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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가에서 없는 법도를 행하는 군부인이 미천한 집에서 시집온 것도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현직 우의정 한확이다. 태종, 세종, 문종 3대 조신이며 중국과도 통하는 명문세도가다.

 

"우선 들어 보자."

 

수양이 며느리를 멀리하며 재촉했다.

 

"제가 낳은 아버님의 손자를 용상에 올리고 싶습니다."

"뭐라고?"

"임금입니다."

 

수양은 귀를 의심했다.

 

"왕이라 했느냐?"

"네, 아버님"

"이거 큰일 날 소리구나. 밖에 누가 들을까봐 걱정이구나."

"그래서 아버님 방에 들어오면서 하인들에게 이 근처는 얼씬거리지 말라 당부하고 들어왔습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도원군을 어좌에 올리고 싶습니다."

 

수양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원군이 누구인가? 자신의 아들이며 마주 앉아 있는 며느리의 지아비가 아닌가? 결국 자신의 남편을 왕을 만들고 자신의 아들을 임금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늘이 두렵구나."

"순리입니다. 흐르는 물길을 막으면 다른 둑이 터집니다. 그 둑이 터지면 감당할 수 없는 해일이 되어 임금도 쓸어버리고 왕실도 쓸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아버님께서는 조카를 지키면 왕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만 어림없는 말씀입니다."

"말이 지나치구나."

"허약한 왕권은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그 허수아비는 제 목숨도 부지하지 못하면서 왕실을 피바다로 만들 것입니다."

"피바다라 했느냐?"

"네 아버님!"

"걱정이 과하구나."

"아닙니다. 아버님! 시기를 놓치면 도원군도 죽고 이제 한 살밖에 안 된 저의 아기도 죽습니다. 저야 관노로 끌려가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저의 아기가 죽는 것은 싫습니다. 제 아기를 살리고 싶습니다."

 

군부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수양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검붉은 피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소인배를 죽였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어젯밤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는 한승지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얘기를 모두 들었구나?"

"제나라 선왕이 물었습니다. '신하였던 탕왕이 걸왕을 몰아냈다고 하는데 임금을 죽여도 괜찮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한다. 이렇게 잔적(殘賊)을 일삼는 사람은 일개 소인배에 불과 하다. 탕왕이 일개 소인배를 죽였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라고요."

"맹자를 읽었구나?"

"네, 아버님!"

당시 아녀자들은 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글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10년이 안되었으니 당연 한글이 아니라 한자(漢字)다. 왕실에서도 종부시 산하에 종학당을 마련하고 왕족 소년들을 가르쳤으나 소녀들은 교육시키지 않았다. 여자들이 글을 모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군부인의 친정아버지 한확은 달랐다. 여자도 글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려서 한자를 익힌 군부인은 범어(梵語)도 통달했다. 이러한 자산이 자양분이 되어 훗날 범어와 한자,  한글로 쓴 불경을 남겼으며 아녀자의 교육지침서 여훈(女訓)을 간행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군주답지 않은 군주는 갈아치워라

 

"덕(德)을 근간으로 한 왕도정치가 군주가 추구해야 할 최상의 가치이며 힘을 바탕으로 한 패도정치는 열등한 하책이며 경멸의 대상이라고 설파한 맹자님도 '군주가 군주다운 행동을 하지 못했을 때는 갈아치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으음!"

"황표정사에 휘둘리는 임금. 국록을 먹는 승지들이 아버님 사랑방에 몰려와 국정을 논한답시고 굽실거리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아버님께서는 어제 세분 승지가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을 흐뭇하게 생각하실는지 몰라도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승지가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궐에서 임금을 보좌해야 하는 관료들이잖습니까? 도승지를 비롯한 좌우승지가 모두 우리 집에 와있으니 누가 임금을 보필한단 말입니까?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으~음!"

 

수양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신숙주, 권람, 한명회 이들 세 사람의 내방(來訪)을 그저 자신에 대한 충성으로만 여겼는데 군부인의 눈에 비친 그들은 그게 아니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며느리의 지적에 뼈아팠고 그렇게 넓고 깊게 보는 며느리의 시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있어서는 아니 될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임금이 허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임금이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러한 군주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백성들은 힘들고 신하들은 핏빛 두려움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임금에게 책임이 있다고?"

"아버님께서 하늘을 속이고 한명회를 속일 수 있어도 저는 속이지 못하실 것입니다. '아버님 눈에는 내가 어좌에 올라가야 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는 정명(正名)의 세계에서 우두머리는 우두머리다워야 하지 않습니까? 왜 자신을 속이십니까? 왜 이렇게 미루십니까? 때가 아니라는 아버님 말씀. 답답해서 제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때가 어디 있습니까? 기다린다고 때가 오는 것 입니까? 때는 잡으면 때고, 행하면 그것이 바로 때입니다."

 

왕실에 집착을 보인 한명회, 한강에 압구정을 지어놓고 암중모색하다

 

이 담대한 여인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수대비다. 그녀는 그의 남편 도원군이 세자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하자 눈물을 머금고 궁에서 나왔다. 이 때 세조가 하사한 집이 명례궁이다.

 

그녀는 명례궁에서 월산군과 잘산군을 데리고 홀로 살면서 칼을 갈았다. 자신의 지아비가 오를 임금의 자리에 시동생이 앉아있고 자신이 올라야 할 왕비의 자리에 동서가 앉아있는 이 엄혹한 현실을 곱씹으며 때를 기다린 것이다.

 

수양에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이 제위 1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녀에게 기회가 왔다. 예종의 뒤를 이을 차기 후보는 당연 제안대군이었다. 그는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였기 때문이다. 허나, 물길은 다른 곳으로 흘렀다.

 

예종이 세자 시절 한명회의 셋째 딸과 가례를 올렸고 그녀가 인성대군을 낳았을 때 제일 기뻐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과거에 급제하지도 못하고 궁지기로 떠돌던 자신이 임금의 할아버지가 된다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허나, 기쁨도 잠시. 한명회의 딸이 산후통으로 죽고 인성대군이 3살 되던 해에 죽어버렸다.

 

민심은 환호했다. '잘 뒈졌다.' '시원하다.' '통쾌하다.'고 박수를 쳤다. 하늘이 진노하여 수양의 큰 아들을 잡아갔고 왕비를 노리는 한명회의 딸을 데려갔다는 것이다. 세상의 손가락질이 한명회에게 쏠렸다. 사람을 많이 죽인 업보라는 것이다. 한명회의 꿈도 사라진 듯하였지만 한강에 압구정을 지어놓고 시름을 달래던 그에게 실오라기 같은 희망은 살아있었다. 또 하나의 외손자였다.

 

자신의 딸을 수양의 아들과 혼인시킨 한명회는 그래도 미덥지 않았다. 해양대군이 병약했기 때문이다. 왕실에 대한 집착이 강한 한명회는 보험 삼아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과 자신의 넷째 딸을 혼인시켰다. 따라서 인수대비와 한명회는 사돈관계다.

 

인수대비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월산군과 자산군이다. 월산군은 처족이 미약하고 자산군의 장인 한명회는 막강 실세 영의정이다. 배경 없는 군주는 식물 임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인수대비다.

 

한명회가 끌고 인수대비가 밀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정치력을 보인 것이다. 임금 후보 3순위에 머물러 있던 자을산군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종이다. 집착이 강한 한명회와 집념의 철녀 인수대비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또 하나는 뭐냐?"

"그것까지 들어주실 겁니까? 아버님!"

 

또 다시 군부인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씀드릴께 꼭 들어주세요. 어머님에게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제가 지난해 큰 아이를 낳았지 않았습니까? 저를 바라보는 어머님의 시선이 따사롭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는 눈도 곱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아이가 어머님의 손자인데..."

 

눈물을 보이던 군부인이 말을 이어갔다.

 

"저와 아기를 미워하나 봅니다. 아버님이 좀 말려 주세요."

 

그랬다. 수양대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이 이제 다섯 살. 며느리가 낳은 손자가 한 살. 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동물적인 감각이 작동한 것이다.

 

명나라 황제의 여인이 된 고모를 닮아 예쁘지. 자신은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지만 며느리는 글을 깨우쳐 똑똑하지, 거기에다 자신이 낳은 아들 보다 더 잘생긴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아놨으니 시새움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손자를 미워하겠느냐?"

"아닙니다. 저는 여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어머님을 존경하고 있으니 내 아이를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세요."

 

이 때였다. 부부인이 예고 없이 방문을 밀고 들어왔다.


태그:#한명회, #수양대군, #압구정, #인수대비,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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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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