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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의 일주문처럼 덩그렇게 서있는 문이 영은문이다. 호암미술관소장
▲ 모화관 절집의 일주문처럼 덩그렇게 서있는 문이 영은문이다. 호암미술관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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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천도를 단행한 태종이 돈의문 밖에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를 짓고 모화루(慕華樓)라 명명했다. 중국 사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장대한 영은문도 세우고 연못도 팠다. 원나라 사신들이 묵던 송도 영빈관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 12년. 이곳에 묵은 중국 사신의 '우리가 상인도 아닌데 루(樓)가 뭐냐?'는 핀잔 한 마디에 모화관(慕華館)으로 문패를 갈아 달았다.

모화관에서 조칙(詔勅) 의식이 거행되었다.

"황제는 조선 국왕 이홍위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이제 너의 처 송씨를 왕비로 삼는다."

이래서 중국 사신을 칙사(勅使)라 한다. 칙서를 가져온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비록 조선에서 천대받던 천민출신이 출세하여 사신이 되어 돌아왔다 하더라도 북경에 있는 황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정과 성과 예를 갖추어야 한다.

가는 사신, 오는 사신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의주대로

조선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정월 초하루 황제에게 세배하러가는 하정사(賀正使). 황제와 황후 생일축하 성절사(聖節使). 황태자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가는 천추사(天秋使). 동지에 가는 동지사(冬至使)를 포함해 년 4사(使)다. 훗날 중국이 번거롭다 하여 하정사와 동지사는 합병했다. 이밖에 사은사(謝恩使). 진하사(進賀使). 고명사(誥命使), 주청사(奏請使). 등등 구실도 많고 이름도 많다.

조선이 사신을 보낼 때는 왕실의 대군이나 부마, 조정의 정승이나 판서급이 정사(正使)의 지위를 맡는 것이 관례였다. 헌데 중국은 그에 상응하는 지위에 있는 인물을 보내지 않았다.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황제국이고 너희는 제후국'이라는 오만함이 깔려 있다. 약소국의 설움이다.

중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할 때는 조선에서 공물로 바친 환관급에서 보냈다. 외교 현안이 있을 때는 조선이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 중에서 골라 보냈다. 조선 길들이기다. 조선 임금을 비롯한 실력자들에게 열패감과 굴욕감을 주어 황실을 우러러보게 하기 위함이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중국의 외교 전략이다.

근정전
▲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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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으로 이동하여 근정전에서 왕비 고명(誥命) 의식이 거행되었다. 왕비가 사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봉천승운 황제는 이르노라. 그대 송씨는 조선 국왕 이홍위의 아내로서 서로 도와 욕됨이 없도록 하라. 그대의 지아비가 이미 왕작을 이어받았으니 그대를 조선국 왕비로 삼는다. 그대는 더욱더 부도(婦道)를 좇아 번가(藩家)를 돕도록 하라."

고명의식을 마친 사신을 수양이 자신의 사저 명례궁으로 초청했다. 때맞추어 도승지 신숙주가 임금이 내린 술(宣醞)을 가지고 사신을 예방했다.

"수양군은 공로가 있기 때문에 국정을 맡겼습니다. 대인께서 내 뜻을 알아주면 기쁘기 한량없겠습니다."
"우리들이 이곳에 와서 수양군의 충성을 보니 진실로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하께서 위임하심은 마땅합니다."

사신 고보가 화답했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수양이 몸을 낮추었다.
"수양군의 공은 천하가 아는 바이며 황제도 다 아시고 계십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수양대군이 머리를 조아렸다.

"수양군이 북경에 왔을 때 급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김종서가 모반하여 변(變)이 생길까 급히 돌아가 난(亂)을 평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심하였습니다. 전후 사실을 조정에서 다 알고 있습니다."
"황제폐하의 덕이 크시고 우리 전하께서 복이 많으셔서 난신들이 주륙된 것뿐입니다. 내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수양군이 아니시면 어떻게 평정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수양군의 공로라 하신 말씀을 황제폐하께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연광정 연회도> 중 부분도. 기생들이 춤을 추고 있다
▲ 잔치 단원 김홍도가 그린 <연광정 연회도> 중 부분도. 기생들이 춤을 추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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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수인사가 끝나고 잔치가 벌어졌다. 풍악이 울리고 무희들의 춤이 어우러졌다. 명례궁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수양군! 청이 있소이다."
"무슨 청이십니까? 하명을 내려주십시오."

수양대군이 정통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선의 실세가 일개 환관출신 사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조선에서 끌려간 천민이라도 의미가 없다. 그는 현재 황제를 대신하여 조선에 왔다. 황제와 같은 예를 갖추어야 한다. 사대하는 약소국 2인자의 위상이다.

"소분하고 싶소."

정통이 고향에 있는 조상의 묘소를 찾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거나 관리가 승차하여 영전했을 때 조상의 묘를 찾아가 인사하는 것을 소분(掃墳)이라 한다. 금의환향(錦衣還鄕)기분을 내보고 싶다는 것이다.

"즉시 행차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튿날. 임금이 직접 정통을 경회루에 초치하여 '잘 다녀오시라'고 다례를 베풀었다. 떠나는 정통을 수양과 예조판서 김조가 홍제원까지 배행하여 전송했다. 관반(館伴) 권준과 별통사(別通事) 전사립이 정통 소분길을 수행했다.

개성에 도착한 정통이 쓰러졌다. 과음 과식에 과로가 겹쳐 병이 난 것이다. 과로가 무엇인지 남들은 모른다. 그가 알고 수청 든 기생만 알 뿐이다. 깜짝 놀란 수양이 판승문원사 송처관과 통사 김자안 그리고 의원 김길호를 개성으로 급파했다.

어의의 극진한 구료를 받은 정통이 몸을 추스려 신천 조상의 묘를 참배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우부승지 구치관과 예조판서 김조가 홍제원까지 나아가 그를 영접했다. 뒤이어 태평관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정통이 수양을 불렀다.

화조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 안귀생 화조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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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금강산이 천하제일이라 들었소."
"동국의 명산입니다."
"계절마다 이름이 다르다면서요?"
"봄엔 봉래산, 여름에는 금강산, 가을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 부릅니다. 사계사색(四季四色)이 빼어난 산입지요."
"가보고 싶지만 일정이 여의치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소."
"어지간하면 가보시도록 하시지요."

수양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다녀온단 말이요."
"어의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북경을 떠나올 땐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부실하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소."

"물을 갈아먹어서 그런가 보옵니다."
"그게 아니라 물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보오. 하으, 하으, 하으."

의미를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웃음소리가 명례궁에 잔잔히 퍼졌다.

"그냥 돌아가시면 평생 후회하실 것입니다."
"이루지 못할 꿈은 빨리 깨는 게 낫다하였소."
"애석합니다."
"금강산 그림이나 구했으면 좋겠소."
"그림 가지고 되시겠습니까?"
"그림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려하오."
"사계(四季) 중에서 어느 걸로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지금 6월에 조선에 있으니 금강이 좋겠지요."
"곧바로 그려 바치겠습니다."

수양이 한명회를 찾았다.

"정통이 금강산 그림을 갖고 싶어 한다. 그릴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화원 안귀생이 있습니다."
"그 자에게 금강산을 그리도록 하되 최대한 날짜를 끌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한명회는 화원 안귀생을 불러 금강산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태그:#칙사, #모화관, #한명회, #수양대군, #금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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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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