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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사람이 꽉 들어찬 모습
 지하철에 사람이 꽉 들어찬 모습
ⓒ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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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25억여 명의 승객들이 이용하는 서민의 발, 지하철. 버스처럼 길이 막힐 일도 없지만, 이용객이 많을 때 타면 어떤 운송수단보다 피곤해지는 지하철.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지하철에게 다른 별명을 지어줬다. 바로 '지옥철'이다.

'월요일' '오전 8시' '2호선' '강남역' 등과 같은 특정 조건이 성립되면 지하철은 이내 '팔열지옥(八熱地獄)철'로 변신한다. 이때 출근하는 직장인이나 등교하는 대학생 대부분은 말이 없어지고, 숨이 가빠지며 식은땀을 흘리게 된다. 김정현(21)씨는 출퇴근길 지하철을 "충격과 공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지하철에는 이런 충격과 공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 통에 살아남은 전우들에게 지하철 플랫폼에 있는 매점과 자판기는 구세주마냥 손을 내민다. 과거 내가 어머니 팔에 매달려 지하철을 타던 초등학교 시절, 과자와 음료수 등이 가득했던 매점들과 자판기는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또 지하철에서만 볼 수 있었던 3분 완성 증명사진 촬영기도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지하철을 보면 매점, 자판기, 가판대가 전부였던 그때 그 시절 풍경이 아니다. 물론 예전에도 지하상가가 발달했던 지하철역이 있었지만, 최근 지하철 상권은 변화 중이다. 화장품이나 모자를 파는 가판대부터 휴대전화매장과 속옷판매장도 모자라 아예 지하철 역 안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잠깐 쉴 수 있는 카페에 미용실까지 생겼다.

지하철에 흩날리는 커피향... 발길을 붙잡네

역사 안 카페
 역사 안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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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 선릉역에서 떡을 파는 30대 업주는 "과거 지하철에서 가판대나 매점 운영은 장애인에게 우선권이 있었다"며 "하지만 그런 시대는 갔고 지금은 지하철 입점이 입찰제라 과거보다 다양한 업체들이 지하철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최근 지하철 역사 안에서 99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 체인점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강미소(22)씨는 "교통카드 찍고 나가면 커피 향이 나서 한 번 더 카페 쪽을 돌아본다"며 "가격도 부담 없고, 맛도 일반 커피전문점과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또 "지하철 가게라면 공기도 탁하고, 뭔가 답답한 인상이었지만 최근에는 정말 많이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여자 손님들이 말해주던데, 예전에 우리 가게가 없을 때는 이쪽 출구가 음침해서 다른 곳으로 돌아나갔다고 하네. 뭐 우리 가게도 들어오고 상가가 많이 발달해서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요새는 지하철 가게라고 해서 사람들이 안 좋게 보거나 피하는 것도 없어. 보통 출근 시간 직장인들이 아침거리로 많이 사 먹긴 하지만, 낮이나 퇴근 시간에도 여기를 들르는 고객들도 많아요. 덕분에 단골손님도 생겼고."(역삼역에서 도넛을 판매하는 40대 여성)

1·3·5호선 종로3가역 지하철 카페에서 커피를 구매한 한 여성은 "내가 살아오면서 봤던 지하철은 사람들의 지친 표정에 정신없는 광고가 더해져 약간은 산만한 분위기였다"며 "하지만 요즘 지하철은 아주 밝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지하철에서는 머리를 우주샴푸로 감아요
승강장 옆 미용실... 합성이 아닙니다
 승강장 옆 미용실... 합성이 아닙니다
ⓒ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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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자르며 졸고 있는데 어디선가 안내방송이 나온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꿈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실제 7호선 건대입구역에는 역사 안에 미용실이 있다. 보통 지하철 상가는 승강장 밖 역사에 있지만, 이 미용실은 특이하게 열차를 기다리는 승강장 바로 옆에 있다. 사진을 찍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한 어르신은 "요새는 지하철에 미용실도 다 있구먼"이라며 웃는다.

3평 남짓한 공간에서 2년째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용사 19년 경력의 박을선(41)씨. 박을선씨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듯 한 번씩 쳐다보면서 지나간다"며 "보통 지하철 상권이 발달해도 가게들이 대부분 승강장 밖에 있는데 우리 가게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상점은 무조건 밖에 있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깬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어르신 또 오셨네요? 머리가 금방금방 자라시나 봐요. 하하. 이쪽으로 앉으세요." 

어르신은 이 미용실의 단골이다. 익숙하게 겉옷을 옷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은 어르신 손님. 이 어르신은 "집 가는 길에 잠시 들러서 머리를 할 수도 있고, 가격도 6000원이라 저렴해서 자주 오다 보니 어느새 단골이 됐다"고 박씨를 보며 히죽 웃었다.

기자도 달리는 열차를 배경으로 머리를 다듬어봤다. 머리를 깎기 전에 미용사 박씨는 스프레이 같은 제품을 머리에 뿌리고 감겨주기 시작했다. 박씨는 "이 샴푸는 우주인이 쓰는 샴푸여서 물이 필요 없습니다"라며 "그냥 이렇게 감고 종이 수건으로 털어내면 끝이에요"라고 귀띔했다.

내 주문은 '숱을 많이 치고, 길이는 전체적으로 짧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저가의 남성 전용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면 '버섯 머리'가 될까 봐 걱정한다. 버섯 머리란 바리깡(이발기)으로 뒷머리와 구레나룻을 하얗게 쳐올리는 머리 스타일. 나도 체험 삼아 머리를 맡기긴 했지만, '곧 내 머리가 버섯이 되겠구나'라며 내심 긴장했다. 하지만 웬걸? 처음부터 끝까지 바리깡은 쓰지 않고 가위로 머리를 다듬어줬다.

박씨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우주 샴푸로 감긴 다음 "찝찝하시면 헹궈 드릴까요? 이쪽으로 오세요"라며 구석에 있는 미용 세면대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는 따로 수도나 전기를 끌어오기 어려운 공간"이라며 "에어컨 설치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었고, 수도관이 들어오지 않아 직접 물을 길어 와 수도 펌프로 머릴 헹궈 드리고 있어요"라고 한다. 구석에 놓여 있는 20리터짜리 물통이 눈에 들어왔다. 이어 박씨는 "지하철 기준 소방규격 등을 준수해야 하니까 불편한 부분도 있지만 큰 어려움은 없어요"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하철의 변화, 기대됩니다

신 논현역 전경
 신 논현역 전경
ⓒ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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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하철은 과거와는 달리 운송수단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문화·상업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설동명(27)씨는 점점 바뀌는 지하철 상권에 대해 "지하철공사는 공간 활용을 통한 임대 수익, 가게 점주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지속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게다가 승객은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으니 서로서로 좋게 되는 현상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경란(24)씨는 "유류 값이 올라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이용객이 해마다 증가할 텐데, 지하철 상가들이 깔끔하게 돼 있으면 보기에도 좋고 편리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각종 전시와 공연은 물론이고,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잠시 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공간, 지하철. 앞으로 지하철에 어떤 새로운 공간이 생길지 궁금해진다.


태그:#지옥철, #지하철, #지하철 카페, #지하철 미용실, #우주 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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