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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us au Larzac(전부 라르작으로)> 포스터.
 <Tous au Larzac(전부 라르작으로)> 포스터.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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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정치적으로 힘든 상황을 맞이한 프랑스인들에게 일종의 희망을 선사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11월 23일 개봉했다. <Tous au Larzac(전부 라르작으로)>이란 이 영화는 1970년대에 프랑스를 들끓게 한 농부들의 저항 운동을 다루고 있다.

1971년 조르주 퐁피두 정부의 미셀 드브레 국방부 장관이 라르작에 있는 군사 기지를 확장할 계획을 발표하면서 문제는 시작됐다. 라르작은 프랑스 남부의 아베롱에 위치한 해발 700~800미터의 고원 지대로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1902년에 군사 기지가 들어섰다. 1971년 정부가 발표한 것은 3000헥타르에 달하는 군사 기지를 1만7000헥타르로 확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군사 기지에 근접한 12개 마을에 살고 있는 107호의 농가를 이전시켜야 했다.

고립된 라르작 고원에서 살고 있는 농부들은 대부분 대대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군사 기지 확장에 동의하고 타지로 떠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당연히 정부 결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잘 알지 못했고 위치상 붙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떤 식으로 정부에 맞서야 할지 몰랐다.

1970년대 프랑스 뒤흔든 농부들의 '군사 기지 확장 반대' 투쟁

이들을 결집시킨 건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이들은 모임을 열어 서로 얼굴을 익히고, 정부에 집단적으로 대응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71년 5월 9일 군사 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1500여 명의 시민들이 라르작 고원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미요부터 군사 기지가 있는 라 카발르리 마을까지 도보 행진을 했다. 첫 공식 항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사실은 지역 신문에 보도됐다. 소식이 파리에까지 알려지자 많은 이가 농부들의 항거에 동참했다. 프랑스 전역에 라르작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정치 성향이 서로 다른 이들이 라르작에 속속 도착했다. 사회당원, 공산당원, 트로츠키주의자, 비폭력주의자, 68혁명에 적극 가담했던 이들, 히피 등 주로 좌익 성향이 강하면서도 분파는 다양한 이들이었다.

전통적으로 농부들은 가톨릭 우파에 속한다. 68혁명 때도 학생들을 진압했던 경찰의 편에 섰다. 그런 농부들과는 정치적·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던 이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어 진보적인 사고와 자유분방한 모습을 선보이자 농부들은 매우 놀랐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농부들과 각지에서 모여든 이들은 거대한 정부에 맞서 단합하고 비폭력 항거를 지속했다. 1972년 12월 정부는 군사 기지 확장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공포했다. 그러자 라르작 농부들은 트랙터를 몰고 양떼를 이끌고 파리로 갔다. 파리에 도착한 농부들은 에펠탑 아래에 있는 샹 드 마르스 공원에 텐트를 치고 항거 운동을 벌였다. 경찰이 양떼를 몰아내려 했지만, 양떼는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Tous au Larzac(전부 라르작으로)>은 당시 투쟁에 앞장섰던 농부들의 증언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는데, 유머 감각이 탁월한 한 농부는 자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텐트를 쳐 본 곳이 파리라고 말했다. 당시 추운 겨울에 어린아이들과 같이 며칠을 텐트 안에서 지내야 했지만, 근처 주민들이 호의를 베풀어준 덕분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고 했다. 샹 드 마르스 공원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대개 부유층에 속했다. 그런 주민들이 농부들에게 두꺼운 담요를 가져다주고, 일부는 자기 집 목욕탕을 개방해 농부들이 목욕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에펠탑 아래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이례적인 사진이 각국에서 보도되면서 라르작 농부 항거는 널리 알려진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농부들은 비폭력의 범주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찾아내야 했다. 그런 아이디어로 집단 단식, 군사 기지 확장 지역에 대형 양 우리를 건축한 일 등을 들 수 있다.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은 전혀 경험이 없는 상태임에도 상부상조해 돌로 된 대형 양 우리를 만들었다.

또한 농부들은 농업토지그룹을 만들어 군이 눈독 들이고 있는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보내준 기금으로 산 땅도 있지만, 대부분은 매매계약서부터 작성하고 땅값은 나중에 주는 조건으로 사들였다. 비어 있는 허름한 농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주인을 찾아내 농가도 구입했다.

이러한 결정은 농부들 및 농부를 도우러 온 외부 인사들이 모인 회의에서 내려졌다. 모임과 토론은 모든 이가 동의할 때까지, 그래서 대개는 매일 새벽까지 지속됐다. 모든 안건을 투표에 부쳐 다수의 결정에 따르는 게 더 쉬운 방법이었지만, 이들은 다수결의 함정을 알고 있었기에 토론을 거듭해 만장일치를 유도했다. 한 농부는 당시 모든 안건의 최종 결정권이 농부들에게 있었다며, 농부들과 함께한 이들이 지금도 고맙다고 밝혔다.

 1970년대 라르작 투쟁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끌어내는 모습.
 1970년대 라르작 투쟁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끌어내는 모습.
ⓒ 위키미디어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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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 10년의 싸움 끝에 승리하다

1974년 대선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패하고 지스카르 데스탱이 당선되자 농부들의 절망감은 극에 달했다. 데스탱은 퐁피두를 잇는 우파이고 군사기지 확장 계획은 우파의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이해 여름 라르작 고원에서 대중 집회를 열었다. 프랑스 각지에서 14만 명이 모여들었다. 그 전해에 있었던 집회에 참가한 사람의 두 배였다. 미테랑도 이곳에 들렀다가 많은 이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라르작 고원의 농부 저항이 전국적인 항거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는 68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여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을 때였다. 라르작 농부들의 저항이 그런 프랑스인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출구와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다.

1976년에는 농부 중 핵심 인사들이 군사 기지에 잠입해 토지 매상 관련 자료를 탈취했다. 이 일로 이들은 15일 형을 받았다. 이 중 남자들은 하루 만에 풀려났다. 많은 이들이 구금에 항의했고, 마침 농사철이어서 일손이 부족한 때이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15일 형을 살고 나왔다.

1978년에 토지 매상 법령이 발표되자, 군사 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도보 행진을 했다. 라르작에서 파리까지 710킬로미터를 8만여 명이 릴레이로 침묵 도보 행진을 감행한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항거할 동안 프랑스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Tous au Larzac(전부 라르작으로)>에는 군인들이 버려진 농가에 자리 잡고 농사일을 배우며 양을 치던 젊은 히피족 등을 4년 동안 24시간 감시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한 농가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이 폭탄 건으로 겁을 먹은 일부 사람들이 항거를 중단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누가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린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 정부는 농부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비싼 가격으로 농가를 구입하겠다고 제안했다. 만약 농부들이 뭉치기 전에 이런 제안이 이뤄졌다면, 적잖은 농부들이 정부의 제안에 넘어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굳건하게 단결한 농부들에게 정부의 제안은 통하지 않았다. 제안에 응해 정부에 집을 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부들이 저항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던 1981년 사회당의 미테랑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에 따라 농부들도 승리했다. 미테랑의 대선 공약 중 하나가 라르작 군사 기지 확장 계획 철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르작 농부들과 달리, 같은 시기에 프랑스 동부인 브장송의 립 시계공장에서 대대적으로 항거한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Tous au Larzac(전부 라르작으로)>은 크리스티앙 루오 감독의 작품이다. 루오 감독은 2007년에 립 시계공장 노동자들의 저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우리가 만들고 팔고 나눠 갖는다" / 모든 게 가능했던 신세계의 비결> 참조). 루오 감독은 11월 24일 좌파 성향의 주간지 <폴리티스>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립 시계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농부들을 돕기 위해 라르작으로 오기도 했는데 이들을 촬영한 장면이 영화에 담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라르작 농부들이 나중에 이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자기네들 이야기도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크리스티앙 루오 감독(가운데).
 크리스티앙 루오 감독(가운데).
ⓒ www.ladepech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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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프랑스인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다큐멘터리

라르작 농부들은 1981년에 승리했다. 그러나 이 농부들의 얘기가 1981년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10년 동안 많은 시민이 보내준 성원에 답하고자,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에 프랑스령인 뉴칼레도니아에서 독립 운동을 펼친 카낙 족을 후원했고, 폴리네시아에서 핵 실험을 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옹호했다.

또한 미국인들이 프랑스의 로크포르 치즈를 보이콧하자, 1999년 8월 농부연합을 이끌던 조제 보베가 미요에 있는 맥도날드 매장을 부쉈다. 2007년 대선 후보였으며 현재 유럽 녹색당 의원인 보베는 라르작 농부 저항과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보베는 1973년 라르작 농부들과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아예 라르작에 정착해 양을 치며 정부에 맞서 싸웠다. 보베는 이번 다큐멘터리의 증언자 중 하나다.

아울러 라르작 농부들은 다른 지역의 농부들과 함께 GMO(유전자 조작 농산물) 옥수수 밭을 지속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2003년 여름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알터 몬디알리스트(alter mondialist)' 집회가 라르작 고원에서 열렸다. 이 집회에는 30만 명이 모였다. 엄청난 더위로 프랑스의 많은 노인들이 사망한 그 여름이어서 라르작 고원의 살인적인 더위를 기자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라르작과 관련해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이곳의 대지가 지금까지도 집단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프랑스에서 유일한 사례다. 예를 들어 한 농부가 떠나면 그 집을 이웃 농부가 사서 확장하는 게 아니라, 농부들이 모여 그 집에 누가 들어가서 살고 무엇을 경작할지 다함께 결정한다.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는 농부 중 1971~1981년 라르작 항거에 참여한 이는 10%밖에 되지 않는다. 1970년대의 저항 정신이 세대가 바뀐 후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다.

<Tous au Larzac(전부 라르작으로)>은 프랑스 전역에 있는 영화관 100여 곳에서 성황리에 상영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야릇한 노스탤지어와 동시에 일종의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라르작 고원.
 라르작 고원.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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