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몹시 주관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서래마을 사람들을 검색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산불조심을 아는 사람은 서래마을에 사는 사람이고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쓰고 보니 진짜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턴가, 한 1년 전인 거 같다. 동네의 구석진 빈 곳에 난초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밑에는 언제나 산불조심이라는 글자와 함께. 처음에는 서너 군데 아주 한가한 곳에 보였을 뿐인데 서너 달이 지나더니 그림의 종류가 늘어났다. 대나무도 보이기 시작하고 화분이 있는 난초도 나타났다.

 

언제 누가 무엇으로 그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근데 이 산불주의에는 어떤 룰이 있다. 우선 아주 부자집 담에는 안 그린다. 애써 지우려면 지울 수 있는 물감을 쓴다. 사군자처럼 검정색을 사용한다. 새로 막 지은 건물에는 그리지 않는다. 주로 애매모호한 곳, 허전한 곳을 고른다.

 

최근에 들어와 산불조심 작가가 대담해 졌다. 약국 옆에 여섯개 짜리 연작시리즈를 완성시켰다. 어느 뒷골목에는 두 마리 자라를 그린 산불조심도 등장했다. 그건 어쩜 산불조심의 아류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흉내 내느라 그린 것일 수도 있고. 하여튼 이제 서래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산불조심을 보는 것 아주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이 일취월장까지는 아니라도 조금씩 대담해 지고 스킬이 늘어나는 게 관람자로서 재밌다.

 

유럽도시들에 흔한 그래피티에 비해 서래마을의 난초 산불조심은 훨씬 다정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이 있다. 골목을 돌아서 전봇대 뒤로 흘낏 난초 한포기와 어눌한 글씨로 쓰여진 산불조심을 보는 순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동네 아저씨가 '어디 다녀오세요?'하고 말 거는 것 같기도 하고... 문화가 별건 아니다. 이렇게 내 마음을 슬쩍 건드려주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 그 정도면 족하지.

 

은근히 산불조심님의 다음 버전을 기대해 본다.

 

몇 주일 동안 몹시 바빠서 낮에 집 근처를 돌아다닐 시간이 없었던가, 어쩜 낮에 돌아다니면서도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수요일 미팅 이후에 산불조심님의 최근 작업을 보려고 일요일 오후 동네를 돌아다녔다. 뭔가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동네 사람들과 산불주의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약국 옆 연작 시리즈는 외벽을 바꾸는 약국주인의 과감한 투자 덕분에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저기 많은 벽에 난초를 지우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산불주의 쪽의 대응도 있는데 은근한 자리를 선택하던 취향이 대놓고 한다 쪽으로 바뀌어 버렸다.

 

값비싼 석재 벽에도 대담하게 그려 놓았다. 서래마을의 중심지 스타벅스 대리석에도 난초그림이 버젓이 올랐다. 마치 너희가 반대하면 나는 더한다. 뭐 이런 뉘앙스다. 난초치는 실력도 많이 늘고 과감해 졌다. 꽃은 특별히 보라색을 쓰기도 하고 크기도 20% 정도 키웠다. 약간 신경질적인 이미지도 생겼다. 대신 산불조심이라는 뜬금없는 메시지는 사라졌다. 중요한 대목이었는데.

 

양쪽의 긴장 관계는 은근히 서래마을의 그래피티를 즐기고 감상하는 나에게 새로운 관전 포인트를 제공한다. 누가 이길 것인가? 사람들은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갑자기 반대로 돌아선 이유는 뭐지? 아마 사람들은 이 것이 문화 또는 예술행위가 아니라고 결론지은 것 같다. 어떤 근거가 있었던 건 아닌 거 같고. 이 고상한 마을에 화토장 같은 그림은 안되지. 이런 거 겠지.

 

산불조심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 새벽 어느 골목길에서 기다려 볼까? 폐쇄회로 카메라를 이용해서 찾을 수도 있을 테고. 어슴프레한 새벽 길거리에서 한창 작업중인 그를 만나면 빙그레 웃으며 말해주고 싶은데.

 

"난 니 편이야."

 

첨부파일
산불조심.docx

덧붙이는 글 | 첨부된 파일대로 사진을 붙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그:#서래마을, #그래피티, #사군자, #산불조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며 인테리어 디자인과 디자인 컨설팅 분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통건축의 현대화와 중국전통건축에 관심이 많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