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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한나라당이 '한미FTA' 비준안을 기습 강행처리한 가운데 진압복을 차려입은 경찰병력이 바리케이트가 쳐진 국회 북문앞에 배치되어 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22일 오후 한나라당이 '한미FTA' 비준안을 기습 강행처리한 가운데 진압복을 차려입은 경찰병력이 바리케이트가 쳐진 국회 북문앞에 배치되어 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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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날치기였다. 경호권이 발동된 국회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유리창도 산산조각났다. 취재도 사실상 봉쇄됐다. 한나라당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5분의 기습작전'을 벌여 처리했다. 이 비준안을 순식간에 압도적으로 통과시킨 미 의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누가 국익을 챙겼는가? 양국의 비준안 처리 과정만 보더라도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한국의 통상주권이 날치기 당했다고 성토하고 있다.

양국 간 수출입 물품 사이의 관세를 없애는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 아이 급식 재료부터 각종 먹거리, 의약품, 공과금, 부동산 등에 이르기까지···. 물론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기업, 국민 모두가 협정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미국으로의 경제통합뿐 아니라 우리 정치, 사회, 문화까지 뒤흔들 수 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낯선 식민지"라고 불렀다.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 '개방만이 살길'이라는 것이다. 유럽연합에 이어 거대시장인 미국을 선점해야 우리 기업들이 큰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질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어 이익이라고 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국내 상위 1% 상류층이나, 일부 수출지향의 대기업들이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 소기업과 상공인, 자영업자 등 서민들은 정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상 한국농업은 고사(枯死)할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거대 유통업체들과 이미 피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골목가게들도 마찬가지다. 경쟁력이 밀리는 중소기업들의 도산은 불 보듯 뻔하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강화'라는 말로 포장시킨다.

의약품 값이나 의료비 폭등은 더는 전망이 아니라 현실이다. 버스와 철도, 전기 등 각종 공공서비스도 예외가 아니다. 금융과 지적재산권 등 서비스는 사실상 미국식 시스템을 그대로 이전시키는 꼴이다.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한미FTA를 '끔찍한 미래'라고 하는 이유다.

"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FTA"... 결국 5분 만에 날치기 통과

한미FTA는 지난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년연설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 참여정부의 FTA 추진 일정에서, 미국은 한참 뒤에 밀려 있었다. 집권 초기 노 전 대통령 역시 유보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이 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한미FTA 협정 추진 배경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문제는 협정 추진 과정에서 국민적 동의나 합의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미 양국 간의 관세율 등을 봤을 때, 미국에 유리한데도 무리하게 추진했다. 특히 협상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국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스크린쿼터, 의약품 값 재조정, 배기가스 규제완화 등 이른바 '4대 선결조건'까지 들어줬다.

우석훈 2.1경제연구소장(경제학 박사)은 "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FTA"라고 했다. 우 소장은 "대체로 양국간 FTA는 관세율이 낮은 나라가 높은 나라에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것이 상식"이라며 "한미 양국간 제품 관세비율이 각각 다르지만, 대체로 미국은 평균 2%, 한국은 8% 정도로 봤을 때 한국이 미국에 FTA 협정을 요구한 것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게다가 협상을 하기도 전에 4대 선결조건 등 결정적인 카드까지 다 내주면서 시작했다"면서 "오히려 미국이 한국의 '저의(?)'를 의심할 정도"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시작된 협정은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07년 4월, 10개월 만에 타결됐다. 타결 전날 노동자 허세욱씨가 분신자살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의회와 정권교체기의 미국은 철저하게 자신들 이익에 따라 움직였다. 2008년 4월께 한국에서의 미국산 쇠고기 길을 열어젖혔다. 국민 건강권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거대한 '촛불 저항'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후 한국에 재협상을 요구해 왔고, 자동차 등에서 또 다시 이익을 챙겼다. '협정문 토씨 하나 손 못 댄다'던 우리 정부는 미국 쪽 요구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이해영 교수는 "한마디로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이라며 "자동차 재협상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시장을 좀 더 보호하게 됐고, 우리는 사실상 한미FTA 이익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통상관료들은 이런 협상의 초기부터 추진과정과 내용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국회 차원의 견제와 의견 수렴, 합의 과정은 철저히 무시됐다. 이는 한-EU FTA에 이어 한미FTA 협정문에서 수백 개의 번역 오류로 나타났고,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고 말았다.

정부 역시 자신들이 국회에 낸 비준동의안을 스스로 철회하는 굴욕을 당했다. 물론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사퇴 압력에도 굳건히 버텼다. 이렇게 황당하고, 불평등하고, 부실한 한미FTA 협정문이 22일 국회서 5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됐다.

경제·사법주권 뒤흔들 독소조항 그대로... "공공성 구현 어려워질 것"

22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성당 인근 차도에서 경찰들이 물대포(살수차)를 동원해 시위 참가자들을 강제해산시키자, 인도로 올라간 시위 참가자들이 한미FTA 비준안 한나라당 단독처리를 규탄하며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22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성당 인근 차도에서 경찰들이 물대포(살수차)를 동원해 시위 참가자들을 강제해산시키자, 인도로 올라간 시위 참가자들이 한미FTA 비준안 한나라당 단독처리를 규탄하며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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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정문 내용은 더욱 치명적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비롯해 역진방지조항(레칫), 의약품 허가-특허 연계, 금융세이프 가드, 개성공단 조항 등 협정문 곳곳에 독소조항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특히 ISD의 경우,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미국과 재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부도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시민사회단체에서 요구해 온 "ISD 제도 자체 폐기'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하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는 "미국과 (한미FTA) 발효 이후 운영하기로 합의한 투자위원회에서 ISD 등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ISD는) 글로벌 스탠더드이며, 우리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미FTA의 ISD에서는 정부가 중재 결정을 따르지 않을 경우 미국이 FTA 관세폐지를 정지시킬 수 있는 무역 보복을 할 수 있다. 철저하게 거대 기업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당 국가의 법적, 제도적 장치까지 바꿀 수 있는 것이 투자자국가소송제도다. 

연구단체 '건강과 대안'의 이상윤 책임연구원은 "우리 정부가 술이나 담배 등 유해식품을 규제하는 건강정책을 펼 때,  다국적 기업이 차별 받지 않는 합리적인 규제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면서 "호주가 최근 강력한 금연법을 제정했지만 미국 담배회사 필립모리스가 수십 억 달러에 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호주는 미국과 ISD를 맺지 않았지만, 호주와 홍콩이 맺은 협정에 들어있는 ISD 규정을 통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역진방지조항 역시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톱니'로 번역되는 '레칫'의 경우 기계를 앞으로만 가게 할 수 있고, 뒤로 돌릴 수 없게 한다. 일정 수준으로 시장 개방을 정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난 2006년 국내 영화의 의무적인 상영일수(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인 이후, 다시 73일 이상으로 늘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의약품의 허가와 특허 연계 조항은 국내 제약업계에 큰 타격을 입힌다. 물론 의약품값 인상도 불 보듯 뻔하다. 이 조항은 제약회사가 복제약을 만들어서 판매를 요청할 경우, 해당 오리지널 약의 특허권을 가진 회사에 이를 통보하도록 한 것이다. 통보받은 회사가 특허권 침해라고 하면, 복제약 생산은 불가능해진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자동차나 화장품 등에선 이 제도는 적용되지 않는다"면서 "미국이 내놓은 지난 2007년 5월 신통상정책에서도 이 조항은 독소조항으로 규정돼 있으면서, (미국과)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 등과의 FTA에선 이 조항이 삭제됐다"고 설명했다. 

이해영 교수는 "한미FTA는 현대 FTA에서 독소조항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라면서 "협정이 정식으로 발효되면, 우리 정부의 각종 공공정책이 제약 돼 공공성 구현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이어 "한미FTA 발효는 우리에겐 끔찍한 미래로 다가오게 된다"면서 "정부 계획대로 내년 1월 협정이 발효되면, 국민적인 협정 폐기운동으로 돌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치적으로는 내년 4월 총선에서 현재의 야당이 다수당이 돼서 미국에 협정문 개정을 요구해야 한다"면서 "이어 내년 대통령 선거 이후, 정권이 바뀌게 되면 국민적 합의를 거쳐 미국에 협정 폐기를 선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그:#한미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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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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