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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만점에 평점 4.4점, 그것도 모자라 조기졸업을 한 A대 국문과 윤채린(가명·여)씨. 그에게는 항상 '퍼펙트', '신화'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4년 동안 지각과 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데다, 학습태도 또한 성실했다. 거기에 옷차림까지 깔끔해, 주변 친구들은 그를 떠올릴 때마다 빨간색 더플코트에 귀여운 플랫슈즈를 신은 귀엽고 우아한 모습을 상상한다.

어찌 보면 평범해 보이기도 하는 김씨가 왜 '신화'로 남게 된 것일까. 그건 김씨의 통학거리 때문이었다. 그는 수원에 살았기 때문에, 매일 통학시간으로 왕복 3시간을 허비했다. 사실 그의 조기졸업에는 이유가 있었다. 중등 임용고시를 일찍 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기나긴 통학시간이 지겨워서였다. 그러나 이런 '퍼펙트'한 그의 모습 뒤에는 조금은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자기 전에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해놔. 양말과 신발까지 전부다.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바지를 입고 스킨을 바르고 윗도리를 입고 로션을 바르지. 코트를 입고는 눈썹을 그려. 노하우가 생기더라고. 밤에 머리를 감고 자는 것은 기본이야."

그렇지 않으면 지각하기 십상이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김씨의 완벽한 학교생활은 이렇듯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다. 대다수 장거리 통학생들의 다크서클은 언제나 무릎 언저리까지 내려와 있다.

오전 강의 들으려면, 별 보면서 학교 등교

지하철 안 모습.
 지하철 안 모습.
ⓒ 엄지뉴스-일필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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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일산에 살면서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서울여대에 다니는 김효주씨도 몇 년째 장거리 통학 중이다. 그는 매일 왕복 4시간의 장거리통학을 한다.

별도 자취를 감춘 깜깜한 새벽, 그의 일상이 시작된다. 오전 강의를 들으려면, 남들은 다 자고 있는 새벽녘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는 등 바지런을 떨어야 한다. 눈을 채 뜨지 못한 채로 샤워를 마치고 집 현관문을 나서지만, 골목길에는 여전히 '가로등'만 반짝이고 있다.

여름철에는 그나마 나은데, 겨울에는 오전 7시는 돼야 해가 뜨기 때문에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이 무섭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지하철을 타면 곧장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눈을 감아버린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자리양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저도 원래 다른 학생들처럼 지하철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면 자리 양보를 해오곤 했어요. 그런데 몇 년을 매일 몇 시간씩 지하철을 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리양보를 안 하게 되더라고요. '저 할아버지는 커다란 등산가방을 메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 그냥 가셔도 괜찮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아버리기 일쑤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을 잃은 것 같아요."

수업시간에 조는 건 다반사...집에 갈 때는 더 고생

공부에도 많은 지장을 받는다. 지하철에서 2시간을 보낸 후 학교에 도착하면, 벌써 수업을 몇 시간은 들은 양 피곤하다. 공강시간이 되면 재빨리 밥을 먹고 수면실로 향한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지 않으면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혼자 듣는 수업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너무 피곤한 거예요.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와야 했거든요.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깨고 보니, 10분쯤 지나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이에 교수님께서 과제를 말씀해주신 거예요. 수업을 듣고도 과제를 알지 못하는, 혼자 듣는 수업이라 물어볼 수도 없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더라고요."

사실 김씨에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곤욕이다. 아침에는 지하철에 사람이 적어 앉을 수 있지만, 집에 갈 때는 퇴근시간과 딱 겹쳐 1시간 넘게 서서 가기도 한다.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를 해요.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사람들 머리 위에 어느 역에서 내릴지가 보이는 거죠."

2년을 그렇게 통학했던 김씨는 결국 3학년에 올라가면서 집을 나와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집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터라, 김씨도 부모님도 결정하는 데까지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그 선택은 옳았다. 김씨는 "세상에 이런 천국이 없었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에 집을 나서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는 것 같았다"며 "되돌아보면 그때 정말 학교생활을 즐긴 것 같다, 학점도 좋았다"고 회상했다.

마을버스→지하철→스쿨버스...쪽잠도 힘들어

지하철에 사람이 꽉 들어찬 모습
 지하철에 사람이 꽉 들어찬 모습
ⓒ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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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서강대 경제대학원에 입학한 조혜리씨도 과거 '장거리 통학자'였다. 조씨도 다른 '장거리 통학자'들처럼 고생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원을 선택할 때 '집과의 거리'를 배제할 수 없었다. 학부생 시절 그는 집과 멀리 떨어져 있는 B대학을 다니면서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학교를 갈 때 대중교통을 4번이나 갈아탔어요. 집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타죠. 또다시 환승을 하고 내리면 마지막으론 스쿨버스를 타요. 마음 놓고 쪽잠도 잘 수 없었죠. 그래서 대학원만은 그나마 집과 가까운 곳으로 가려고 했어요. 제가 원하는 대학원에 붙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다시 기억하기도 싫었던 것일까. 장거리 통학시절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굴을 한창 찡그리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먼 대학을 간 거죠?" 그는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in서울 in서울 하잖아요. 말 그대로 서울 안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도 힘든 마당에 학교의 거리나 위치를 따질 수가 있나요. 어디까지나 제가 갑이 아닌 을이 되는 거죠."

그러나 지금이라고 해서, 30분 안에 학교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학교까지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가야 한다. 하지만 조씨는 이 정도만 돼도 감사하단다. 내려야 하는 역을 챙겨가며 정신 바짝 차리고 환승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대학원 공부가 학부 공부보다 참 많이 힘들어요. 그래도 옛날 생각을 하면 통학시간을 줄이면서 아끼는 체력으로 버틴다 싶어요."

여전히 학교가 멀어서 고생이 많겠다는 말을 건네자, 그가 씩씩하게 말했다.

"어우~ 이 정도면 그야말로 감지덕지죠. 하하."



태그:#장거리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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