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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녀의 과거를 가급적 묻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내게 말해주었거나 어떤 계기로 내가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들을 바탕으로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할 뿐이다. 난 그녀가 받았을 상처가 어떤 것인지 내 기준으로 가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상처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것을 들쑤시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이번 글은 매우 조심스럽다.

세상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때론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믿는 그 상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상식들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삶에겐 상식들이 그 삶을 가혹하게 공격한다.

그녀와 나의 임신, 그리고 출산, 결혼, 가출에 이르기까지 온 과정이 그랬다. 그녀가 고통 받은 이유는 상식들이 그녀의 삶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청소년기는 아니 어쩌면 나의 일생이 그녀의 삶의 고통을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는 기억들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의 고통이 나보다 수백 배는 더했으리라.

상식은 '안 된다' 말했지만 난 해야만 했다

홍익대학교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투쟁 첫날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전원 해고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한 청소, 경비 노동자들이 총장실 앞을 점령했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있는 사람이 나다.
▲ 홍익대학교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투쟁 첫날 1월 2일 새해 벽두부터 전원 해고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한 청소, 경비 노동자들이 총장실 앞을 점령했다. 빨간 동그라미 안에 있는 사람이 나다.
ⓒ 최병현 <레프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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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내게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기 직전, 난 평일 아르바이트 하나를 그만두고 홍익대학교에 가 있었다. 노동자들이 새해 벽두부터 해고당했기 때문이다. 2011년 1월 2일, 새해 첫 출근을 한 시설 노동자는 비밀번호가 바뀌어 작업실에 출입할 수 없었고, 미화·경비 노동자들은 대기실과 경비실의 열쇠마저 빼앗겼다. 어떤 사전 통보나 협의도 없이 벌어진 대량해고였다.

난 이전에 내가 속한 대학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초기부터 연대한 경험이 있기에 점거농성 연락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노동자 투쟁에 연대해준 면면들은 홍익대학교에서도 거의 고스란히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현재 상황들을 공유하고 이후의 투쟁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에 자연스럽게 참가할 수 있었다.

내가 회원으로 있는 단체에선 홍익대학교에 상주하며 시시각각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보고하고 기사를 써 줄 것을 요청했다. 난 '다함께'의 회원이다. 다함께 서부지구의 홍익대학교 투쟁 담당자가 된 것이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많거나 맞먹게 되자 당장의 생계비조차 모자라질 참이었다. 당장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투쟁에 함께 연대하며 쓸 나의 투쟁자금이 필요했다. 난 상식적으로 해선 안 되는 일들 중 한 가지를 했다. 어머니는 제 능력으로 평생 자기 집도 못 살 무능한 자식들을 위해 자식 이름으로 주택청약적금을 들어두셨다. 난 그 적금을 해약했다. 우리의 상식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청소 어머니'

새해 초엔 술자리가 잦다. 난 집에 늦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 이유로 나와 그녀는 사소한 일로 크게 다퉜다. 그녀는 나와 우리가 동거를 시작했던 자취방에서 가출했다. 홍익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되고 몇일 뒤의 일이다. 그때까진 그녀도 나도 임신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다투거나 감당하기 힘든 큰 일이 생기면 '잠수를 타는' 나쁜 버릇이 있다. 한참 연락이 되지 않아 그녀의 친구들에게 연락하자,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종종 있는 일이니 걱정 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녀의 이 나쁜 버릇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삶을 옥죄는 이 사회에서 그녀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나 무서워."  

1월 8일, 그렇게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 것을 알았고, 우리는 이후의 우리의 삶이 어찌 되더라도 결혼을 하기로 했다. 갑자기 닥쳐온 이 큰 일에 대한 충격 때문에 나도 그녀도 거의 일주일간 세상으로부터 '잠수를 타며' 그렇게 결정했다. 그녀는 내게 고백했다. 자신에겐 아버지가 없다고, 홀어머니와 매우 가난하게 살아왔다고. 그녀의 어머니도 청소노동자, '청소 어머니'라고.

그녀가 말한 것들은 이 사회의 상식으론 죄가 되기 때문에 그녀는 연신 미안해 했다. 출판사 사장 아들을 꾀어내 애부터 임신해놓고는 책임지라 그런다는 식의 막장 드라마 같은 것 말이다. 애는 혼자 임신하는게 아니고, 책임은 남자에게 더 크게 있는데도, 그 드라마의 이야기들이 이 사회의 상식이니 말이다. 나는 누가 '죄인'인지도 모른 채, "다 괜찮아"라고 말했다. 

해서는 안 될 말... 그날 이후 학교에 안 갔다

그녀는 홀어머니의 외동딸이 아니다. 그녀에겐 아버지가 있다. 단지 가족관계증명서에만 존재하는. 그녀는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언지 단지 가늠해 볼 수밖에 없지만 장성한 하나뿐인 딸을 평생 단 한 번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아버지의 현재가 그리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다신 볼 생각이 없더라도 가족 관계조차 정리하지 않은 채 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그녀의 삶을 이 글을 쓰기 위해서 그것을 굳이 캐묻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난 그녀의 삶을 이야기로 쓸 수 있었다. 나의 삶의 기억이 그녀의 삶을 얼추 가늠할 수 있을 것이기에.

1997년 찾아온 IMF 외환위기는 우리 가족들에게도 닥쳐왔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난 어머니와 함께 외가가 있는 전라도의 한 산골로 가야 했다. 그 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때의 내겐 아버지가 있지만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HOT 의 '빛' 뮤직비디오 중 한장면 IMF 외환위기 당시의 충격은 대중 가수의 뮤직비디오에도 반영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이 뮤직비디오엔 사업에 실패해 빚 독촉을 하러 온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치는 장면이 나온다. 난 이와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험을 해야 했다.
▲ HOT 의 '빛' 뮤직비디오 중 한장면 IMF 외환위기 당시의 충격은 대중 가수의 뮤직비디오에도 반영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이 뮤직비디오엔 사업에 실패해 빚 독촉을 하러 온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치는 장면이 나온다. 난 이와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험을 해야 했다.
ⓒ SM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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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빚 때문에 쫓기듯 갔지만, 나의 삶만은 부유해졌다. 어머니의 아버지가 부유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외할아버지 소유의 주유소 소장이 됐다. 아버지를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는 것 말고는 내 삶은 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부족한 것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그녀보다 나의 삶의 훨씬 편안한 것이 되게 한 '변수'일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모든 교사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악의 축'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술과 담배는 물론 가출 등 온갖 문제에 빠지는 적이 없었다. 친구들과 댄스팀을 만들어 지역 축제 무대에 나가고 학교엔 수시로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문제아'였다. 차라리 성적이라도 나쁘면 대놓고 혼내겠지만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이 사회는 함부로 하지 않는다. 난 전교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런 나를 구속하는 하나의 빌미는 "애비 없는 자식"이었다.

어느 날, 머리에 젤(두발미용제품의 일종)을 바르고 학교에 등교한 나와 한 친구는 학생주임 교사에게 딱 걸렸다.

"머리 감고 와."

나와 친구는 머리를 감고 왔다.

"대가리 박아."

나와 친구는 소위 '원산폭격' 자세로 기합을 받았다. 그 교사는 한참 이러쿵, 저러쿵 다른 학생들에게 설교를 늘어놓다가 해선 안 될 말을 했다.

"하여간 애미, 애비 없는 것들은…."

그렇게 참고 버티면 해뜰 날이 오나요?

그 친구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였고 그 때문에 그 친구와 나는 함께 가출을 종종 했다. 그 친구의 친어머니를 만나러. 그리고 나에겐 아버지가 있지만 당시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다행히 내겐 그런 나를 이해해주는, 말이 통하는 어머니가 있었고, 무언가 부족하지만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그녀에겐 내게 있었던 그것들 중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상황들이 그녀에게 있었을 때 그녀는 그저 참아야만 했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겐 오직 참는 것만이 미덕이니까. 그저 버텨야만 하니까. 그렇게 참고 버티면 '해뜰날'이 오긴 올까?

한국사회가 IMF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할 즈음. 난 지방에 있는 한 기숙사형 '명문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도 위기를 어느 정도 빠져 나와 형과 어머니는 다시 아버지와 서울에서 살게 됐다. 한때의 부침을 겪었지만 부유한 축에 끼는 삶으로 다시 복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달랐을 것이다. 태생부터 가난했던 그녀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고 경제위기가 오건 말건 언제나 가난했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참고 견디면 '해뜰날'이 온다고 말하는 것이 이 사회의 상식이다. 하지만 애초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겐 '해뜰날'은 오지 않는다. 그것에 맞서 싸우거나 초인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해뜰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ppoppogle.tistory.com)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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