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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에 따라 북한이 장례식때까지 13일간 애도기간에 들어간 가운데 22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마을 대형 인공기가 조기로 걸려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에 따라 북한이 장례식때까지 13일간 애도기간에 들어간 가운데 22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마을 대형 인공기가 조기로 걸려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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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는 항상 후계자 문제가 신경 쓰인다. 북한에서 1994년 김일성이 작고했을 때와 같이 지금 김정일이 갑자기 사라진 이후 그 후계 체제가 과연 어떻게 정립될지를 두고 첨예하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일성은 생전에 후계자 김정일에게 충분한 수업을 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아들 중에서 막내를 골라 맡기면서도 후계 수업이 모자랐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중론이다.

권력이란 부자간에도 나누기 어렵다. 하물며 독재 권력자가 후계자를 키워놓거나 지명하는 일은 인류 역사에 없는 일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 손자인 정조에게 후계 수업을 시킨 것은 어쩔 수 없는 명분 때문이었고 또 그가 수렴청정한 것도 엄연한 권력행사에 속한다.

박정희도 후계자 문제로 화를 많이 끓였다. 조카사위이며 쿠데타 동지인 김종필을 감시하며 견제했다. 후계자는 미래 권력이기 때문에 미리 힘을 가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임자의 권력 수명을 단축시킬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의 성격을 잘 아는 김종필은 크게 당하지 않고 그런대로 견뎌냈다. 박정희의 후계 문제로 가장 크게 파란을 일으킨 것은 당시 권력 실세 중 한 사람이던 윤필용이었다.

1973년 3월 2일 점심시간, 보안사 간부식당.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부하들과 식사 중이었다. 참모장 김귀수 준장(육사 9기), 보안처장 김종진 대령(종합 6기, 준장 예편), 정보처장 김병주 대령(현임, 소장 예편), 비서실장 박영선 대령(육사 11기), 연구발전실장 정상문 대령(육사 12기) 등이 함께 자리했다. 막 식사가 끝날 무렵 강 사령관의 전속부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와 그에게 쪽지를 전했다. 강 사령관은 즉시 집무실로 올라갔다. 곧 청와대 전화가 연결됐다. 대통령의 전화였다.

"강 장군이야? 지금 좀 들어오지."

"측근들 좀 단속하셔야겠습니다"

평소에도 대통령의 전화가 가끔 있었지만 이날 그의 말씨는 전과 달랐다. 그는 으레 "임자야…"로 통화의 서두를 뗐다. 강 사령관은 대통령이 '강 장군'이라는 사무적인 호칭을 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뭔가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니 박 대통령이 점퍼와 목이 긴 구두 차림으로 말총 채찍을 들고 김정렴 비서실장, 박종규 경호실장과 함께 있었다. 박 대통령은 노기등등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강 사령관에게 한 장짜리 보고서를 던지듯 내밀었다.

"이거 읽어봐."

강 사령관이 보고서를 읽으며 긴장하는 순간 박 대통령의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보고서는 박종규 실장이 손으로 쓴 것이었다.

"그런 얘기 들은 일 없나?"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보고서의 내용은 수경사령관 윤필용 소장이 박 대통령의 퇴진을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증언자는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이었다. 신 사장은 공화당 대변인,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장관을 거쳤으며 박 대통령에게는 몇 명의 민간 출신 측근참모들 중 한 사람으로 자주 만나는 골프 파트너였다. 분위기를 보니 박 대통령이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 두 핵심측근과 이미 방침을 정한 것 같고 일은 크게 벌어진 양상이었다.

이보다 하루 앞선 3월 1일 오후, 박 대통령은 이른 봄의 공휴일을 즐기기 위해 경기도 고양에 있는 뉴코리아 컨트리클럽으로 나갔다. 한 해 전 10월 17일 유신헌법을 선포한 후 4개월여의 긴장도 풀 겸 모처럼 만에 골프장을 찾은 것이다.

박 대통령은 부담 없는 파트너로 신 사장,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그리고 어차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택했다. 골프가 끝나고 네 사람은 클럽하우스에 둘러앉았다. 박 대통령이 이따금 찾는 고양 원당의 찹쌀 막걸리가 두어 순배 돌았을 때였다. 신 사장이 박 대통령에게 한 잔 따라 올리면서 말했다.

"각하, 건강에 더욱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그리고 측근들을 좀 단속하셔야겠습니다. 오히려 측근들이 각하의 퇴진 문제를 얘기하고 다닙니다."

이 말에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민감한 대목을 건너뛴 채 말을 가로막았다.

"왜 내 건강이 어때서… 거, 오랜만에 막걸리 한 잔 하는데 술맛 떨어지는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고."

그러나 박 대통령의 표정은 변해 있었고 시니컬한 투로 내뱉었다.

"이젠 퇴진하고 후계자를 내세울 때가 됐어."

다음 날 11시가 조금 지나 박 대통령은 박종규 경호실장을 불렀다.

"어제 그 신범식이 얘기가 무어지, 어디서 나온 말이야?"

박정희는 '퇴진'이란 말을 밤새 곱씹어본 게 분명했다. 그의 심중을 읽는 데 1인자인 박 실장은 문제가 심각한 국면으로 들어갔음을 직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냥 넘어갈 얘기가 아닌 것 같아서 오늘 아침 신 사장을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유신체제 출범 후 최대 권력 파쟁인 '윤필용 사건'의 시작

 1973년 4월 29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 위반 행위에 대한 선고에서 '윤필용 사건'의 당사자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맨 오른쪽)이 재판 내용을 듣고 있다.
 1973년 4월 29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 위반 행위에 대한 선고에서 '윤필용 사건'의 당사자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맨 오른쪽)이 재판 내용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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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는 신 사장을 불러 경위를 조사한 보고서 한 장을 대통령에게 건넸다. 보고서를 읽은 대통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손을 가볍게 떨었다. 유신선포의 어려운 고비도 어느 정도 지나고 튼튼한 장기집권의 기틀이 잡혀가는 것으로 생각해온 그였다. 자신의 퇴진 얘기가 측근 권력자들 사이에서 나돈다니 참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미 4~5년 전부터 군부 내에서 세 과시가 심하다는 정보보고가 많았던 윤필용이 혐의자가 아닌가.

박종규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유신이 선포된 직후인 1972년 10월 말, 신범식은 청와대와 수경사 간부 중 친한 사람 몇 명을 서울 한남동의 어느 요정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는 윤필용 수경사령관과 수경사 헌병대장 출신으로 육본 범죄수사단장인 지성한 대령, 정소영 청와대 경제수석, 김시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이 참석했다. 청와대 근위부대 간부들과 수석비서관들이 한잔 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윤 수경사령관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겨우 이기지 않았는가. 이렇게 가다가는 언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갈지 알 수 없다. 이제 각하가 더 노쇠해지기 전에 퇴진하고 후계자를 내세울 때가 됐어."

1971년 4·27 대선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게 예상을 넘어선 근접전을 벌인 것은 사실이다. 김 후보가 539만5900표, 박 후보가 634만2828표로 표차는 94만여 표였지만 중앙정보부와 보안사가 나서 온갖 정치공작을 다한 끝에 얻어진 결과가 이 정도라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핵심일수록 위기감이 더했다. 이 대선에서의 악몽이 박정희로 하여금 유신 선포를 결심하도록 작용했다. 대통령 직접선거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그 유신헌법이 선포된 직후에 자신의 퇴진 얘기가 나왔다는데 박정희는 더 독기가 올랐다. 박종규는 "다 잡아들여 조사할 것"을 건의했다. 박 대통령이 김정렴 비서실장을 불러 의견을 묻자 김 실장은 "윤 사령관이 군인신분이니 원칙적으로 보안사에 조사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강 사령관에게 전화한 것이다.
박종규의 조사보고서를 읽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 강 사령관에게 박정희는 따끔하게 한마디 했다.

"보안사가 그런 것도 파악 못하고 앉아 뭐했나?"

강 사령관은 대통령의 노기등등한 모습에 불똥이 자신에게 떨어질 것 같아 불안했다.

"강 장군이 윤필용이와 동기지?"
"네, 그렇습니다."
"친한 사이인가?"
"… 동기라서 잘 알지요."

대통령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이것은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야. 사사로운 관계를 떠나 철저히 조사해서 단시일 내에 보고해."

그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언젠가 전두환이도 와서 윤필용이 얘기를 한 일이 있어. 지금 생각해보니 같은 얘기야. 전두환이한테도 자세한 내막을 들어보고 조사에 참고하도록 해."

이리하여 유신체제 출범 후 최대 권력 파쟁인 '윤필용 사건'이 시작됐다. 대통령 앞을 물러 나오며 강창성은 불과 1년 반 전 정가를 뒤흔들었던 1971년의 10·2 항명파동을 떠올렸다. 권력자 박정희의 냉혹성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아무리 총애했던 측근이라도 심기를 건드릴 경우 가차 없이 징벌했다. 오치성 내무장관의 국회불신임안 표결에서 일사불란하게 반대표를 던지라는 지시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중정에 끌려간 당시 공화당의 거물 김성곤 의원은 콧수염을 반쯤 뽑힌 채 나온 후 정가에서 사라졌다. 길재호 의원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몸이 됐다. 그 이후 다시 윤필용이 박정희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피바람이 불게 되었다.

육영수 "윤 장군이 우리한테 그럴 수가..."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사건을 손대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엄명이 떨어졌으니 조사를 적당히 할 수도 없다. 또 사건의 성격상 윤필용 수경사령관 본인을 소환해 조사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는 지금까지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한 실세. 더구나 자신과는 육사 동기다.

강창성은 아무리 궁리해 봐도 이 사건이 '박정희 패밀리'의 친족분쟁 성격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 권력구조에서 자신이 윤 사령관을 조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과의 관계로 봐서 윤 사령관이 더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그 사이를 자신이 파고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대통령이 조사 지시를 내린 3월 2일 당일 퇴근시간을 한 시간여 앞두고 강창성은 윤필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장군, 오늘 저녁에 무슨 긴한 일 없지? 퇴근길에 내 사무실에 잠깐 들러 차나 한 잔 하고 가지?"

윤필용은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쾌히 응낙했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으로 있을 때 심하게 파워게임을 벌였던 윤필용은 1971년 9월 김재규의 후임으로 동기생인 강창성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하자 보안사와의 관계를 개선했다. 강창성은 부임 사흘 만에 수경사를 방문했고, 윤필용은 전 참모들을 현관 앞에 도열시켜 그를 맞았다. 부대현황도 브리핑하게 했다.

당시 군의 중추세력인 육사 8기에서 최선두주자였던 두 사람은 긴밀히 협조해나가자고 굳게 악수했다. 1964년에 처음으로 별을 단 육사 8기는 강창성, 윤필용, 이범준(중장 예편, 해운항만처장 지냄), 정득만(소장 예편, 주월 맹호부대장 지냄) 등 4명이다. 그런데 소장 진급에서 차이가 생겼다. 1968년 1차로 윤필용, 이듬해 2차로 강창성, 그리고 그 후에 이범준, 이재전(중장 예편, 청와대 경호차장 지냄), 이희성(대장 예편, 12·12 직후 육참총장), 진종채(대장 예편, 보안사령관 지냄), 차규헌(대장 예편, 교통부장관 지냄) 등이 소장을 달았다.

육사 8기의 두 실력자가 손잡은 얼마 후 수경사를 관장하는 506보안부대장에 윤필용 직계로 널리 알려진 정동철 대령(육사 12기, 노동부차관 지냄)이 임명됐다. 정 대령은 변방의 군단 보안부대장을 하다가 최고 요직 중 하나인 506부대장에 기용된 것이다. 윤필용의 직계 부하에게 윤필용 동태감시를 맡긴다는 뜻이었다. 이는 윤필용에게 강창성이 유화 제스처를 보인 것으로 보안사 내부에서도 윤필용에 대한 보안사의 무장해제란 말이 나왔다. 술자리에서 윤필용이 토로했다는 '불경 발언' 등이 보안사령부에 정보보고가 되지 않은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강창성은 윤필용이 찻잔을 비우자 박종규 경호실장이 대통령에게 올린 사건의 경위조사 쪽지를 내밀었다. 박종규가 신범식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경위조사서를 읽은 윤필용은 펄쩍 뛰었지만 얼굴이 붉어졌다.

"윤 장군, 내가 아직 구체적으로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네. 각하가 화난 표정이 보통이 아냐. 그러니 누가 봐도 각하와 윤 장군 사이 일에 내가 끼어들 필요가 있겠나? 내가 내일 아침에 각하를 뵙고 술자리 실언 정도로 말씀드릴 테니 오후쯤 윤 장군이 직접 청와대에 들어가 각하 앞에서 빌고 노여움을 풀면 되지 않을까?"

윤필용은 이 제안에 선뜻 응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묵묵부답인 채 듣기만 했다.

"나로선 강 장군이 하는 대로 맡길 테니 잘 처리해주기 바라네."

다음 날 오전 11시경, 강창성은 대통령에게 보고 차 청와대로 올라갔다.

"각하, 어제 즉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윤 소장이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런 불경스런 얘기를 입 밖에 냈는지 저도 잘 납득이 안 갑니다."

강창성은 대통령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데 주력했다.

"윤 장군이 원래 좀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아닙니까? 특별한 생각을 갖고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본인도 경솔한 행동에 크게 반성하고 각하께 무릎 꿇고 빌겠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에라도 불러 한번 단단히 야단을 치시고 용서해주시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박정희는 벌컥 화를 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내가 윤필용일 몰라서 그러는 줄 아나? 관련자를 다 잡아들여 철저히 조사해서 보고해."

강창성은 뒷골에 한기를 느꼈다. 박정희는 점심이나 먹고 가라며 강창성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막 만둣국을 뜨려는데 위층에서 영부인 육영수가 내려와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거들었다.

"강 장군님, 윤 장군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 집에서는 지만이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을 찾는다면 윤 장군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배신감 같은 것을 토로하는 육영수의 말투에서 강창성은 사건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들어갔음을 느꼈다.

덧붙이는 글 | 북한 김정일의 사망 후 생각나는 것이 권력 후계 문제다. 남한도 권력 후계 문제로 큰 파란을 겪은 경험이 있다. 박정희가 가장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퇴진'과 '후계'라는 말이었다. 어느 세력, 누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정보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지냈다. 민주 정부라면 불필요한 권력 낭비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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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등 역임.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