은 부지런하다. 물려줄 재산이 없으니 아버지의 유산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으로 인생을 살려고 다들 애쓴다. 더구나 늦게 장가 간 아들이 손자를 안겨주어서 고놈의 재롱을 보는 재미가 아주 크다는 것이다. 선생은 남은 여생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감사하며 떠나는 것"이라고 했다.

2남 1녀의 자녀들은 모두 시민단체 혹은 진보정당을 후원한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애매한 정당인 민주통합당은 거부한단다. 가족들은 모두, 물고기들이 스스로 살아갈 물이 썩지 않도록 강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가족과 후손들이 살아갈 시민사회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도록 가꾸기 위해선 당연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다. 다만 연로한 운동가인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견해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통합진보당'을 지지하느냐 혹은 '녹색당'을 지지하느냐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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