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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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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우의정 한확, 좌찬성 이사철, 우찬성 이계린, 좌참찬 강맹경을 이끌고 입궐했다. 빈청에 도착한 수양이 승지를 불렀다.

"판서와 참판들은 들라 이르라."

병조판서 이계전, 이조판서 정창손, 호조판서 이인손, 형조판서 이변, 병조참판 홍달손, 병조참의 양정과 도승지 신숙주, 우승지 권람, 우부승지, 한명회가 속속 도착했다.

"금성대군 이유와 영양위 정종이 역모를 꾸미고 있으니 좌시할 수 없다."

수양이 마지막 칼을 빼들었다. 김종서를 참살한 수양은 그를 따르는 세력을 분쇄했다. 동생 안평도 제거했다. 이제 남은 것은 금성대군과 영양위다. 그들 세력이 미미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대권가도에 걸림돌이다. 수양의 지침을 받은 대소신료들이 대전(大殿)으로 몰려갔다.

"혜빈 양씨와 상궁 박씨 그리고 금성대군 이유,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동지중추원사 조유례, 호군 성문치가 난역을 도모하고 이에 참여한 일당이 적지 않으니 죄를 물으소서."

사간원이 가세했다.

"금성대군 이유가 혜빈과 결탁하여 그의 양모 의빈으로 하여금 혜빈궁에 들어가 거처하게 하고 유모를 왕래하게 하여 대전과 내통했습니다. 최근 군사들과 은밀하게 접촉하고 있는 금성대군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나라의 안위가 걱정입니다. 죄를 밝히소서."

사헌부가 지원에 나섰다.

"금성대군 이유가 의빈의 친척인 박문규의 딸과 안평의 처족인 최도일의 딸을 왕비로 세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온갖 계교를 부려 이간질을 일삼았습니다. 부마 정종은 한남군, 영풍군과 함께 금성대군을 추종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며 조유례도 그들의 일당입니다. 청컨대 조속히 그 죄를 밝혀 왕법을 바로 잡으소서."

편액
▲ 정청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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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임금이 의금부에 명했다.

"금성대군을 삭녕으로, 한남군 이어를 금산으로, 영풍군 이전을 예안으로, 영양위 정종을 영월로..."

여기까지 하명한 임금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먹먹해오고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하늘 아래 단 하나 혈육이 경혜공주다. 그 누이의 지아비가 영양위 정종이다. 친형처럼 따랐던 매형을 자신의 손으로 귀양 보낸다는 것이 가슴이 미어져 왔다.

부모 없는 어린 임금에겐 누이가 전부였다. 그 누이가 궐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 누이가 정종과 가례를 올리고 발길이 뜸해졌다. 야속했지만 지아비와 행복하게 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자위했다. 허나, 그것이 입궁을 저지하는 세력의 방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혜빈 양씨를 청풍으로..."

또 다시 임금의 옥음이 끊어졌다. 할아버지 세종의 후궁이지만 엄마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혜빈 양씨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어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임금은 혜빈 양씨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혜빈 양씨 역시 엄마 없는 임금을 아들처럼 보살폈다. 그런 혜빈을 자신이 귀양 보내야 하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상궁 박씨를 청양으로 귀양 보내고 성문치와 이예숭 그리고 신맹지, 신중지, 신근지, 신경지 형제는 고신을 거두어 변방으로 보내 수군에 충군하고 조유례는 고신을 거두어 금옥에 가두어라."

사정전. 편전으로 임금이 정사를 살피던 곳이다
▲ 경복궁 사정전. 편전으로 임금이 정사를 살피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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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마마마 혜빈과 마지막 바람막이 금성대군, 형처럼 의지했던 정종을 귀양 보낸 임금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이러고도 내가 한 나라의 군주인가?"

가슴 깊이 회의가 밀려왔다.

"이 따위 임금 짓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을 욕되게 하고 아버지 문종대왕에 누가 되는 것 아니고 무엇인가?"

회의는 자괴감을 불러왔다.

"이 짓을 내가 계속해야 하나? 안하면?"

자문해보았다. 명쾌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나, 보이지 않은 망막에 죽음의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그래, 살기위해서는 내려가야 한다. 죽어서 내려가느니 내 발로 걸어 내려가고 싶다."

꽉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편액
▲ 사정전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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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을 불러오라."

승전색 전균에게 명했다. 사정전에 불려온 한확이 임금 앞에 엎드렸다.

"내가 나이가 어리고 중외의 일을 잘 알지 못하는 탓으로 간사한 무리들이 준동하고 난(亂)을 도모하는 불행이 종식하지 않으니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하려 한다."

폭탄선언이다. 보위를 넘기겠다는 것이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한 한확은 곧바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영의정이 중외의 모든 일을 다 총괄하고 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대임을 전한다는 말씀입니까? 거두어 주소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결심한 계책이니 다시 고칠 수 없다. 속히 모든 일을 처판(處辦)하도록 하라."

편액
▲ 상서원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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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을 밖으로 내보낸 임금이 승전색 전균을 불렀다.

"상서사 관원은 대보를 가지고 들라 이르라."

명을 내린 임금이 편전을 나섰다. 궁장을 끼고 뚜벅뚜벅 걷는 임금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무거웠고 무거운 것 같으면서도 가벼웠다. 그러나 좌우로 흔들리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얼마가지 않아 경회루에 이르렀다. 루(樓)에 오른 임금이 고개를 들었다. 꽉 막혀 있던 목멱산이 확 트인 것 같았다.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좌(左) 낙산 우(右) 인왕이 그 자리 그대로 있으되 옛 산이 아닌 것 같았다.

자선당
▲ 경복궁 자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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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내로 시선을 돌렸다. 자선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이 태어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생(生)과 사(死)가 함께 한 자선당. 만감이 교차했다. 삶과 죽음, 극과 극인 것 같지만 하나인 것 같았다. 자신이 즉위했던 근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즉위와 선위 그것도 하늘과 땅인 것 같지만 문이라는 상징물을 통하여 통(通)하는 것 같았다.

승전색 전균의 전갈을 받은 동부승지 성삼문이 상서사로 나아가 관원으로 하여금 대보를 받들게 하여 돌아왔다.


태그:#경복궁, #사정전, #상서원, #자선당, #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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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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