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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국회에서 신민당 의원 조윤형이 정인숙 사건에 대한 풍자 가요를 낭송했을 때는 청와대 안방에서도 이미 그 문제로 '육박전'이 한 차례 크게 벌어진 뒤였다. 육박전이란 육영수와 박정희의 부부싸움을 시중에서 그 성인 '육'과 '박'으로 희화화한 조어.

정인숙이 관계를 맺은 권력자 26명의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고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에 관한 풍자 노래가 널리 알려지자 육영수는 참지 못하고 박정희에게 대든다. 사실여부를 따지면서 부부싸움은 험악한 양상으로 비화했다. 박정희는 화가 나서 재떨이를 던졌으며 이것이 육영수의 얼굴에 맞았다. 육영수의 눈자위에 푸른 멍이 든 것을 외부에서 온 여성계 방문객과 청와대 출입기자 일부가 목격했다. 이것이 바깥에 알려지자 '육박전'이라는 풍자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경찰이 정인숙의 집을 뒤져 발견한 수첩과 장부에는 그녀가 관계해 온 것으로 믿어지는 유력인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거기엔 일시와 장소까지 함께 기록돼 있었다.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경호실장 박종규, 그리고 장·차관과 군 고위장성, 5대 재벌그룹 회장과 거물급 국회의원 등 주요인사 26명을 비롯해서 당시 힘깨나 쓴다는 실력자 수십 명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정인숙 수첩에 적힌 이름들이 김지하 담시 '오적'으로

 지난해 봄과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를 계기로 신작 시집 <못난 시들> 펴낸 김지하 시인. 그는 순수했던 '촛불'은 우주적 사건이라고 평가했지만 촛불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변질된 부분에 대해선 아쉬워하며 이 다음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하 시인(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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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명단이 김지하의 시상(詩想)을 자극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이 당시 특권층 '오적(五賊)'이었다. 정인숙 사건은 풍자 노래 뿐 아니라 사회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담시와 신문 연재소설에서도 소재가 돼서 꼬리를 물고 파장이 커졌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다.
오적은 당시 권력층의 부패상을 전통적 해학과 풍자로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꽤 긴 시다. 이로 인해 담시라는 독창적인 시 장르가 생기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썩어가는 사회적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에 바로 정인숙의 이름이 등장한다.

"… …
또 한 놈이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 거리며 나온다
털 투성이 몸둥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일성, 쭉 째진 배암 혓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은 신악으로! 개조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이닷, 빈농은 이농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사회 정화닷, 정인숙을,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 … "

담시 오적은 국회의원을 5·16 쿠데타집단과 동일시한 것 같다. 사회정화를 정인숙 사건처럼 하라는 것은 눈엣 가시같이 굴면 없애버린다는 얘기다. 오적은 특히 개발독재 아래서 권력집단과 특혜 층을 5개 그룹으로 정하고 그들의 행태를 풍자했다.

이들의 한자 표기를 모두 개 견(犬)자가 들어가는 독특한 한자로 써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등장시켰다. 짐승과도 같은 다섯 도적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질대회를 벌이는 것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면서 고대 의인소설처럼 이들을 차례로 풍자해 나간다. 오적이라는 제목은 을사국치조약 때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서 따 온 것이기도 하다. 다섯 짐승들에 대한 첫 머리 묘사만 들여다 보면 이 담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을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해 입고 돈으로 모자해 쓰고 돈으로 구두해 신고 돈으로 장갑해 끼고

저놈 재조 봐라 저 재벌놈 지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 어허 저놈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 한손은 노땡쿠 다른 손은 땡큐땡큐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서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 엄동설한 막사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
… 추접 무비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 굶더라도 수출, 안팔려도 증산
… "

'오적'이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재수록되자 문제 커져

담시 오적이 처음 <사상계>1970년 5월호에 실렸을 때만해도 서점에서 이 잡지를 수거하고 시판하지 않는 선에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에 재수록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민주전선의 압수에 그치지 않고 시인 김지하,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이 6월 2일 즉각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사상계>는 그때 휴간했으나 끝내 재발행하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담시 '오적'에 대해 공안당국 뿐아니라 당시 재판부 마저도 "북조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유죄판결의 이유를 설명했다. 과연 그럴까, 재심 청구를 하거나 '역사 재판'을 해봐야 할 일이다. 당시 보수적인 지식인들조차 이 시가 비뚤어져만 가는 시대상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풍자한 가치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표현 자유의 영역 내에 있을 뿐 아니라 해외에 번역을 제대로 해서 널리 읽혔더라면 노벨문학상 감이라는 얘기도 많았다. 김지하는 그 후에도 또 다른 담시 '비어(蜚語)' 등을 지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상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정권 측은 1974년 7월 그의 시가 "북괴의 선전 활동에 동조한 것"이라며 그에게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적인 김지하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며 문인인 사르트르와 보봐르를 비롯한 많은 세계적 작가들이 석방호소문에 서명했다. 김지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이는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가장 심각한 문화탄압이었다.

정인숙은 자유당 정권 아래서 대구시 부시장까지 지낸 고위공무원의 딸로 어렸을 적만 해도 유복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4·19 혁명 후 퇴직당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자신도 대학 입시에서 낙방, 진로가 꼬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장래 희망은 배우와 모델. 그 꿈 때문에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맴돌다가 1963년 시나리오 작가 장사◯을 만나 동거생활을 했다.

이들의 동거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관계가 나빠졌다. 그때 정인숙은 한남동에서 요정을 경영하던 김아무개 마담을 만나게 되고 그후 요정 호스티스의 길로 빠져든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매너로 고급요정의 요화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당시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 선운각과 김 마담의 한남동 요정이 그녀의 주 무대였다. 거기서 그녀는 재벌과 권력자들의 노리개감으로 전전했다.

그녀는 죽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그래도 가장 그리운 남자는 장사◯이라고 말하곤 했다. 권력자와 재벌의 '성 노예' 노릇을 했지만 어렸을 적 자유롭게 만난 남자가 그녀에겐 가장 사랑에 가까웠다.

아들 낳은 정인숙 대통령 선거 1년 앞두고 해외로 내보내

 정인숙
 정인숙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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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숙은 1968년 6월 아들 정성일을 낳았다. 그녀는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일절 입을 열지 않았으나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와 자주 접촉하는 고위인사들 중 한 명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얘기가 확산돼 갔다. 정인숙은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은 채 "아이의 아빠가 서교동 집을 사주었다"느니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다"면서 주변에 자기 과시를 했다.

이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가 대통령 박정희를 가르키는 '고위층'이라는 얘기가 일반화되고 있었다. 이것이 청와대 쪽에 들어갔고 육박전의 이유로 보태지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담당자는 박종규로 돼 있었다. 박정희의 내밀한 행보에는 늘 경호실장인 박종규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1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정인숙에게서 퍼져나가는 소문이 박정희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정인숙은 더 이상 서울에 머물러 살 수 없었고 타의에 의한 해외 여행을 떠나야 했다. 고위인사들만이 가졌던 복수여권을 국무총리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했고 신원조회는 당시 중정부장 김형욱의 비서실장 문학림이 맡았다.

이것은 정인숙 문제가 정일권 혼자 처리한 것이 아니란 증거다. 정일권은 김형욱의 비서실장에게 일을 시킬만한 힘이 없었다. 청와대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인숙은 1969년 3월 도쿄에 다녀왔고 그해 10월엔 워싱턴에 가 그곳에서 한인회장인 노진환의 안내를 받으며 3개월 정도 체류한다. 그녀의 해외 생활은 모두 박종규가 유력자들에게 연락해서 뒤를 돌보아 주었다.

도쿄에서는 박종규와 친한 재일교포 정건영이 정인숙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정건영은 도쿄에서 일본명 마치이 히사와라 불리는 유명한 야쿠자 대부로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도쿄 최대의 조폭조직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 두목 고다마 요시오의 막료이기도 했다. 이들은 우익 폭력집단으로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살해하는 등 도쿄 암흑가를 지배했다. 그 정건영에게 박종규는 정인숙을 돌보아 주도록 부탁한다.

정건영은 박종규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외환은행 도쿄지점으로부터 수백억 엔 규모의 거액을 대출받았다가 갚지 못하고 부도를 낸다. 그 부도는 고스란히 국책은행인 외환은행이 떠안아야 했고 그것은 국민부담으로 돌아갔다. 박정희 정권 권력자들의 섹스스캔들을 뒤처리하는 비용은 엄청나게 컸다.

정일권, 정성일에게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

 1991년 2월 28일, 3공화국 당시 한강변에서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된 정인숙(당시 26세)씨의 혈육인 정성일(21,미LA거주)씨가 정일권씨가 아버지라는 친자확인 소송을 내기 위해 김포공항에 귀국하고 있다.
 1991년 2월 28일, 3공화국 당시 한강변에서 의문의 피살체로 발견된 정인숙(당시 26세)씨의 혈육인 정성일(21,미LA거주)씨가 정일권씨가 아버지라는 친자확인 소송을 내기 위해 김포공항에 귀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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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에 건너간 정인숙은 그곳 한인회장 노진환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다가 다시 서울에 들어가겠다고 요구한다. 그녀는 박종규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 그녀가 살해당한 것은 청와대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실제로 박정희든 아니든 소문은 계속 그렇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채 애매하게 고위층이라고만 하면서 으스대기까지 했다.

1998년 박근혜 의원은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정인숙이 낳은 정성일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때 정 여인(정인숙)과 관련된 당사자를 알고 있었다. 물론 상당한 고위층이었다. 그 사람은 사표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제가 관계했던 여자지만 결코 죽이지는 않았다'고 울면서 사죄했다. 아버지는 그때 그 당사자를 문책하게 되면 그가 살인자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 같다."

한편 성인이 된 정성일은 1991년 6월 5일 서울 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 모 측에서 그에게 80만 달러를 주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는 1993년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 가정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냈으나 소송이 진행되는 중 정일권이 사망함으로써 확인은 영구미제로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정성일은 1993년 SBS <주병진쇼>에 출연해 "최근 정일권씨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라는 국무총리가 모시던 분이라면 말 그대로 대통령 밖에 없다. 정성일은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가 취하한 그의 행태로 미루어 주장에 신빙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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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등 역임.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