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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례궁터에 지어진 궁궐 담장
▲ 궁장 명례궁터에 지어진 궁궐 담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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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정실부인이 아들을 낳으면 대군(大君).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면 군(君)이라 칭한다. 딸도 이에 준한다. 정실이 낳으면 공주(公主), 후궁 몸에서 태어나면 옹주(翁主)라 부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이 출가하기 전까지는 궁에서 살지만 혼례를 올리면 동궁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 세자이외는 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수양대군이 윤번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혼례를 올리자 세종이 하사한 집이 명례궁이다. 집터에 왕기가 서려 세자에게 위해가 된다고 직언하는 신하가 있었지만 풍수지리설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세종은 이를 개의치 않았다.

"사신이 곧 압록강에 당도한다 하오니 누구를 보내면 좋겠습니까?"

신숙주가 수양에게 여쭈었다. 도승지 신숙주가 임금에게 하문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수양에게 한 것이다. 그것도 궁궐이 아니라 수양의 사저 명례궁이다.

"예조 참의 성삼문을 의주에 보내 사신을 선위 하도록 하라."

성삼문은 목에 가시다.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하고 까칠하게 구는 성삼문을 도성에 두지 않겠다는 포석이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중국 땅이다. 사신의 주 교통로였다.
▲ 압록강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중국 땅이다. 사신의 주 교통로였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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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노(家奴) 점복이가 사랑채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대감마님! 군부인 마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지금 삼책(三策)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잠시 후에 부르겠다고 전하라."

수양은 신숙주, 권람, 한명회를 삼책사(三策士)라 여기며 자랑스러워했다. 세 명 중 두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는 이책(二策), 단둘이 있을 때는 한책(一策)이라 농(弄)했다. 그 한 사람이 한명회가 되었을 때는 환상의 조합이었으며 기발한 작명이 된 셈이었다.

안평은 이현로, 김종서는 김승규 한 사람뿐이었으나 자신은 조선 팔도에서 내노라하는 세 사람을 거느리고 있으니 와룡을 얻은 유비가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두 계실 때 뵙기를 원한다 하옵니다."
"이런 난감할 데가 있나?"

짜증스러운 혼잣말에 이어 수양의 목소리가 마당으로 튀어나왔다.

"들라 이르라."

불쑥 찾아온 군부인, '드릴 말씀이 있으니 좌우를 물리쳐 주세요'

군부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조신한 걸음걸이다. 신숙주, 권람, 한명회가 놀란 눈으로 군부인을 쳐다보았다. 치맛자락을 잡고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선녀와도 같다.

"나랏일을 논하는 자리에 아녀자가 끼어드는 것은 도리가 아니오나 아버님께 용서를 빌 일이 있어 이렇게 불쑥 찾아뵈었으니 용서하십시오."

3인방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군부인이 수양대군에게 절을 올렸다. 곱다. 과연 미녀 집안의 후예답게 절하는 뒤태마저 아름답다.

"그래, 용서라는 것이 무엇이냐?"

수양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군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아버님께서 여기 계신 분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용서해 주소서."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고얀 일이 있는가?"

불쾌한 표정이다. 군부인이 다시 일어나 절을 올리려고 손을 이마에 갖다 대었다.

"새아기가 왜 이러냐? 그냥 앉거라."

사대부집안에 없는 법도다. 허나 군부인은 다시 절을 올렸다.

"저는 아버님의 며느리이고 아버님의 손자 정(婷)의 어미입니다. 세작이 아니오니 너그럽게 용서하소서."

팽팽한 긴장 속에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아슬함이 3인방을 흔들었다. 그렇다고 채신없이 웃을 수도 없다.

"누가 널 첩자라 했느냐? 그래,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이냐?"
"아낙은 아낙다워야 한다는 불문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녀자가 외람된 말씀을 드리면 아버님께서는 십분 이해해 주시겠지만 다른 분들은 저어될까 봐 염려되오니 좌우를 물리쳐 주십시오."

당돌하다. 어제 얘기한 것을 엿들었다는 것까지만 공개하고 수양의 3인방을 내쫓아 달란다. 신숙주, 권람, 한명회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가는 한명회와 군부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차갑지 않는 눈길이다.

"그래, 얘기를 들어보자."

멍석을 펴놨으니 마음대로 이야기 해보란 듯이 마음을 풀었다.

권력자의 사랑채도 별로 넓지않다. 대원군의 사랑방 노안당
▲ 사랑방 권력자의 사랑채도 별로 넓지않다. 대원군의 사랑방 노안당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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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
"네, 아버님!"

군부인이 무릎걸음으로 수양에게 다가갔다.

"애야! 이러지 말고 거기 앉아서 얘기 하거라."

수양이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라지만 남녀 사이다. 더구나 며느리는 열여덟 살. 수양대군 서른여덟이다. 충분히 사고가 날 수 있는 나이다. 당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쌍것들은 물론 사대부집에서도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에 간통사건이 비일비재했으며 분노한 아들이 아내를 죽이는 살인사건이 빈번했다.

사고의 첫째 조건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흑심을 품은 시아비는 아내도 없고 아들도 없는 호젓한 시간에 며느리를 불러들인다. 엄격한 가부장제에서 시아버지는 권력이고 갑(甲)이다. 거부할 수 없는 갑의 부름에 마지못해 불려 들어간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느끼한 시선에 쫄아들고 을(乙)이 된다. 부도덕한 시아비가 못된 짓을 저지르는 공식이다. 허나, 오늘은 다르다. 며느리가 먼저 시아비 방을 찾아들어갔으니 며느리가 갑(甲)이다.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으로 이은시사입니다
▲ 사대부집 사랑채 이미지는 기사와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으로 이은시사입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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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아버님두."
"문을 열어 놓아라."

사랑방 문을 열어 놓으라는 것이다. 군부인이 일어나 방문을 열어 놓았다.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말해 보거라."
"하나가 아니라 두 개입니다."
"둘씩이나 된단 말이냐?"
"네, 아버님. 원래는 세 개였는데 두 개는 아버님이 도와주시면 꼭 이룰 수 있는 소원입니다."

말을 마친 군부인이 수양에게 다가갔다.


태그:#수양대군, #명례군, #노안당, #이은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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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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