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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왕비 침전이다. 천기를 받아 왕자를 생산하여야 하기에 용마루가 없다
▲ 교태전 경복궁 왕비 침전이다. 천기를 받아 왕자를 생산하여야 하기에 용마루가 없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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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이 지난 야삼경(夜三更). 솔잎사이로 흐르던 바람소리도 잦아들고 고요하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궁과 나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럴 수가 없다. 숨 막힐 것 같은 적막이다. 방안에 들어있는 신랑 신부도 그렇지만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지밀상궁도 가슴이 터질 것 만 같다.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것은 신부지만 신랑이 더 떨고 있다. 신부보다 나이어린 연하의 신랑이기 때문이다. 신부 얼굴을 보고 싶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마져 볼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고개를 들라' 이르고 싶지만 그 말은 목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임금이 이래서는 안 된다'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소용없다. 입술이 탄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 했던가. 침묵을 깨고 신랑이 입을 열었다.

"상궁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단 둘이 있고 싶었는데 막상 단 둘이 있게 되기 너무나 적막하오."
"...."

신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상궁을 들어오라 하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열세 살 어린 신랑의 한계다.

"소첩이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윤허해주소서."

효령대군 사저에서 너무나 엄격한 왕실 법도를 배워서 일까? 긴장해서일까? 아니면 군부인마님의 엄명이 중압감으로 다가와서일까? 딱딱하게 규격화된 목소리가 신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주전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청자 주전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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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둘이 있는데 윤허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런 소릴랑 거두고 괘념치 마시오."

그래도 남자라고 신랑이 용기를 냈다.

"전하! 술 한 잔 받으십시오."

신부가 학이 상감된 청자 주전자(灌子-관자)를 들었다. 부끄러워서일까? 남자에게 처음 술을 따라서일까? 신부가 빨개진 얼굴을 더욱 숙였다.

"이렇게 단 둘이 있는데 전하라 하니 저어하오."

술잔을 받으며 임금이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럼 어떻게 부르오리까?"
"서방님이라 불러 주시오."

약간 장난기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네에?"

화들짝 놀란 신부가 고개를 들어 임금을 바라 보려했으나 고개가 들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짐짓 근엄한 척 했지만 놀라는 신부가 너무 귀엽다.

마루 벽에 십장생이 그려져 있는 교태전 대청마루. 왼쪽 방이 왕비의 침소이며 오늘의 신방이다.
▲ 교태전 마루 벽에 십장생이 그려져 있는 교태전 대청마루. 왼쪽 방이 왕비의 침소이며 오늘의 신방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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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님이라니요?"
"그렇소."
"아니 되옵니다. 전하!"
"지아비를 서방님이라 부르는데 무에 안 될 것이 있소?"
"소첩은 지엄하신 전하를 서방님이라 부르는 것은 불경이라 배웠습니다."
"그렇게 배웠어도 내가 괞찮다면 괞찬은 것이오."
"서방님이라 함은 천한 아랫것들이 부르는 소리입니다."
"백성 없는 군주가 어디 있으며 아랫것들 없는 윗 것이 어디 있겠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어허! 서방님이라고 부르라 하지 않았소."
"아니 되옵니다. 전하!"
"내가 괞찮다 하면 관계하지 아니한 것이오. 자, 한 번 불러 보시오."

어린 신랑이 신부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았다.

"아니 되옵니다. 서방님!"

한사코 안 하겠다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당황한 신부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섬섬옥수(纖纖玉手) 가녀린 손 위로 붉게 물든 얼굴이 반사되었다. 철쭉 같은 붉음이 우윳빛 손위로 흘러내렸다.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운 붉음이었다.

사가의 신방. 국립민속박물관
▲ 신방 사가의 신방. 국립민속박물관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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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신부가 허리를 뒤로 젖혔다. 신부의 손을 따라가던 신랑의 어깨가 신부의 가슴에 닿았다. 그때였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촉감이 어깨를 타고 온몸에 퍼졌다. 전율이었다. 그것은 살도 아니고 근육도 아니고 뼈도 아니었다. 봉긋했지만 밀려들어 가고 밀려들어 가면서도 다시 밀어내는 오묘한 둔덕이었다.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땅. 그렇지만 향수를 자아내는 마력의 대지. 그곳은 가보고 싶었지만 가볼 수 없었던 곳.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 같았지만 찾아보면 없는 곳. 얼굴을 묻어보고 싶은 계곡에 살짝 피워 오른 소담스러운 봉우리였다.

어린 임금에게는 이성에 대한 기억이 없다. 생모 현덕비는 자신이 태어난 바로 이튿날 세상을 떠났고 단 하나의 혈육 경혜공주는 그의 나이 열 살 때 영양위에게 시집갔다. 유모의 손에서 성장했지만 아릿한 여성에 대한 추억이 없다. 정에 굶주렸고 혈육에 배고팠던 것이다.

몸으로 직접 성교육하는 상침궁녀

세자는 시강원에서 경전과 대학연의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보정(保精)이라는 성교육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생리현상에 대한 교과서적인 교육일 뿐 실전에 약하다. 사가에서는 춘화첩(春畵帖)으로 보충수업을 받지만 궁에서는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세자의 몸이 성숙해지면 몸으로 부딪치며 성교육을 담당하는 궁녀로부터 집중 교육을 받았다. 상침(尙寢)소속 그 궁녀는 교육이 끝나면 6개월간 궁에서 머무르다 조용히 사라졌다. 그 기간은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 때 임신 징후가 포착되면 말끔히 정리하고 떠나는 건 기본이다. 그리고 궐밖에 나가 입을 뻥긋하면 죽음이다. 신랑은 그 기회마저 없었다. 부왕이 갑자기 붕어했고 부랴부랴 등극했기 때문이다.

몽롱한 정신을 수습한 신랑이 신부의 옷고름을 잡았다. 그러나 신랑의 손은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오늘은 신부의 옷을 벗겨주는 날이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소서'라고 상궁으로부터 누누이 얘기를 들었지만 처음 본 사대부집 처자의 옷을 벗긴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자가 해서는 안 돼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그런데 왜 날더러 신부의 옷을 벗기라 할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머리가 복잡하다. 혼란이 왔다. 옷고름을 잡은 신랑의 손이 더 나가지 못하고 멈춘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등불을 켜는 등잔. 국립민속박물관소장
▲ 등촉 등불을 켜는 등잔. 국립민속박물관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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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불을 꺼주세요."

신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얼굴에 계곡이 만들어지며 우물이 파였다. 볼우물이다. 허나, 신랑은 그 우물을 보지 못했다.

신부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랑이 저고리의 옷고름을 잡고 있으니 이제 얼마 후면 맨살이 드러난다. 부끄럽다. 문밖에 사람이 있는 것 같고 아무리 신랑이라 하지만 처음 본 남자 앞에 맨살을 드러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 전하입니까? 서방님이라 불러주지 않으면 꺼주지 않겠습니다."

신랑이 장난기어린 으름장을 놓았다.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서방님! 불을 꺼 주세요."

신랑이 일어나 등촉의 불을 껐다. 완전 어둠이다.

"휴우! 이제 됐다."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밀상궁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방안을 주시했다.

남자의 손에 의하여 옷고름이 풀린다는 것

10세 전 후 혼례를 올린 세자는 가임능력을 발휘하는 16세까지 합방을 유보하는 것이 관례였다. 몸이 성숙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임금의 가례는 그러한 관례를 적용할 수 없다. 수양대군의 특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돌아온 신랑이 다시 옷고름을 잡았다. 신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떨림이다. 떨림은 순수의 결정(結晶)이다. 그 떨림이 신랑의 손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졌다. 신랑의 가슴도 덩달아 뛰었다.

조금만 힘을 가하여 아래로 내리면 매듭이 풀린다. 혼례를 올렸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 의하여 옷고름이 풀린다는 것은 얼굴 화끈거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신랑의 손은 아래로 당기지 않았다.

겹쳐진 궁궐의 처마가 이채롭다. 경복궁
▲ 처마 겹쳐진 궁궐의 처마가 이채롭다. 경복궁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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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뭇거리던 신랑의 손이 오른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예민해진 신부의 신경도 신랑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봉긋한 곳에서 신랑의 손이 멈추었다. 정상이다. 신부의 심장도 멎는듯했다. 모든 것이 정지한 느낌이었다.

신부의 봉긋한 곳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이대로가 좋았다. 어머니의 가슴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엄마의 가슴이 이랬을 것 같았다. 푸근했다. '전하'라는 소리 듣지 않고 이대로 시간이 정지했으면 좋겠다.

신랑이 움푹 파인 계곡에 얼굴을 묻었다. 넓은 것 같으면서도 압박하는 촉감이 미묘했다.  감싸주는 느낌이 이렇게 좋은 줄 처음 알았다. 그것은 싸임의 감미로움이었다. 달콤했다. 그리고 솜털 같은 편안함이었다.

주상도 싫고 옥좌도 싫다. 이대로 온 세상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신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던 신랑이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연민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신부가 꼬마 신랑의 손을 감쌌다. 따뜻한 손이었다. 신부의 봉긋한 봉우리에 신랑의 손이 있었고 그 손위에 신부의 손이 포개졌다. 참 따뜻한 밤이었다.


태그:#첫날밤,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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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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