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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부터 2011년 <오마이뉴스> 지역투어 '시민기자 1박2일'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투어에서는 기존 '찾아가는 편집국', '기사 합평회' 등에 더해 '시민-상근 공동 지역뉴스 파노라마' 기획도 펼쳐집니다. 이 기획을 통해 지역 문화와 맛집, 그리고 '핫 이슈'까지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지역의 희로애락을 자세히 보여드립니다. 어느덧 마지막, 이번엔 서울·경기·인천입니다. [편집자말]
2009년 7월 31일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 주변 바닥분수 시운전 모습.
 2009년 7월 31일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 주변 바닥분수 시운전 모습.
ⓒ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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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 중에 나보다 서울에서 오래 산 사람은 많겠지만 나보다 서울의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산 사람은 적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나는 강북의 동대문구 보문동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여 같은 구 안암동·망우동, 종로구 원남동·이화동·충신동, 성북구 돈암동·삼선동·수유동·정릉동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30대 초반 강남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강남에서도 삼성동·반포동·청담동·방이동·논현동·대치동·도곡동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내가 서울에서 산 것은 1967년부터 2007년까지 40년 동안이었다. 대략 회고해 보니 10대·20대는 강북에서, 30대·40대 때는 강남에서 보냈으니, 공교롭게도 내 서울 생활은 전반기 20년과 후반기 20년이 각각 강북과 강남으로 갈리는 셈이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서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역사와 관련된 사실은 더욱 그런 것 같다. 일례로 나는 서울 미아동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미아(彌阿)'라는 이름이 낯설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불교의 '나무아미타불'에서 중간에 있는 두 글자 '아미'는 극락을 뜻한다. 그런데 미아리의 원래 이름은 '아미리'였다고 한다. 그것을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마구 음절을 도치시켜 미아리로 바꿨다고 한다. 옛날 아미리는 망우(忘憂, 세상 근심을 잊음)리처럼 대규모 공동묘지가 있던 땅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접하게 된 북촌과 남촌 

중학 시절 나는 주말에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외가에 가끔 놀러 갔다. 그러고는 외사촌들과 함께 가까운 휘문학교(원서동)나 중앙학교(계동)에 가서 축구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 동네는 유달리 거리가 깨끗했고 유서 깊어 보이는 한옥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가르쳐주는 사람 또한 없었다.

나는 남산 기슭 필(筆)동에 있는 대학에 학생과 강사로 10년 넘게 다녔다. 필동 옆에는 묵(墨)동이 있었다. 필과 묵은 당연히 붓과 먹을 의미하지만 나는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충무로와 명동이 있어서 자주 놀러 갔다. 그러면서도 충무로와 명동이 서울의 핵심 도로라는 종로보다 왜 더 번화한지, 그리고 부근에 있는 고개 이름 '진고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위를 알지 못했다.

청계천 둑방에 들어선 판자촌. 화장실이 청계천에 그냥 설치돼있다.
 청계천 둑방에 들어선 판자촌. 화장실이 청계천에 그냥 설치돼있다.
ⓒ 전시회장 사진 촬영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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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울에서 처음으로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청계천의 판자촌이었다. 오염된 천변에 수도 없이 닥지닥지 밀집한 판자촌 군락을 보고서 나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10만이 넘는다고 했다. 이후 나는 개천 위로 시멘트 도로가 복개되고 그 위에 흉측하게 고가도로까지 중첩 가설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많던 청계천 주민이 어디로 갔는지를 생각해 보는 서울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광주(廣州) 대단지로 강제 이주되어 오늘날 성남시의 기원이 되었다.

청계천은 2005년 복원되었다. 당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청계천을 보러 갔다가 그만 눈길을 딴 데로 돌리고 말았다. 그것은 복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인공 복개일 뿐이었다. 분노와 함께 허탈감이 밀려왔다. '아, 역사는 이렇게 사장되고 마는 것이로구나.'

한강 못지않게 의미 있었던 청계천, 그러나...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는 식민지시대 청계천 주민들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주민들은 도로라고 할 것도 없는 허름한 골목길에 익숙했다. 특히 개천가의 집들은 주택일 수도 있고 주택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땅을 판 다음 거적을 씌운 이 집들은 멀리서 볼 때 도무지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마다 자연스레 조성된 아이들 놀이터와 아낙들의 빨래터는 사람 사는 생기를 물씬 풍겼다고 한다.

바로 이 청계천이야말로 500년 조선왕조의 도읍 한성을 상징하는 하천이었다.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갈라놓는다면, 청계천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며 옛 서울을 북촌과 남촌으로 갈라놓았다. (이와 달리 종각을 기준으로 북·남촌이 갈라졌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당시 풍수지리가들은 한강을 외룡(外龍), 청계천을 내룡(內龍)으로 대등하게 대비시켰다고 한다.

북촌은 조선왕조 500년 기득권자들의 지역이었다. 서울 풍수지리의 핵심 명당은 경복궁과 창덕궁이다. 북촌은 그 중간에 자리 잡은 명당으로서 고관대작이 주로 살았다. 북촌은 지금의 종로구 재동· 삼청동·가회동 등에 걸쳐 있으며 내가 중학 시절 축구를 하러 갔던 휘문학교나 중앙학교가 있던 지역과 겹친다. 이것은 그 동네 거리가 유난히 깨끗하고 유서 깊어 보이는 한옥이 많이 남아 있던 연유이기도 하다.

2008년 5월 1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광우병위험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가운데, 촛불을 든 시민들이 청계천으로 내려오고 있다.
 2008년 5월 1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광우병위험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가운데, 촛불을 든 시민들이 청계천으로 내려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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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북촌 아래의 종로 네거리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가장 번성했던 곳이다. 종가 또는 운종가로 불린 이곳에는 조선 최대의 고급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의 종로 2가 자리에 있던 육의전에서는 비단, 무명, 명주, 종이, 모시·베, 어물 등을 취급했다. 육의전 상인들은 자존심이 세고 애국심이 강했다. 그들은 1896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겪은 고종이 겁을 먹은 나머지 경복궁을 버린 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자(아관파천, 俄館播遷), 철시 파업으로 위협하며 왕의 환궁을 요구하기도 했다.

북촌에 기득권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데 비해, 남산 기슭의 남촌은 과거에 실패한 양반과 하급관리들이 주로 살았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이 살던 동네가 바로 남촌의 묵적골이었다. 허생은 종로(운종가)의 변 부자에게 가서 장사 밑천을 빌린다. 북촌의 고관대작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팔자걸음을 걸었던 데 반해 남촌의 몰락선비들은 사철 헐벗은 채 나막신만을 신고 다녀서 그들에게는 '딸각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내가 다닌 대학의 동네 이름이 '필동'또는 '묵동'인 것은 바로 이런 연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일제 침략, 북촌의 몰락과 남촌의 부상

장구한 세월 기득권을 누리던 북촌은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소외되기 시작한다. 일제는 주로 남촌을 침탈했다. 경술국치가 이뤄진 1910년께 이미 남촌의 진고개는 한성에서 가장 깨끗한 거리가 되어 있었다. 신작로 주변으로 운치 있는 기와 가옥도 많이 들어섰다. 고갯마루에는 정돈된 조경 사이로 새로 들어선 명동성당이 위용을 뽐내게 되었다.

진고개는 이름 그대로 질척질척한 고개였다. 다른 이름으로 '이현'이라고도 했는데 '진흙 니'에 '고개 현' 자를 썼다. 하지만 진고개는 차츰 조선인이 선망하는 장소로 떠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 공사관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일인들이 모여 살게 되자. 일본에서는 조선의 외무독판 김윤식을 움직여 일본인 거류 지역으로 지정했다. 그래서 북촌의 양반들은 진고개 일대를 '왜놈마을'이라고 불렀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진고개에는 일제의 근대 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줄을 이어 입점했다. 순박한 조선인들은 눈깔사탕과 만화경에 열광했다. 멀리 수원과 양주에서까지도 어린이를 데리고 눈깔사탕을 사러 오는 조선인이 있을 정도였다. 일본 상인들은 쏠쏠히 돈을 챙겼다 그들은 구경 좋아하는 조선인의 심리를 금세 간파했다. 또한 일본인들은 흥행에 곧잘 현혹되는 조선인의 심리를 포착했다. 그런 나머지 족예, 요술, 곡예, 경륜 등의 천박한 흥행업자가 속속 밀어닥쳐 터를 잡았다.

가회동 31번 한옥촌. 서울 도심에 위치한 "북촌 한옥마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행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 북촌 한옥마을 가회동 31번 한옥촌. 서울 도심에 위치한 "북촌 한옥마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행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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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 봄에 일본군 1개 여단이 입성하여 자리 잡은 곳도 진고개였다. 그러자 진고개에 모여드는 일본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들은 예장동에 공사관을 새로 지었다. 그러자 그 주변으로 사설 금융기관들이 들어섰다. 사채업자들은 가난한 남산골 샌님들을 꾀어 집을 저당으로 돈을 빌려 주었다. 일본인들은 상환 기일이 되면 연락을 끊고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한 달쯤 지나 찾아가 집을 압류했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진고개 일대를 점유해 나갔다.

일제는 1908년 숭례문의 양쪽 성곽을 헐어내고 도로를 확장했다. 이어서 그들은 숭례문에서 광화문으로 연결되는 남북축의 도로를 냈다. 그들이 남촌과 북촌을 잇는 도로 공사를 먼저 벌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인 거류 지역이 된 진고개는 비만 오면 남산에서 토사가 내려와 진흙탕 길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일인들에게 소통로를 내주기 위해 서둘러 공사를 진행한 것이었다.

1914년 일제는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그들은 조선의 500년 도성인 한성을 격하시켰다. 그래서 이름을 경성으로 바꿨다. 그들은 한성의 면적을 8분의 1로 축소한 후, 경기도의 한 시(市)로 편입시켰다. 판서급이던 한성판윤도 경기도 도장관의 지휘를 받는 한성부윤으로 강등시켰다.

그들은 조선 민족의 자존심을 유린하는 작업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소공동 환구단 옆의 남별궁 터에 철도호텔(조선호텔 전신)을 지었다. 그 결과 환구단과 황궁우가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광화문과 경복궁의 일부 건물을 헐어냈다. 거대한 석조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을 시야에서 차단하는 자리에 들어서자 조선의 상징물인 경복궁 근정전은 남산에 올라가서야 겨우 그 지붕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종로는 철저히 방치되었다. 또한 조선 빈민이 사는 청계천은 10년 넘게 준설 작업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2,3년에 한 번씩 준설 작업을 해 오던 곳이었다. 청계천 일대는 도로 포장도 안 되어 갈수록 냇물이 오염되었다. 일본인 거리인 충무로와 남대문로는 산뜻하고 화려한 문명의 장소가 된 반면 조선인 거리인 종로와 청계천은 추레한 비문명의 지역으로 전락해 갔다.

이제는 남산골에서 조금 이동하여 아예 명동과 충무로 일대를 남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수도가 보급되고 신작로가 속속 열렸다. 전기가 밤을 낮처럼 밝혔고 상가에는 신식 상품이 진열됐다. 이렇게 남촌은 요즘의 강남처럼 신흥 부촌으로 성장해 갔다. 1935년 3월 15일 자 <동아일보>에는 '土木工事(토목공사)에 北村(북촌)보다 南村(남촌)의 置重(치중)은 何故(하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남촌에는 일본인이 많았고 조선인일 경우 친일파가 대부분이었다. 진고개에는 일본 기생을 둔 요릿집 화월루가 있었다. 친일파 송병준은 아예 일본 요릿집 청화정을 개업, 운영했다. 남촌의 진고개는 친일파의 아지트나 다름없었고, 식민지 시대 상류계급을 자처하는 빈곤한 영혼들의 구락부 같은 곳이 되었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등 고층 아파트 전경.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등 고층 아파트 전경.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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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북촌과 남촌 중 어느 곳과 닮았을까

영등포의 동쪽이라서 해서 '영동'이라고 불렸던 강남이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이전의 강남은 경기도의 한적한 농촌에 불과했었다. 강남이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기득권 지역이 된 것은 IMF 환란 직후인 1998년부터였다. 요컨대 기득권 지역으로서의 강남은 매우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서울에 처음 발을 디뎠을 무렵 250만에 불과했던 서울 인구는 이제 1000만이 되었다. 이와 함께 종로·중·서대문·동대문·성북·성동·용산·마포·영등포구 등 9개 구밖에 안 되었던 서울은 지금 25개 구로 확장되었다. 서울은 강남의 개발과 함께 급격히 비대해졌다. 급기야 강남 인구는 강북 인구를 상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통상 강남이라고 하면 강남·서초·송파 3구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던지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은 조선왕조의 북촌과 일제의 남촌 둘 중에서 어느 것과 더 비슷할까? 지금 대한민국의 권력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은 필경 강남지역일 터이다. 인구 60만 명에 불과한 강남구 한 구에만도 백화점 28곳, 호텔 187곳, 전용술집 804곳, 피부과 711곳, 성형외과 971곳, 변호사 사무실 1631곳이 성업 중이다.

과연 '강남불패'라는 신화는 향후 얼마 동안이나 유효할까?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세상은 바야흐로 역사의 변화 주기가 급격히 짧아지는 추세에 있다는 점이다.



태그:#서울, #북촌, #남촌, #청계천,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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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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