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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써니>의 한 장면
 영화 <써니>의 한 장면
ⓒ CJ E&M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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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에 나온 친구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 기자주

잠을 설쳐 일찍 일어났더니 아침시간이 엄청 길다. 미리 약속 장소로 가서 자동차나 정리하자 싶어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백화점 주차장. 도착하니 백화점 문은 굳게 닫혔는데 주차장 게이트는 열려있다. 아마 직원들을 위해 일찍부터 열어놨는가 보다. 가져온 물티슈로 이곳저곳을 닦고 뒤 트렁크를 열어 정리를 하는데 열시쯤 됐나, 눈에 좀 익은 느낌의 아줌마 한 분이 주차장 구석 벽에 기대어 서있다.

종이 인형에 옷 입히듯 큼지막한 흰 칼라 교복을 그 아줌마 얼굴에 쏘옥 넣어보니 영락없이 정순이다. 조각가가 되겠다고 모 여대 조각과에 들어가더니 졸업과 동시에 의대 나온 남자랑 결혼을 했다. 그동안 산부인과 의사인 남편과 딸 둘을 아주 조신하게 잘 보살피느라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던 친구. 다른 애들은 간간이 늙어가는 얼굴이 업데이트 되었건만 그래서 정순이는 꽤 낯설다. 자세히 뜯어보니 그래도 오목조목 40년 전 그대로다.

뒤이어 미국에서 이 여행을 위해 온 재순이. 미국에서 회계사 일을 하며 돈을 짭짭하게 잘 벌고 있는, 목 위로는 여전히 귀여운 친구다. 열순이도 왔다. 머리는 매우 비상하나 맘 내키는 대로 공부한 탓에 100점과 0점을 넘나들어 빵점 받은 선생님에게는 꽤나 미움을 받던 친구. 억대 연봉을 받으며 동남아를 누비며 일을 하는 자랑스러운 친구 은순이. 미국에서 이 여행을 위해 미리부터 와서 대기 중인 가죽바지 입은 모습이 예술인 선순이. 남편이랑 둘이서 온 동네 여행하기를 즐기는 우리들의 여행가이드 유순이. 우리들의 리더 윤순이. 그리고 나까지 총 8명이 오전 10시 30분 정시 도착. 두 차 가득 푸짐하다.

친구 8명과 함께 떠난 '추억여행'... "열대여섯 많은 오빠? 우리 남편이 낫네"

자, 떠나자. 놓쳐버린 우리들의 추억을 잡으러. 안면도로 고고~ 내가 윤순이 차를 뒤따라가기로 했다. 시동을 걸자마자 음악을 크게 틀었다. 1970년, 중학교 3학년 그 시절로! 음악은 당연히, 올드 팝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비틀즈, 톰 존스까지…

우리 8명 모두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그 당시 일명 '노는 애들' 취급당했던 우리들. 하지만 정작 우리들은 노는 게 뭔지도 몰랐다. 남보다 음악을 특히 좋아했던 죄. 식욕이 왕성해 근처 분식집에서 가락우동을 사먹은 죄. 칼라를 빳빳하게 풀 먹여 입으라는데 뒷목이 쓸려서 아프다고 풀 없이 그냥 다려 입은 죄. 뭐 그 정도? 효자동에 위치한 우리 학교 강당은 당시로는 제법 큰 편이고 깨끗해 트윈 폴리오나 히식스 같은 공연을 많이 했었다. 공연 전 리허설을 할 때면 쿵쿵거리는 소리가 너무도 궁금해 몰래 들어갔다가 선생님께 들켜 교무실에서 벌을 섰던 적도 많았다. 우리가 바로 오빠부대 원조인 셈이다. 트리퍼스 팬클럽이었던 우리들. '별이 빛나는 밤에' 일요콘서트에 트리퍼스 오빠들을 보러 계룡산까지 갔다가 다음날 학교 교무실에 불려가 줄줄이 손들고 서있기도 했다.

"을순아, 네가 그때 트리퍼스 드럼 좋아했었지? 윤순이도 드럼이었을 걸? 난 싱어였어."
"맞아, 정순이는 퍼스트 기타였어. 유순이가 아마 김훈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치?"
"그때 우리들 참 웃겼다.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며 뭘 어쨌다고 학교에선 그리 반대를 했는지 원…"
"하긴, 지금 생각하면 우리 남편들보다 열대여섯은 많은 남자들이네. 휴우, 우리 남편들이 훨 낫다."

그 시절 노래를 들으며 좁은 차 속에서 야단법석을 떨다보니 어느새 서해안 근처 식당이다. 메뉴는 굴 돌솥밥과 누룽지. 미리 시켜놓은 음식을 후다닥 먹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이제 30분만 있으면 목적지인 안면도 펜션이란다. 바닷바람이 좋아서 창을 활짝 열고 달렸다. 바람을 더 느껴보려고 팔을 밖으로 쭉 뻗었다. 스카프 대신 두꺼운 목도리를 휘이 날리며 이사도라 던킨 흉내도 냈다. 마치 영화를 찍는 것 같이.

"너희들, <써니> 영화 봤냐? 걔네들 우리하고 똑같이 놀더라. 담에 영화 찍자."
"그래, 영화 그거 우리도 해보자."
"근데 그 영화 보니까 무리지어 다니는 게 보기는 안 좋더라. 지들은 재밌겠지만 소외되는 다른 애들 생각해보면 말이야. 그래서 선생님들이 우리를 혼냈는지도 몰라."

20분쯤 갔을까. 갑자기 눈앞에 솔밭과 갯벌과 파란 바다가 알맞게 잘 버무려진 기막힌 풍경 하나가 화면 가득히 펼쳐진다. 사이사이에 예쁜 펜션도 보석같이 하나씩 박혀있다. 와우~ 콧구멍을 최대한 넓혀 숨을 들이마셨다. 모두들 하나같이 깔깔 낄낄대며 짐을 옮기면서도 와글와글 열심히 떠든다. 입이 쉴 시간이 없다. 먹거나 떠들거나. 둘 중 하나다.

저녁을 먹으러 간 횟집. 우리들의 가이드 유순이가 예약해놓은 집답다. 맛있고 싸고 푸짐하고 친절하고. 맥주와 소주를 곁들어 거하게 진탕 먹고 나오면서 또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소주 그리고 과자까지 가득 사들고 펜션으로 들어갔다. 방은 따뜻하고 공기는 시원~하고. 각기 취향대로 목욕도 하고 대충 씻기도 하고, 누워도 놀고 앉아도 놀고, 몸은 각기 다른 일을 하면서도 입은 같은 주제로 떠들며 화제를 이어나가고 있는 우리들. 참 가지가지 신기하다.

내 몸의 반쪽 키운 친구들... 폐경기 함께 겪으며 늙어가는 우리

영화 <써니>의 주인공들
 영화 <써니>의 주인공들
ⓒ CJ E&M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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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한 우리 친구들. 남이 하라는 건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어야 한다. 야단을 맞더라도 꼭 이유를 묻는다. 이런 애들은 비위만 잘 맞춰주고 개성만 잘 살려주면 남보다 더 잘 클 수 있다는데 학창시절에 그리 해주는 선생님을 못 만나서 그렇게 매 맞고 벌서고 노는 아이 취급을 당했나 보다. 그래도 지금은 다들 잘 자라(?) 나름 행복하게 살고들 있다.

여행에 오지 못한 친구 길순이. 무책임하고 낭비벽이 심한 남자 만나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이혼했다. 한참을 혼자 살다가 딸 둘 있는 9살 연상의 남자와 재혼해서 행복해하던 그 친구. "나 요즘 엄청 행복해, 이런 행복 오래갔으면 좋겠어"하더니 재작년에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졌다. 재혼해서 2년밖에 행복하게 못 살아봤는데 남편이 쓰러져 그 뒷바라지 하느라 이제껏 고생이다. 재혼해서 전처 딸 둘을 시집까지 보냈는데 남편 병이 나아질 확률은 없단다. 그래도 어쩌랴 싶으면서도 2년간의 짧은 행복이 가져다준 짐이 너무 큰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오래 전 이혼해서 딸 하나 데리고 씩씩하게 잘 사는 은순이. 지난해 가을이었나. 그녀에겐 스무 대여섯 살 된 예쁜 딸이 있다. 내 딸 얘기하다가 "네 딸은 결혼 안 하느냐"고 물었더니 딸보다 자기가 먼저 시집가야 되겠단다. 가을을 타는지 외로워 죽겠다며 소개팅을 부탁해서 이혼한 의사 한 명을 소개시켜 줬더니 두 번 만나더니 알콜중독자 같아서 싫단다. 그러더니 어느 날. 우연히 나간 소개팅 자리에 그녀의 옛 남자 친구를 만났단다.

대학시절 은순이를 혼자 짝사랑하던 친구라는데 그 남자도 이혼해 혼자 살고 있다가 은순이를 만난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가 시집이라도 가는 양 모두가 흥분했었다. 재혼할 때 우리들이 예쁜 드레스 입고 들러리까지 서주기로 했다. 들러리 옷을 고민하고 있는데 연락주기로 한 애가 깜깜 무소식. 참지 못해 전화해보니 헤어졌단다. 가족도 따로 있고 재산도 따로 있고. 그 처리도 매우 애매하고. 오랫동안 혼자 살다 합치려니 좋을 땐 좋지만 부담도 많이 되더란다.

"그래, 이 나이에 새로 시작하느니 돈도 있고 직업도 있고 딸도 있고 우리들도 네 곁에 있고. 골치 아픈 사람 하나 떠안지 말고 혼자 실컷 연애만 하고 살아라. 원하는 대로 살아도 인생 짧아"라고 조언했었는데. 그 후 실컷 연애하고 일도 열심히 하면서 잘 살고 있단다. 공짜 점심은 없다던데 재혼을 하는 게 좋은지 혼자가 좋은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몸이 아직 덜 여물었을 때 만난 우리 친구들. 내 몸의 반쪽은 친구들이 키웠고 친구들 몸의 반쪽은 내가 키웠다. 같이 바라보며, 생리도 시작하고 유방도 커지고 다리도 길어지고 장래도 걱정하며 사춘기를 보내던 친구들.

4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이 바라보며, 생리도 마무리하고 허리에 파스도 붙여주고 관절도 주물러 주고 자식들 결혼도 걱정하며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 그들과 함께 자란 내 몸이 그들과 함께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서울로 돌아와 처음 만났던 곳에 그들을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트리퍼스만 보면 '오빠'를 부르며 자지러지던 친구들의 옛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해가며 옛 추억에 젖어 천천히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다 거울에 비친 눈에 익은 아줌마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저 여잔 누구야, 에이씨~ 엘리베이터에 왜 거울이 필요한 거야.'


태그:#써니, #친구들, #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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