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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병인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 본사에서 14일 직원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지병인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 본사에서 14일 직원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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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거물급 인사 한 사람이 1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포철 신화'의 주역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박 명예회장은 지병인 폐질환 악화로 이날 오후 5시경 입원 중이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타계했습니다. 향년 84세.

인생 초반부에는 재계에서 출발해 후반부에는 정계에서 활동했는데, 경제인으로서의 전반부 삶이 성공이라면 정치인으로 활동한 후반부 삶은 패착으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다. 박 명예회장의 타계로 박정희 시대의 거물들은 이제 대다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며, 김종필 전 총리,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몇 사람만이 생존해 있는 정도입니다.

1927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한 박 명예회장은 1945년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해 장차 공학도의 길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그해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하여 당시 2년제였던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에 입학하였고, 1948년 제6기로 졸업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5, 6기 생도들을 훈육하였는데 두 사람의 인연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임관한 지 2년 뒤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박 명예회장은 청년장교로 참전하였고, 그때의 공로로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 여러 개의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박태준과 박정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이 한신 내무장관(가운데), 박태준 최고위원과 어느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이 한신 내무장관(가운데), 박태준 최고위원과 어느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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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명예회장을 언급할라치면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두 사람의 인연은 육사 시절 생도와 중대장으로 만나 시작됐습니다. 당시 육사 중대장 겸 탄도학 교관을 맡고 있던 박정희는 수학실력이 우수한데다 자기 규율에 엄격한 박태준을 눈여겨봤습니다.

그러나 박태준이 졸업, 임관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한동안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0여년 후인 박태준이 육군본부 인사과장(대령)으로 근무하던 시절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 무렵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발령을 받은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참모장으로 나를 보좌해 달라"고 요청했고 박태준은 선뜻 이를 수락한 것입니다.

1961년 봄, 당시 대구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소장은 일단의 장교들을 규합하여 소위 '군사혁명'을 준비하였습니다. '5·16 군사쿠데타'가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김종필 등 측근 참모는 물론 일선부대의 지휘관들도 적지 않은 수가 동참하였습니다. 당시 박태준도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자는 일에 참여하지 말고 일이 잘못되면 내 식구들이나 좀 돌봐줘." 만에 하나 '거사'를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박정희는 그때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부탁할 사람으로 박태준을 지목했습니다. 그만큼 박정희는 박태준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쿠데타 성공 두 달 뒤인 그해 7월 박정희는 박태준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했습니다. 두 달 뒤인 9월에는 박태준을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에 임명하였습니다. 집권 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국을 돌며 기공식, 준공식 등 각종 행사엘 자주 다녔는데, 박태준은 늘 박 의장을 보좌하며 동행하곤 했습니다.

군정(軍政) 시절 박 의장은 중장(1961년 11월 대장 승진), 박태준은 준장 계급장을 단 군복차림이었는데 두 사람은 1963년 박정희의 대선 출마를 앞두고 군복을 벗었습니다. 박정희 대장은 1963년 5월 27일 민주공화당 개편대회에서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자, 그로부터 3개월 뒤인 8월 30일 자신이 마지막으로 지휘관을 했던 강원도 철원 제7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하고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박태준도 육군 소장에서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 박정희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면서 김종필 등 측근 참모들은 대거 정계로 진출하였는데 박태준은 경제인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이듬해말 박태준은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중석을 부임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던 중 1967년 9월 그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포항제철을 창립하라는 '특명'을 받았으며, 이듬해 4월 포항제철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철강한국 건설'의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쇳물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포철 설립 6개월만에 흑자 낸 '철강왕' 박태준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제1기 공사 착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박태준 사장(왼쪽), 김학렬 부총리가 버튼을 누르고 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제1기 공사 착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박태준 사장(왼쪽), 김학렬 부총리가 버튼을 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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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포스코는 세계 굴지의 철강회사로 성장했습니다만 출발 당시에는 제철소 건설작업조차 순탄치 않았습니다.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던 그가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영일만 백사장을 처음 밟았을 때만 해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제철소 운영 경험이나 기술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자금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1인당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한국에 거액을 투자를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개인이나 기업을 찾기란 어려웠습니다. 어렵사리 미국으로부터 투자약속을 받아내 영일만에 부지까지 마련했으나 미국측은 차관 제공 약속을 깨버렸습니다. 후진국인 한국이 제철사업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당시 세계은행(IBRD)의 보고서가 결정적으로 훼방을 놓은 셈입니다.

바로 이 때 박태준이 생각해낸 것이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당초 이 돈은 농업분야에만 쓰도록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청구권 자금의 전용 협상을 벌였는데 소위 '부산적기론(釜山赤旗論)'을 편 것이 주효했다고 합니다.

'부산적기론'이란 부산에 적기(赤旗)가 펄럭이면, 즉 한국이 공산화 되면 일본도 공산화 위험이 있다는 주장인데 한 때 일본사회에서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직원들에게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을 통해 제철소 건설자금이 확보되자 1970년 4월 1일 포항 영일만 백사장에서 포항제철 제1기 공사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착공식에는 박 대통령, 박태준 포철 사장, 그리고 김학렬 부총리가 참석해 발파 버튼을 눌렀는데, 이로써 '철강 한국'의 첫걸음이 떼진 것입니다. 놀랍게도 포철은 조업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남 광양에 제2제철소 건설, 1992년엔 2천1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하면서 그는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7년 그는 현역 철강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철강의 노벨상인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했는데 그의 별명 '철강왕'은 이때부터 붙여졌습니다. 경제인으로 산 전반기 그의 삶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공로가 크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후 명예회장직 박탈... 일본으로 망명

반면 정치인으로 산 그의 후반기 삶은 패착과 좌절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정계 진출은 차라리 하지 않음만 못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서 참여한 데 이어 1981년 11대 전국구 의원(민정당)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는 육사 후배인 전두환·노태우(11기) 정권 시절 '박 선배' 소리를 들으며 상당한 위상을 갖고 있었고, 민정당 대표위원, 민자당 최고위원 당시 집권당의 얼굴마담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김영삼(YS)이 집권세력에 합류하면서 그 영광은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결국 YS와 결별하게 되는데 이유는 대선을 앞두고 내각제를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내걸 것을 요구하다가 YS와 갈등을 빚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해 10월 박태준은 민자당을 탈당하였는데,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2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었고, 40년간 살아온 서울 아현동 자택이 압류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10여 평 남짓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4년 여간 망명생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문민정부 말기인 1997년 2월 귀국한 그는 1997년 5월 포항 보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는데 그해 11월 김종필(JP)이 이끄는 자민련에 입당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두고 그는 언젠가 "부덕의 소치인지 93년 봄 이후 죄인 아닌 죄인의 몸이 되어 4년 가까이 해외를 전전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 줄기 서광이 비친 것은 1997년 9월 'DJP 연합'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JP의 권유로 자민련 총재에 취임한 그는 국민의정부 출범에 한 몫을 하였는데, 김대중(DJ)과의 '만남'에 대해 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와 인권시대와의 만남이란 인연이 작용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박태준-김대중 두 사람의 인연은 그해 한일축구전 참관차 DJ가 일본에 갔다가 현지서 박태준을 만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만 해도 박태준은 DJ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특히 DJ를 둘러싼 사상시비, 그리고 말바꾸기 논란은 물론 자신이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좌절의 삶을 살아온 그, 영면에 들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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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박태준은 DJ를 만나 이 세 가지를 확인해 보았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마지막 하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그는 DJ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는데 DJ는 뜻밖에도 "그 말씀 잘 꺼냈소"라며 반겼습니다. 그리고는 "야당할 적에는 박 대통령을 찬양할 수가 있었겠느냐"며 "나라발전을 생각한 방식이나 과정은 달라도 목표는 똑같은 사이"가 아니었겠느냐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는 DJ가 솔직한 사람이라고 여기고는 이후 DJP 공동정부에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선거가 시작되자 그는 TK지역에서 표밭갈이를 위해 DJ에게 구미 박 대통령 생가 방문을 제의하였고, 이를 수락한 DJ는 구미 방문 때 구미시민과 박 대통령 유족들에게 기념관 건립지원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그는 두 번째로 집권세력의 일원이 되었고, 2000년 1월 국무총리에 발탁됐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영예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총리에 임명된 지 불과 4개월만인 2000년 5월 그는 부동산 투기 및 조세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져 그해 4월 19일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40년간 거주해오던 아현동 자택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하였는데, 이 집은 그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시절 박 의장으로부터 받는 '특별 하사금'으로 매입한 집이었습니다.

그가 총리직에서 사퇴하자 자민련은 국민의정부 공동정권에서 탈퇴하였으며 그해 6월 국회의원 임기 종료와 함께 그도 자민련에서도 탈당하였습니다. 이로써 그의 정치인생 20년은 막을 내렸고, 이후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옛말에 '물 좋고 정자 좋은 데 없다'고 했는데, 어쩌면 박태준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경제는 장학생이었다면 불명예로 마감한 정치는 거의 낙제생 수준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가 능력이 없어서 그랬다기보다도 운도 따라주지 않았고, 또 어쩌면 정치는 그의 몸에 맞는 옷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그가 끝까지 재계 원로로 남아 있었다면, 적어도 수모를 겪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역사에 남긴 공과가 있다면 그건 후세에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또 평가할 것입니다. 한 시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영광과 좌절의 삶을 살아온 그는 이제 이승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치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태그:#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대일청구권 자금 , #박정희 대통령, #철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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