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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전 KBS사장이 제46주년 방송의 날인 2009년 9월 3일 오후 서울 명동거리에서 열리는 언론악법 원천무효 서명운동에서 시민들에게 직접 동참을 호소하기 위해 참석했다. 서명대 주위 가로수에는 정연주 전 사장이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시절 최초로 사용한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단어가 포함된 구호가 붙어 있다. (자료사진)
 정연주 전 KBS사장이 제46주년 방송의 날인 2009년 9월 3일 오후 서울 명동거리에서 열리는 언론악법 원천무효 서명운동에서 시민들에게 직접 동참을 호소하기 위해 참석했다. 서명대 주위 가로수에는 정연주 전 사장이 한겨레신문 논설주간 시절 최초로 사용한 '조중동'(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단어가 포함된 구호가 붙어 있다. (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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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배임죄'와 관련된 검찰 조사와 재판 전 과정을 거치면서 내 머리에서 늘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정치 검찰과 조중동, 어쩌면 이리도 닮았을까'하는 것이었다. 전체는 보지 않고 자기들 구미에 맞는 것만 골라서 보고, 그것만 가지고 기소하고, 기사 쓰고 하는 게 영락없이 일란성 쌍둥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증언'에서 밝혔듯이 KBS와 국세청 사이에는 1994년부터 소송이 시작되었고, 특히 1999년부터 시작하여 2005년 말 서울고등법원의 조정으로 세금 분쟁이 해소될 때까지 모두 17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이 17건의 재판 결과는 KBS 입장에서는 7승9패(1개 사건 미판결)였다.

제 입맛에만 맞게 한 쪽만 쳐다보다

그런데 KBS가 승소한 경우도 실제 판결 내용을 보면, KBS가 이긴 게 아니다. KBS가 내건 핵심 주장은 모두 배척됐다. KBS는 법인세의 경우 "수입은 전체 수입에서 수신료 수입은 제외한 것으로 잡고, 비용은 분리할 수 없으니 '모든 비용'을 다 손금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KBS의 수입구조가 재판 당시 대략 수신료 40%, 광고료 60% 비율이었으니 수입은 60%만 계상을 하고, 비용은 몽땅 손금 처리를 하면 수익은 항상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법인세를 한 푼도 안 내도 된다는 것이었다. 부가세도 마찬가지였다. 매출 세액에서 '모든 매입세액'을 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KBS가 패소한 건은 말할 필요도 없고, 승소한 7건의 경우에도 법원은 단 한 차례의 예외 없이 KBS의 핵심 주장인 이 부분을 모두 배척했다. 판결문들은 한결같이 "수신료 수입을 제외한 익금에서 모든 비용을 손금으로 처리한다"(법인세)거나, "매출 세액에서 모든 매입세액을 공제한다"(부가세)는 주장을 모두 이유 없다고 배척했다.

이처럼 KBS의 핵심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KBS에 '승소' 판결을 내린 이유는 "당사자가 제출한 자료에 의하여 적법하게 부과될 정당한 세액을 산출할 수 없어서, 과세처분 전부를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추계과세라는 방식을 재부과 방법으로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승소' 판결의 핵심 사유는 '당사자'(이 경우 국세청)가 정당한 세액을 산출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으니 과세처분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국세청이 과세처분에 대한 입증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KBS가 '패소'한 경우에는 입증 책임이 KBS에 있는데, KBS가 '정당한 세액 산출을 위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으니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같은 사안을 두고 '입증 책임'이 어느 쪽에 있느냐에 따라 재판부의 판단이 달랐고, 이에 따라 승패가 엇갈렸다. 그러니 KBS의 '승소'는 진정한 의미의 승소가 아니었다. 특히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KBS 핵심 주장은 모두 배척되었고, 설령 '승소' 판결에 따라 과세 처분이 취소된다 해도, 판결문에 '추계과세에 의한 재부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니, 사건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국세청은 무슨 방법을 쓰든 재부과를 할 게 분명했다. 이익이 발생하는 법인에 대해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면 스스로 징세권을 포기하는,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검찰은 이 부분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국세청의 재부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보았다면, 배임죄는 성립 불가능한데, 그들은 그 가능성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와 관련하여 검찰이 얼마나 무리하게 일방적으로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율스러운 증언'이 1심 재판과정에서 나왔다.

2008년 6월 13일 저녁 여의도 KBS앞에서 이명박 정권 공영방송 장악음모 저지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 시민들이 '퇴진 최시중, 사수 정연주'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2008년 6월 13일 저녁 여의도 KBS앞에서 이명박 정권 공영방송 장악음모 저지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 시민들이 '퇴진 최시중, 사수 정연주'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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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와 부가세 조정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던 고아무개 당시 국세청 법무2과장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을 때 그는 놀라운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검찰 조사 때, KBS에 대한 재부과 여부와 관련하여 그것이 '불가능하냐' '현실적으로 어려우냐'를 가지고 무려 4시간 동안 씨름을 하면서 시달렸다고 증언했다. 검찰은 '불가능'을 원했다. 그래야 배임죄를 성립시킬 수 있으니까.

1심 재판정에서 나온 '전율스러운 증언'

그런데 국세청 담당 과장은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답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했다. 이 말은 세금을 재부과하는 게 쉽지야 않겠지만, 국세청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방법을 찾아낼 수가 있다는 말이었다.

고 과장은 변호사 출신이다. 그는 '불가능'과 '현실적으로 어렵다'의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찰은 그를 상대로 무려 4시간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툼을 했다.

고 과장 외에 다른 국세청 실무자들도 "방법을 찾는다면 재부과할 수 있다"는 증언을 검찰 조사 때 이미 여러 차례 했다.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수사기록에 이런 주장들이 모두 나온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런 증언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구분경리가 어렵다는 KBS의 특수성으로 재부과는 불가능하다는 쪽의 논리만을 내세웠고, 그것을 근거로 배임죄를 뒤집어 씌웠다. 내 사건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일방적인 주장뿐 아니라 그밖에도 '세상에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그런 논리로 정치 검찰은 나를 배임죄로 엮었다. 공소장의 일부를 한번 보자.

"KBS는 당초 수신료를 방송 용역의 대가로 간주하고 사업을 진행하여 온 관계로 비영리 사업과 수입사업에 관한 구분경리를 하지 않았으므로, 과세관청은 상급심에서도 위 손금과 매입세액을 명확히 특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공사의 특수성으로 인해 추계과세 방법에 의한 재산정 가능성도 거의 없어, 상급심에서도 공사의 승소가 매우 유력하여 공사로서는 최소한 1심 승소금액인 1764억 원 상당을 국세청으로부터 환급받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 검찰 수준을 보여주는 공소장의 일부다. 이것이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고, 3년 반 동안 사법적으로 나를 옭아매어 온, 그래서 나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시간을 빼앗고 자원을 낭비하게 한, 그리고 나의 강제 해임의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인 '개인 비리인 배임죄'의 핵심 전제가 된, 검찰 논리의 대전제다.

정치 검찰의 수준 보여준 공소장 내용

위에 적은 검찰 공소장의 핵심은 이렇다. KBS가 수신료 수입과 광고료 수입을 구분 경리해 오지 않은 '공사(KBS 지칭)의 특수성'으로 인해, 1심 승소가 그대로 유지되어 상급심인 2심과 대법원에서의 승소가 '매우 유력'하며, 그렇게 판결이 확정되면 '공사의 특수성으로 인해 추계과세 방법에 의한 재산정 가능성도 '거의 없어'', 사건이 종결 처리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배임죄 구성에서 배임액수는 이처럼 대법원 확정 판결이 '매우 유력'하고, 재부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그런 추론에 근거한, 그래서 아직 실현되지도 않았으며, 실현될 가능성도 없는 주관적 추론에 근거하여 마련되었다. 그게 1892억 원이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2010년 10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뒤 법원을 나서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세금 소송을 중단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사장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2010년 10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뒤 법원을 나서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세금 소송을 중단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정 전 사장에게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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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이없는 공소장이었다. 엄격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공소장이 너무도 주관적이고 흐리멍텅했다.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게 하는 배임죄인데, 그런 죄를 성립시키려면 100% 확실하고 객관적이어야 했다. 1심 승소가 대법원에서도 그대로 승소할 확률이 100% 확실해야 하는 것이고, 세금 재부과도 100% 가능성이 없어야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정치 검찰의 공소장은 대법원 승소도 '매우 유력'하다는 것이고, 세금 재부과 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주관적 추론에 따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배임)'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이 나를 옭아맸고, 그것은 나의 해임에 핵심 요인이었다. 정치 검찰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성공했다. 나의 해임이라는 정치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정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동원된 기소의 내용이나 표현, 논리의 근거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정치 검찰의 수준을 보여준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인 사례다.

바로 그랬기에 이런 정치 검찰의 주장은 1심과 2심 재판부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배척되었다. 특히 1심 재판부의 판결은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 정도로 자세하고 구체적이었다. 1심 판결문은 검찰 공소장을 조목조목 나무라면서 검찰을 기소하듯 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판결문 본문만 A4 크기로 78쪽, 첨부 자료 87쪽을 합치면 판결문은 모두 165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태그:#정연주, #KBS, #정치 검찰, #국세청, #배임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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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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