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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정 엄마>에서 암에 걸린 지숙역으로 나온 배우 박진희
 영화 <친정 엄마>에서 암에 걸린 지숙역으로 나온 배우 박진희
ⓒ 싸이더스 F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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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이면 한 번씩 남편과 함께 종합검진을 받기 시작한 지 올해로 3년째다. 검진을 받은 지난 4일은 인생 처음으로 내 삶을 튜닝하고 점검한 날이다. 4시간에 걸친 종합검진의 마지막 순서. 위와 대장 내시경을 끝내고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걸어나오는데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위와 장에 특이한 물질이 있어서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음식을 드시지 마세요."
"심각합니까? 혹시 암입니까?"
"꼭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조사를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마취 때문인지 정신적인 충격 탓인지 몸이 휘청거려 옆에 있는 탁자 모서리를 잡았다. 남편은 나보다 먼저 검사가 끝났는지 휴게실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반가워한다. 공짜 쿠폰을 손에 쥐고 흔들며 위층으로 같이 올라가 죽을 먹잖다. 조직검사 때문에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는, 죽 대신 주는 쿠키박스를 가슴에 안고 앉아 혼자서 전복죽을 신나게 먹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열흘 후 조직검사 결과에서 암이라고 하면 어쩌지?' 우울한 표정을 한 나를 보고 남편이 위로랍시고 한마디 한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지난해에도 검사했잖아. 그때는 깨끗했었으니까 만약 걸렸어도 완치 가능할 거야."
"걱정 안 해. 내 몸이 어디 내 맘대로 되디? 다 운명이겠지, 뭐."

눈앞은 새하얗게 다른 세상이 펼쳐졌는데도 입에서는 쿨한 척, 생각과는 다른 말이 삐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에 와 침대에 누웠다. '아, 내가 암일지도 모른다니. 나도 암에 걸릴 수 있다는 걸 여태 왜 몰랐을까.' 빈속에 누워있는데도 속이 영 거북하다. 이 정도 증상이면 어쩌면 일 년 만에 엄청 많이 퍼졌을지도 모르겠다.

벌떡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검색어에 '위암'이란 글자를 채워 넣었다. 위암 환자가 수술 후 5년 생존할 확률이 67%란다. 위암 수술은 세계에서 한국이 제일 잘한다고 하니 일단 내가 한국에 있는 건 그나마 행운이다.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으려니 진짜 중증환자가 된 기분이다.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한 마디... "위와 장에 이상한 물질이"

음식이 중요하다는 인터넷 검색 내용을 보고 집 앞 유기농 야채 파는 가게에 들르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오는데 경비 아저씨가 묻는다.

"어디를 부지런히 가세요?"

내가 어딜 가든 뭔 상관? 억지로 쓴웃음을 지어보이곤 지나쳐 걸었다. 필요한 야채를 사고 돈을 내는데 주인이 말을 걸어온다.

"이 무시래기, 껍질 깐 거라 엄청 부드러워요. 살짝 삶아 볶으면 남편들이 무척 좋아한대요."

'남편이 좋아하든지 말든지.' 대답도 하기 싫다. 나오지 않는 웃음을 만드느라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집에 들어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이 울리기에 보니 남편이다.

"너무 걱정 마. 아닐 확률도 많대."

'그걸 위로라고… 그리 쿨할 수 있어 좋겠다.' 수술 후 5년 생존이면 다행히도 환갑은 간신히 넘기나 보다. 애들 얼굴이 떠오른다. 다행이다, 둘 다 결혼은 시켰으니. 곧 걔네들이 애를 낳으면 내가 봐줘야 하는데. 어쩌면 할머니 노릇은 해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 싶으니 눈물보다 한숨이 먼저 나온다.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을까.' 밥맛은 없어도 먹어야 그나마 5년이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쌀을 씻어 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찢어놓은 북어로 국을 끓이려 찌그러진 냄비를 찾는데 갑자기 오래전에 사서 아껴둔 냄비가 생각난다. '나 죽으면 다른 여자가 내가 아껴둔 물건 다 쓸 텐데 죽기 전에 내가 다 써버리자.'

틀어놓은 TV에서는 아프리카 난민 어린이를 안고 있는 김혜자의 모습이 나온다.

'아, 나도 저런 가난한 나라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 돕고 싶었었는데. 이제는 못 가겠구나. 모르는 척하고 남은 인생 5년을 저 곳에서 봉사하다가 죽을까. 아니다, 그건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폐가 되겠구나.'

일찍 들어온 남편이 괜히 오버하며 유머랍시고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늘어놓는다. 내가 걱정이 되는지 나를 즐겁게 한다고 하는 꼴이다.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통 잠이 오지를 않는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쯤 되어 잠깐 졸다가 깼다.

'애들도 다 컸고 회사도 내 대신 더 열심히 할 사람이 있고. 음… 남편이 문제겠구나. 요즘 양평에 같이 지낼 집 짓는다고 둘이 붙어 다녀 정이 한참 다시 새록새록 붙고 있었는데. 아… 죽기 싫다.'

'폐암 선고'에 옛 사람들 찾아 나선 친구... '사는 날까지 제대로 살자'

연애다운 연애 한번 못 해보고 결혼해서 이제껏 살아온 나. 뒤돌아 추억해 볼 남자도 별로 없고 만나보고 싶은 남자도 없고. 새로 연애도 못하고. '내 몸을 스쳐간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다 뭐하며 살까.' 이게 <별들의 고향>에서의 경아의 독백이었지 아마.

그러다 청담동에서 피부과를 하는 친구 말이 생각났다. 기침을 하도 많이 해서 병원에 갔더니 폐암이라 했단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스쳐지나간 옛 남자들 생각이 나더란다. 며칠 후 과거의 남자들을 하나씩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다 뜻대로 안 되더라고.

"내가 좀 찐하게 저녁 먹으며 술 한잔 하고 싶은 남자는 점심 먹자 하고, 간단하게 점심만 먹으며 얼굴 한번 보고 싶었던 남자는 저녁 먹으며 술 한잔 하지고 하고. 그것도 뜻대로 안되더라. 내가 많이 좋아했던 남자친구는 지금 사회에서 잘 나가서 엄청 바빠 점심시간 밖에 못 내고, 그저 그런 찌질이 남자친구는 지금도 그저 그렇게 찌질하게 살아서 시간이 널널한 게야."

그 의사 친구. 그때 그 결과가 오진이어서 지금은 부부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나도 오진이었으면. 늘 음악을 크게 틀고 지냈지만 이제 그 좋아하던 음악도 싫다. 며칠 동안 우거지상을 하며 걱정하고, 억울해하고. 일도 안 나가고, 글도 안 쓰고, 살림도 안 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결과가 나오기까지 3일 남았다. 지금 이대로 살면 5년은커녕 한 달도 못 넘길 것 같다.

'방사선 치료하면서 머리가 다 빠지면 어쩌지? 친구들 면회는 거절할까. 아니 몇 명만은 오라고 할까. 그냥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죽는 게 더 깔끔하지 않을까. 아냐 그건 자살이니 안 돼… 아님 지진이 나서. 아님 산사태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는 날까지 제대로 살다 생을 마감함이 옳다. 양평 집에 들어가 책이나 쓰자. 내 삶의 마지막 순간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어 순간순간 기록하자. 그게 가장 나답다. 가능하면 완치가 되도록 열심히 의사 말을 따르고 노력하면서 내 일생을 멋지게 정리하자. 주어진 정리 시간. 딱 5년이다. 짧다면 짧겠지만 길다하면 긴 시간이다.

두꺼운 노트를 꺼내서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볼펜을 꾹꾹 눌러 적기 시작했다. 적고 보니 꽤 많다. 거의가 봉사와 나눔의 일들이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시리즈' 책들이 생각난다.

그 후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인터넷을 뒤져서 위암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임신했을 때는 온통 길거리에 임산부만 보인다더니 암에 관심을 두니 암 걸린 사람들이 참 많기도 하더라. TV나 신문에서도 '암과 싸워 이긴 의사의 암 퇴치법', '암을 이기는 음식들', '암, 정복할 수 있다' 등 수도 없이 많이 보인다. 틈틈이 시간만 나면 인터넷을 뒤져 연구를 했더니 차차 마음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암 완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자. 5년이면 보람된 일을 시작해 볼 만한 충분한 시간이다. 남은 5년을 남들의 25년 같이 살자. 그럼 25년을 더 사는 셈이다. 아자아자! 힘내자.'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오전 10시... 1시간이 지나 걸려온 전화

기도도 열심히 했다. 나도 모르는 잘못을 꽤나 많이 했을 거다. 용서도 빌었다. 그나마 심장마비 같이 갑자기 죽지 않고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하다고도 했다. 드디어 내일 결과가 나온다. 밤에 침대에 누웠는데 도통 잠이 안 온다. 뒤척이다 아침이 되어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만 지나면 결과를 전화로 통보해줄 것이다. 아 참, 전화 오면 잘 들려야 하니 배터리도 100%로 채워 넣고 메모지와 펜과 돋보기도 준비해놓고. 놀라지 않고 속을 달래줄 마실 물도 준비하자. 절대로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겁내지 말자. 운명에 맡기자. 만약 위암이라 해도 이제껏 연구한대로 진행하면 된다.

병원에서 전화로 결과통보를 해주기로 한 14일 오전 10시. 연락이 없다. 머리가 빙빙 돌면서 어지럽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30분이 넘었다. 괜히 헛구역질이 나면서 토할 것 같고 어지럽다. 45분이 넘었다. 도저히 못 앉아 있겠어서 소파에 누워 버렸다. 전화가 왔다. 남편이다. 그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얼른 전화를 끊고 나서 소파에 다시 누웠다. 이제는 멀미까지 하는지 천장이 빙빙 돈다. 두두두두르두!!! 10시 55분. 핸드폰 벨 소리다. 아, 하느님…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다.

아니란다, 암이 아니란다! 떼어내 검사했던 뱃속의 이상한 조직이 암세포가 아니라 염증 덩어리였단다. 죽음의 긴 터널을 나와 햇빛을 본 기분이다. 햇빛이 너무도 찬란하다. 열흘 만에 처음으로 맑은 날씨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지난 열흘 동안 날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난 240시간 겪었던 아픔들. 자동차 튜닝을 하듯, 피아노 조율을 하듯, 그 아픔 덕분에 내 삶이 재정리 된 느낌이다. '5년 안에 급히 하려던 일. 25년 동안 천천히 쉬어가며 일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을 나오니 경비 아저씨가 보인다.

"아저씨, 뭘 그리 열심히 청소하세요? 부지런한 아저씨 덕분에 우리 아파트가 제일 깨끗해요."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워 신발 신는 걸 깜빡했나 해서 발을 들여다봤다. 다 헤어진 운동화가 예쁘기만 하다.


태그:#위암, #튜닝, #종합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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