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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조선은 자전거의 나라였다. 자전거는 자동차 등 다른 교통수단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통근, 통학, 업무, 레저 등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쓰였다. 그 시대 자전거문화는 어땠을까.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앞으로 다가올 자전거 시대에 비슷한 모습으로 재현되진 않을까. 그 시절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본다.-기자 말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도난.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과연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도난.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과연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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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 인지 직후. 살인충동 → 허탈 → 분노 → 살인 충동 → 다시 현실 인정 → 허탈 → 분노→ 살인 충동 × 1주일간 무한 반복.

도난 후 다음날 출·퇴근시 자전거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예비용 철티비(MTB를 흉내 낸 저가 철 자전거)를 타야 한다. 이때 대중교통 이용으로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거나 만원 지하철 등으로 짜증이 밀려오거나, 평소 잘 오르던 언덕도 철티비 때문에 몸이 무거울 때. 살인 충동 →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 → 살인 결의 → 상상 속에서 범인 검거의 뼈와 살을 발라버림 × 2주 안팎으로 무한 반복.

길을 가다 우연히 내 자전거와 같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봤을 때. 그 전에 무슨 일을 하든 온몸의 정신이 그 자전거로 집중됨 → 내 것이 아닐까 희망을 가짐 → 그 자전거가 지나가는 짧은 순간 온 정신을 집중해 혹시 내 자전거인가 특징을 찾아봄 → 정 안 되면 쫓아감 → 본인 자전거가 아닌걸 알고 허탈 → 왜 내가 자전거를 잃어버려야 하나 원망 → 지난 1~2주간 계속되는 사고 후 증상으로 정신이 피폐화 → 단념."

국내 최대 자전거 커뮤니티인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에 아이디 탐험대장(jakeup)이 올린 글의 일부다. 자전거 도난에 대한 후유증으로 엄청난 상실감과 분노가 느껴진다. 대략 자전거 10여 대를 잃어버린 사람으로서 충분이 공감이 간다.

자전거 도난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 당해봤을 정도로 너무나 흔한 일이다. 2010년 오토바이와 자전거 등 이륜차 절도사건은 1만9801건. 2009년(1만6805건)에 비해 3천 건 정도 늘었다. 자전거를 잃어버린 뒤 대부분 "에이, 재수 없어, 다시는 자전거 안 타!" 하면서 포기하고 마는 현실을 고려하면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그러니 자전거도난을 소재로 한 두 영화 <자전거 도둑>(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 1948) <북경자전거>(왕소수 감독, 2000)는 시대를 뛰어넘어 큰 공감을 얻었을 테고, 우리나라에서도 박완서(1931~2011)와 김소진(1963~1997)이란 두 걸출한 작가가 <자전거 도둑>이란 작품을 남겼을 것이다. 아마 아침드라마에서 '불륜'이란 소재만 꺼내들면 기본 시청률은 나오듯이 '자전거 도둑'이란 소재도 그만큼 흡인력이 있다는 걸 대가들이 알고 있었던 것 아닐까.

이걸기 감독은 자전거 연작인 <자전거 도둑>(2006) <시합>(2008)을 통해 자전거 도둑의 세계를 살짝 담은 바 있다. 자전거 도둑은 치밀하게 계획하고 훔치는 부류도 있지만, '이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하며 우연히 '슬쩍'하는 부류들도 있다. 실제 공짜 자전거에 길들여진 탓에 '몇 푼이야 되겠어'라며 자전거 절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게다가 좀 비싼 자전거를 탈 때 주변에서 낯선 사람이 흘깃거리기라도 하면 '혹시 내 자전거를…'이라며 생각하는 심각한 의심증에 빠지기도 한다. <자전거 도둑>이나 <시합>에서 다룬 자전거 절도 대목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실 자전거를 훔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공사현장에서 쓰는 대형 가위만 있으면 일반 자물쇠 정도야 몇 초만에 자를 수 있다. 또한, 자동차만 있으면 통째로 실어서 태운 뒤 도망칠 수 있는 게 자전거다. 혹시라도 자물쇠를 채우지 않았다면 타고 도망치면 그만. 요즘에는 분해해서 필요한 부분만 떼어가는 얌체족들도 느는 추세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잃어버릴 수 있고, 자전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도난사건이 일어날 수 있으니 흔하고 흔한 게 바로 자전거 도난인 것이다.

자전거가 귀하고 가부장의 위엄이 살아 있던 해방 이전도 마찬가지. 날 잡아서 자전거 도난 사례를 찾았는데 어찌나 많던지…. 시초는 구한말로 올라간다. 조선 땅에 자전거가 들어온 게 대략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쯤이니 자전거 역사와 자전거 도난의 역사는 살짝 포개진다.

구한말에 나타난 자전거 도둑, 그 역사 길고도 길다

대한제국 시기 자전거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서양문물을 접한 국내 일부 개화파 인사나 외국선교사들만이 그 귀한 물건을 탈 수 있었다. 영화 <모던보이> 중
 대한제국 시기 자전거는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서양문물을 접한 국내 일부 개화파 인사나 외국선교사들만이 그 귀한 물건을 탈 수 있었다. 영화 <모던보이> 중
ⓒ Kn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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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물포에 거주하는 한 한국 상인이 안경수(1853~1900) 장군을 위해 상해에서 자전거를 구입했다. 그러나 자전거를 전달하기 전에 누군가가 이 기계를 훔쳐 달아났다. 아마도 바퀴는 서울까지 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제조형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안 장군이 그것을 본다고 할지라도 식별할 수 없을 것이다. 독자들께서 잃어버린 바퀴에 대한 어떠한 정보라도 제공해 준다면 상당히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구한말 외국인 공간 정동> 참고)

영자신문 <인디펜던트>에 실린 내용이다. 독립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안경수는 이준용 모역사건과 관련해 1900년에 사형에 처해졌다. 허니 이 기사가 쓰인 시점은 1900년 이전이 되는 셈이다.

1899년 5월 1일 치 <독립신문>에도 운동회 도중 자전거를 잃어버린 서양인 손님 기사가 나온다.

당시 자전거는 조선에 몇 대 안 되는 매우 귀한 탈 것이었다. 당시 자전거 현황을 알 수 있는 매체는 서양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중심이 돼 만든 잡지인 <더 코리아 리포지토리>(The Korea Repository)였다. 1896년 8월호에는 주한 미국공사였던 호러스 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 자전거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는 "조선에는 모두 열네 대의 자전거가 사용 중"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자전거를 탈 만한 조선인이라곤 부유한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서재필이나 윤치호 정도였고, 나머지는 모두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이들 모두 더해도 열 몇 대 정도에 불과한 게 당시 자전거 상황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수입차는 벤츠 마이바흐62로 한 대 가격이 7억 원이 넘는다. 2011년 7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총 49대(법인 소유)가 있다.

당시 자전거를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심정은 우리가 마이바흐62를 보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니 당시에는 자동차나 전차 등 다른 교통수단도 전혀 없었으니 더 놀라웠을 게 분명하다.

어쨌든 자전거가 귀했으니 타는 사람은 뻔했을 테고 파는 것도 녹록치 않았을 터. 잘못 거래하다간 곧바로 도둑임이 드러날 게 뻔한 귀한 물건이었다. 그 당시 자전거를 훔친 이들이 어떻게 자전거를 처리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설마 아무것도 모르고 훔친 채 고철값만 받고 팔진 않았겠지?

어쨌든 UFO(미확인비행물체)만큼이나 신기했을 자전거는 그 뒤 빠르게 숫자가 늘어난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조선 전체에 굴러다니는 자전거는 7만 대가 넘게 된다. 경성에만 약 9천여 대였으니, 이제 극소수 특권층의 탈 것에서 소수 특권층의 탈 것으로 대중화됐다고나 해야 할까.

자전거 대수가 느니 자전거 도난 건수도 덩달아 늘기 시작했단다. 1931년 일본인 집단 거주지인 본정(本町, 현 충무로)에서 도난당한 자전거만 895대로 매일 평균 3대 꼴이었다. 전문털이범이 없이는 일어나기 힘든 수치. 희대의 자전거 도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전문 자전거 도둑 출현, 조를 짜서 움직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자전거 도둑들은 보다 전문화된다. 훔치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역할을 나누고, 몇명씩 뭉쳐서 훔치기도 한다. 영화 <노벨상 메달 도둑> 중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자전거 도둑들은 보다 전문화된다. 훔치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역할을 나누고, 몇명씩 뭉쳐서 훔치기도 한다. 영화 <노벨상 메달 도둑> 중
ⓒ 수만 고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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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월 체포된 김인업은 조선을 종횡무진하며 범죄 행각을 벌였다. 경기도와 함경남도, 평안남도를 누비며 범죄 행각을 벌였으니 활동 범위가 전국구임 셈이였다. 범죄 유형도 강도, 사기, 절도 등으로 화려했다. 시작은 자전거였으니 그가 자전거를 훔쳐서 판 방법을 보면 당시 훔친 자전거를 어떻게 거래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경성의 한 자전거 점포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그 길로 곧장 원산으로 떠났다. 경성과 원산을 잇는 철도노선 거리로만 따져도 223.7km. 자전거 길은 그보다 더 길었을 게 분명하다. 경성에서는 아예 찾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진 원산에 가서 처분한 것이다.

당시 경성에서 자전거를 훔쳐 천안으로 보내려다 잡힌 범인도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자전거 전문 도둑들은 주로 경성에서 훔친 뒤 타 지방으로 보내는 방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자전거 전문 절도범은 팀을 이뤄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1935년 체포된 박부돌 일당이 이에 해당한다. 팀원은 모두 네 명. 부산과 김해 창원 일대에서 활동한 이들은 역시 대도시에서 훔치고 소도시에서 파는 방식을 택했다. 부산에서 훔쳐서 김해로 옮긴 뒤 창원에서 파는 방식을 썼다. 경찰에 잡힐 당시 파악된 자전거대수가 121대였으니 간 큰 절도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자전거를 훔치면 어느 정도 돈을 만질 수 있었을까. 자전거 전문 절도범이었던 허경인은 자전거를 훔쳐 판 돈으로 장가를 가고,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 별다른 직업이 없었는데도 결혼 자금과 생활 자금을 마련했으니 자전거 절도로 생긴 수입이 꽤 쏠쏠했나 보다.

앞서 부산 일대에서 자전거를 훔치다 잡힌 박부돌 일당이 훔친 자전거는 모두 4200여 원 어치였다. 1930년초 쌀 한 가마값은 약 10원 정도. 현재 80kg짜리 쌀 한 가마니 가격은 16만5천 원(2011년 11월 5일 기준)이니 지금 돈으로 치면 7천만 원 정도를 훔친 셈이다.

호사스런 생활을 위해 자전거를 훔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막다른 골목에서 자전거를 훔친 이들도 있었다. 1935년 1월 27일 치 <동아일보>에 보도된 한 부자의 사연이 그렇다.

경성부 외곽 신당리에 살던 13살 소년 정재석은 아버지가 어렵게 행상을 하는 게 안타까웠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먼 길을 다니는 것을 보면서 소년은 "만약 자전거만 있었더라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방법은 알았으나 소년은 어디서 자전거를 구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택한 게 돈을 훔치는 것. 소년은 훔친 돈을 아버지에게 갖다드렸고, 아버지는 그 돈으로 자전거를 사서 행상을 다녔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리 했으나 끝내 아들이 돈을 훔친 게 탄로나 부자는 경찰서에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들 부자가 그 뒤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고단한 조선 백성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전거 주인들은 도난을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을 찾는다. 안전한 자물쇠를 찾거나 특정 부품을 떼어 들고 다니기도 한다. 접어서 아예 곁에 두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덴마크의 한 자전거 회사는 도둑이 자물쇠를 끊으면 아예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을 고안하기도 했단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도난 방지 방법이 나왔는데, 1937년 특허공고를 받은 '명함입자전거차체'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자전거 튜브 속에 자전거를 만든 사람 이름과 소유자 이름을 적는 것이었는데, 도난 방지용이라기보다는 도난 후 찾는 용도였다고 보는 게 맞겠다.

잃어버린 자전거를 3년 만에 찾는 일도 있었으니, 아예 효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귀가 번쩍 뜨이는 대안은 아니었다.

날로 진화하는 자전거 도둑들, 잠금장치만으로는 한계 있어

일본에서 시행중인 자전거 등록제. 우리나라에서도 논의 중이다.
 일본에서 시행중인 자전거 등록제. 우리나라에서도 논의 중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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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잠금장치는 갈수록 발전하고 있으나 자전거를 훔치는 기술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오죽하면 네덜란드에서 자전거 잠금잠치 푸는 법을 알려주는 단체가 나왔을까. 이들은 자전거도난을 막자는 취지에서 이와 같은 행사를 벌였는데, 이유는 훔치는 방법을 알면 더 안전하게 자전거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중국과 일본 정부는 자전거 등록제를 통해 자전거 도난을 예방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전거 등록제 도입 논의가 있었으나 등록방식, 등록비 여부, 등록관할 주체 등 여러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데다 실효성에 대한 의문까지 더해져 결국 도입되진 못했다.

독일의 베를린자전거협회(BBBike)는 자전거 안장에 자전거주인 이름과 생년월일을 크게 새기는 이벤트를 벌여 범인들이 흥미를 떨어트리는 방법을 썼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첨단 도난방지 시설을 갖춘 실내 주차장이 여러 곳 운영된다.

물론 이 모든 방법이 완벽한 것은 아니며, 여전히 자전거 이용 선진국은 자전거 도난 선진국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즐겨 타는 나라들에서 어쩌면 자전거 도난이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1960년대 중반 네덜란드는 야심차게 공공 자전거 2만 대를 풀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모두 도난당해 사업을 중단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대로 먼 기억 속으로 사라졌겠지만, 네덜란드는 달랐다. 숱한 도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자전거를 타기 위한 문화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제일 가는 '자전거 나라'를 만들었다. 물론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된 공공 임대 자전거 사업도 전 세계로 퍼져 몇 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크게 성공을 거뒀고, 국내에서도 창원, 대전 등에서 시작돼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아직도 네덜란드는 도난 천국이다. 네덜란드 소비자운송연맹(ANWB) 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 국민 가운데 26%가 자전거를 도난당했다고 한다. 국민 네 명 가운데 한 명 꼴. 2005년 기준 자전거 도난비율은 4.8%. 2003년 이후 매년 1%씩 늘고 있어 점점 줄고 있는 다른 범죄 비율과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네덜란드 여행을 소개한 가이드북에도 "자전거 도난이 빈번하므로 빌린 자전거를 세울 때는 이중으로 잠금장치를 하고 주차장 바에 고정시키라"고 권고할 정도. 그래도 네덜란드에서 자전거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역시 자전거 나라로 유명한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도 자전거 도난 하면 네덜란드에 뒤지지 않는다. 도난 자전거들을 처리하는 경찰서에서 매달 중고 자전거 경매를 열 정도다. 환경선진국 독일에서도 자전거 도난이 매우 심해 시민단체가 나서 도난방지 이벤트를 열곤 한다.

중요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어떻게 소화하고 이겨내느냐일 게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 자전거 정책은 자동차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게 아니라 생색내기에 그친다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시작은 요란하지만 진행 과정은 그에 미치지 못하며 1년 뒤에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 뒤 지자체장이 바뀌면 오래전 정책을 다시 새로운 것인 양 들고 나와 떠들기도 하고.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멈추지만 않으면 하루에도 100km 정도는 거뜬히 달리는 게 자전거다. 무엇보다 자전거 에너지의 특징은 다른 외부 힘에 의존하지 않고, 달리는 자가발전 에너지라는 점.

소모성 에너지 사용이 전혀 줄지 않는데 자전거만 탄다고 '자전거 선진도시'라 부르긴 힘들다. 그런 눈으로 보면 우리 사회가 자전거 선진국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자전거 도난 때문에 자전거 못 타겠다"고 한다면 자전거 선진국은 신기루일 뿐이고 "자전거 도난이 있더라도 자전거를 탄다"고 한다면 자전거 선진국은 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전자일까, 후자일까. 10년 뒤면 알 수 있을까.


태그:#자전거, #자전거도난, #자전거절도, #자전거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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