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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승지를 소집했던 사정전 어좌
▲ 사정전 수양대군이 승지를 소집했던 사정전 어좌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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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를 집합시킨 수양이 승지들을 불렀다. 영문을 모른 채 도승지 박원형, 우부승지 조석문, 동부승지 윤자운과 성삼문이 뛰어 들어왔다.

"저 놈을 끌어내라."

수양이 성삼문을 지목했다.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내금위 조방림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조방림이 험상궂은 얼굴로 성삼문을 끌어내어 수양 앞에 꿇어 앉혔다.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순간, 성삼문의 머리에 구멍이 뚫린 듯 찬바람이 '휙' 지나갔다. 수양의 입에서 김질의 얘기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성삼문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김질과 면질하고서 아뢰겠습니다. 만나게 해주소서."

성삼문을 노려보던 수양이 김질을 들라고 일렀다. 초췌한 얼굴이 들어왔다.

"자네가 고했나?"
"…."

김질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이 없다.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자네가 진정 고했나?"
"예."

힘없는 목소리가 목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숙여진 고개가 더욱 꺾어졌다. 수양에게 고변을 바쳤지만,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있다. 살기 위해 고자질을 했지만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다. 성삼문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으니 그가 '괘씸죄'를 걸어 물귀신 작전을 쓰면 꼼짝없이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성삼문의 혀끝에 행운을 빌뿐이다.

김질도 한명회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편액
▲ 사정전 편액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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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질은 성삼문보다 품계도 낮고 다섯 살이 어리다. 서른네 살 막내로서 거사에 가담한 것이다. 그가 거사에 발을 담그게 된 동기는 의문투성이다. 그의 장인 정창손이 그를 이용했다고 입에 개거품을 뿜는 사람도 있고 인맥이 취약한 그가 장인을 업었다는 자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손오공이 삼장법사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 정창손과 김질이 한명회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개국공신 김사형의 증손자인 김질은 음보로 충의위(忠義衛) 부사직으로 조정에 출사했다. 성균관 참상관 제도를 이용하여 늦깎이 공부를 한 그는 문종 즉위년 추장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에서 촉망받는 젊은이로 성장했다. 이 무렵 성삼문과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과 교유하며 역사에 눈을 떴다. 그 눈이 장인을 업었는지 정창손이 그 눈을 현혹했는지 모르겠다.

"다 말했나?"
"이개·하위지·유응부까지만 말했습니다."
"천하의 간자(間者) 같으니라고…. 자네를 믿은 게 잘못일세. 더 이상 말하지 말게."

호흡을 가다듬은 성삼문이 수양을 바라보았다.

"김질의 고변이 맞습니다."

화통하다. '밀당'은 성삼문 체질이 아니다. 밀고 당기며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 속 시원하게 수양이 원하는 답을 던져 버린 것이다.

"이런 발칙한 놈. 이자를 포박하라."

분노한 수양의 목소리가 사정전을 울렸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성삼문을 결박하여 형틀에 묶었다.

"내가 네 마음을 들여다보기를 손바닥 보듯 하고 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소상하게 말하라."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런 고얀 놈 같으니라고. 이자를 매우 쳐라."

둔탁한 곤장 소리... 비명이 진동했다

죄인을 묶어놓고 곤장을 치던 형구
▲ 형틀 죄인을 묶어놓고 곤장을 치던 형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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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의 엉덩이에 곤장이 작렬했다. 길이 5척 8치에 넓이 다섯 치, 두께 8푼의 중후장대(重厚長大)한 곤장이다.

"김질이 말한 공모자 외에 누가 있느냐?"
"없습니다."

수양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너는 나를 알게된 지 꽤 오래 되었고, 나 또한 너를 후하게 대접했다. 지금 네가 비록 불궤한 짓을 모의했다 하더라도 내 친히 묻는 것이니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네 죄의 경중도 너에게 달려 있다."

수양이 눈을 부릅뜨며 회유했다.

"어찌 숨김이 있겠습니까? 더 이상 없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매우 쳐라."

성삼문의 엉덩이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계속되었다. 죄인을 다스릴 때 쓰는 곤장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 치도곤(治盜棍)이 있다. 이중 가장 무겁고 타격범위가 넓은 중곤(重棍)이 성삼문의 엉덩이 위에서 춤을 추었다.

"사실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더 이상 없다더니만 박팽년이 나왔군. 모조리 말함이 좋을 것이다."

또 다시 매타작이 이어졌다. 조용한 사정전 앞뜰에 둔탁한 곤장 소리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유응부와 박쟁도 알고 있습니다."

매에 장사 없다. 성삼문의 볼기짝이 너덜너덜해졌고 피가 튀고 살이 떨어져 나갔다. 성삼문이 혼절하자 이개와 하위지를 잡아들이라 명했다. 한동안 뜸했던 나장들의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너의 임금은 누구냐?"라는 질문에 하위지는...

의금부 나장들이 쓰던 모자
▲ 나장 의금부 나장들이 쓰던 모자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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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이개가 포승줄에 묶여 왔다. 머리는 산발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진 성삼문을 발견한 이개는 아연실색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너는 나의 옛 친구다. 친구 사이에 이럴 수 있느냐?"
"나는 친구로 대해준 적이 없소이다."
"허허."

수양이 허허로운 웃음을 날렸다.

"좋다. 네가 날 친구로 대하지 않아도 너는 나의 옛 친구다.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모조리 말하라"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정말이냐?"
"그렇소이다."

이개가 완강히 버텼다.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 이개의 문재(文才)를 일찍이 간파한 세종은 그를 저작랑(著作郞)에 임명하여 명황계감(明皇戒鑑)을 편찬케 하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시켰다.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여념이 없을 때, 수양은 집현전을 방문하여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때 수양의 눈에든 게 이개였고. 수양은 동갑내기인 그를 벗처럼 대했으나 이개는 대군으로 깍듯이 예우했다. 야심 많은 수양에게 붕우(朋友)의 정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양이 하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삼문과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누구누구와 모의했느냐?"
"기억이 안 납니다."
"네 눈에는 내가 누구로 보이느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완전 무시로 나갔다. 수양이 눈을 부릅뜨면 하위지도 눈을 부릅떴다. 하위지는 상왕파 중에서 제일 연장자다. 성삼문보다 여섯 살 위고 수양보다도 다설 살 위다. 품계는 나이의 상위개념이다. 더구나 군신관계에서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하위지는 중후한 몸짓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너의 임금은 누구냐?"
"딱 한 분입니다."
"그가 누구냐고 묻지를 않느냐?"
"여기 계시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고얀 놈 같으니라고. 이놈을 당장…."

개무시를 당한 수양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당장 끌어내어 목을 쳐라'고 명하고 싶었다.

권력에 빌붙어 야심을 이루려는 자 누구인가?

"한방이 엮어놓은 고구마 줄기를 서서히 당겨야 합니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면 줄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할 때처럼 빨리 죽여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체신을 지키며 천천히 가야 합니다. 이번엔 복위 음모에 연루된 자들뿐만 아니라 상왕도 쓸어 내야 합니다."

어젯밤, 확대 참모회의에서 나직이 속삭이던 귀엣말이 생각났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권력이 커지면 욕심을 내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임금의 국구가 되려는 자의 야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커졌다. 수양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함이 마땅하나 유사가 있으니 이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

피투성이가 된 성삼문이 다리를 끌며 끌려 나가고 하위지와 이개가 그 뒤를 따랐다. 이때였다. 공조참의 이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넙죽 엎드렸다.

"신이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권자신,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자네는 시사를 알고 있는가?' 하기에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지금 상왕을 모실 궁리를 하고 있네' 하였습니다. 신이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박중림과 박쟁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내막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착한 이휘다. 스스로 알아서 기었으니 하나밖에 없는 생명에 충실한 위인이다. 허나 자비는 없었다. 비겁한 자의 특권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거열형을 당하고 말았다. 수양 즉위에 협조한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또 다시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권력무상, 인생무상이다.

"박팽년을 잡아들이고 국청을 준비하라."

본격적인 신문(訊問)을 하겠다는 것이다.


태그:#수양대군,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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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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