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에 걸쳐 있던 태양이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스름 밤. 숙부 수양에게 왕위를 물려준 상왕이 강녕전을 나섰다. 방을 빼라고 다그치진 않지만 새로운 왕이 세워졌으니 임금의 전용 침소 강녕전을 비워주어야 한다.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두운 경복궁. 달빛에 의지하여 수강궁으로 향하는 상왕을 발견한 궁인들이 행랑에 몰려나와 통곡했다. 멀어져가는 상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팽년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린 임금 하나 지켜주지 못한 우리가 죄인이야.""절제대감을 죽일 때부터 그의 흑심을 알아봐야 했는데, 믿었던 우리가 바보일세."집현전 학사를 비롯한 조정의 젊은 관료들은 수양이 김종서를 격살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의중을 반신반의했다. 인사는 이조(吏曹)의 고유권한이다. 임금이 관직을 제수할 때 그들이 세 사람의 명단을 올리면 임금이 한 명을 낙점했다. 6조 중 수석관서이기 때문에 천관(天官)이라 불리며 그 소속 관원들은 전관(銓官)이라 불렸다. 그만큼 그들의 권한은 막강했다.
헌데, 이조에서 올린 명단에 김종서와 황보인이 노란 표를 해서 올리고 임금은 그대로 낙점했다. 정의와 혈기가 살아 있는 젊은 관료들은 이러한 인사행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분노한 그들은 황표정사를 매관매직의 뿌리가 되는 망국적 행위로 규정했다
"수양도 분경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황표정사로 국정을 농단하는 훈구대신들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공적이다.""수양의 초법적 조치는 과격했으나 추이를 지켜보자."대체로 그러한 정서였다. 그 기류의 중심에 신숙주가 있었다. 허나, 수양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자 권력에 빌붙어 출세지향으로 나가려는 자와 왕권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겠다는 절의파로 극명하게 갈렸다.
"도적놈을 주상이라 받들며 살아야 하는 우리가 금수만도 못한 축생이 아닌가? 이 더러운 목숨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겠네."박팽년이 성큼성큼 경회루 못(池)으로 뛰어 들었다.
"이 사람 인수! 왕위가 비록 도적놈 손아귀에 있지만 아직 임금께서 상왕으로 계시니 우리가 살아 있어야 일을 추진할 수 있지 않겠나? 일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네." "도적놈을 도적놈이라 부르지 못하고 주상 전하라 불러야 하는 우리가 가련하다 이 말일세.""자네 심정 낸들 모르겠나?"성삼문의 만류에 깊은 곳으로 향하던 박팽년의 발걸음이 멈췄다. 성삼문이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박팽년이 주먹으로 두 눈을 훔치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성삼문의 손을 잡았다. 밖으로 나온 박팽년을 성삼문이 부등켜 안았다. 젖은 옷에서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없이 껴안고 울었다.
박팽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성삼문이 발길을 멈췄다. 도총관(都摠管)으로 궁에 번 들다가 선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나 몸져 누워 있는 아버지 성승이 생각났다. 발길을 돌려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퇴청이 늦어 문안이 늦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전하는 지금 어디 계시냐?""수강궁으로 가셨습니다.""이런 쳐 죽일 놈…."잠시 일어나 앉아있던 성승이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누웠다.
"내, 이놈을 죽이지 않고는 눈을 감지 못하겠다.""그럴 기회가 올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너무 질질 끌다보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속전속결이 최상의 방책이다.""명심하겠습니다."그놈 상판대기가 쥐 같지 않습니까?박팽년이 통문을 돌렸다. 성삼문과 그의 아버지 성승·유응부·이개·하위지·박쟁·유성원·김질·윤영손·상왕의 외숙 권자신이 은밀한 장소에 모였다.
"우리들의 낌새를 저들이 알았는지 나를 충청감사로 내정했소. 서둘러야 할 것 같소."박팽년이 운을 뗐다.
"명나라 사신이 태평관에 있을 때 주상이 그들을 수강궁 상왕 어전으로 초치하여 잔치를 한다 하오. 그날을 거사일로 잡으면 좋겠소.""주상은 무슨 얼어 죽을 주상입니까? 그 자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자이고 그놈은 왕위를 도적질한 도적놈일 뿐입니다.""옳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 했다고 그자는 도적놈입니다. 그런 놈을 주상이라 불러야 하는 우리가 불쌍하고 우리가 죄인입니다.""그 죄를 씻으려면 그 자를 주상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하고 상왕을 그 자리에 올려야 합니다.""조카의 왕위를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궐에 드나들더니만 용상을 낼름 훔쳐 먹은 그놈 상판대기가 쥐 같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주상이라 부르지 말고 쥐상이라 부릅시다.""하하하.""흐흐흐.""하으, 하으, 하으."팽팽한 긴장이 흐르던 장내에 잠시 웃음꽃이 피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때 운검을 서는 성승과 유응부가 쥐상과 그 우익을 베고 성문을 꼭 닫고 그 졸개들을 소탕하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오.""쥐상과 쥐새끼(世子)는 내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처치하시오."유응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명회와 권람, 정인지는 내가 도륙내어 숭례문밖에 내 걸 것이오."박쟁이 손을 치켜 올렸다.
내 절친이지만 불의와 타협했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신숙주는요?""신숙주는 나와 막역한 사이지만 그의 죄가 가볍지 않으니 베지 않을 수 없습니다."성삼문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죽이면 학문이 아깝지 않소?""학문은 의(義)의 하위 개념입니다. 학문이 아무리 높아도 불의(不義)와 상종하면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그래도 살려서 써먹어야 하지 않겠소?""내가 살기 위해서 친구를 죽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불의와 타협했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숙주나물은 네가 맡아라."유응부가 형조정랑 윤영손을 지목했다.
"육십 년이 아니라 육백 년이 지나도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게끔 천하의 간신 신숙주는 제가 육시(戮屍)를 내겠습니다."윤영손이 손을 세워 칼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이 성공하면 자네의 장인 정창손이 수상이 될 것이다."성삼문이 김질에게 눈빛을 주었다. 김질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거의 같은 시각. 한명회가 수양대군 잠저를 찾았다.
"임금은 임금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하는데 임금이 명례궁에 계시니까 어울리지 않습니다."한명회가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그러이. 이제 차차로 익숙해지겠지.""그래도 임금은 궁에서 주무셔야 임금답습니다.""하, 하, 하. 자네한테 임금이란 소리를 들으니 쑥스럽구만.""소인이 권람의 천거로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저의 가슴에는 전하로 자리 잡았습니다. 전하 아니면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였습죠.""고마우이."수양이 한명회의 잔에 술을 쳤다.
"이번 광연정 잔치는 소인에게 맡겨주십시오.""언제 자네에게 큰일을 맡기지 않았던 일이 있나?""이번에는 특별히 그렇습니다.""무슨 첩보라도 있나?""뭔가 집히는 게 있습니다.""자네 망(網)이 촘촘하다는 거야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망원들이 열심히 뛰어주었을 뿐인데 과한 칭찬을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그래, 뭐라도 걸려든 게 있나?""묘한 것이 포착되었는데 이번에는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릴 것입니다."한명회가 팔을 걷어붙이며 과장된 몸짓을 했다.
"너무 흥분하지 말게.""이 자들이 한명회를 물로 보고 있는데 물맛이 뭔지 제대로 한번 보여주겠습니다.""물맛이라?""지난번에 살생부로 뜨거운 물맛을 보여주었는데 아직도 이 자들이 그 맛을 모르고 있으니 한심한 작자들이죠.""자네만 믿겠네.""잔치가 벌어지는 광연정이 생각보다 좁으니 운검을 폐하시고 때가 때이니 만큼 찌는 듯이 더우니 세자는 시원한 경복궁에 남아 궁을 지키라 하시지요."한명회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명나라 사신을 모신 잔치인데 운검마저 없으면 모양새가 그렇잖은가?""지금 모양 따질 때가 아닙니다.""허, 허. 이 사람이.""먹느냐 먹히느냐 문제입니다.""그렇게 심각한가?""네, 그렇습니다."수양이 소국주를 목에 털어 넣었다.
"자네 말을 따르겠네."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잔을 받게."수양이 잔을 내밀었다.
"앉은뱅이 술을 자꾸 내려주시면 소인 일어나지도 못하고 주저앉습니다.""하하하.""히히히."명례궁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