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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균 역장의 행동을 기리는 기념비
 김행균 역장의 행동을 기리는 기념비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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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영등포 역에는 작은 기념비 하나가 있어 오가는 승객들을 맞는다. 2003년 11월 세워진 비는 한 의로운 철도원의 선행을 기리고 있다. '그대의 고귀한 희생을 가슴 깊이 새기리라'라는 문구 속, '김행균'이라는 이름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그 이름은 많은 철도원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지금부터 8년 전인, 2003년 7월 25일 아침의 일이다. 당시, 역 주변을 둘러보던 철도원 김행균(51)씨는 선로를 향하는 어린 아이를 발견한다. 새마을호 열차가 역내로 들어오는 위험천만한 순간, 그는 곧장 달려들어 아이를 선로 밖으로 밀쳐냈다.

하지만 자신은 중심을 잃고 선로로 떨어졌고, 곧 육중한 열차가 그를 덮쳤다. 끔찍한 사고였다. 어린 생명을 구한 의인은 이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수술 경과가 좋지 못해 7번이나 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후에도 고된 재활의 길을 걸어야 했다.

한 철도원의, 한 아버지의, 한 남자의 삶에 위기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사고 후, 재활의 고통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후회나 포기'를 생각한 적이 없다. 힘들 때마다, 단 하나의 꿈을 꿨다. 다시 철도 현장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꿈.

꿈에 대한 의지는 한 남자를 다시 서게 했다. 사고 후 1년 김행균씨는 그토록 그리던 철도원으로 복귀했다. 자신을, '평범한 철도원'이라고 표현하는 그, 지난 8년 동안의 삶은 작은 기적이라 할만 했다. 김행균씨를 만나 한 철도원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철도원, 천직이었다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역장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역장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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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김행균씨는 현재 지하철 코레일 개봉역 역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매일 5만여 명의 이용객이 찾는 개봉역, 그는 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지하철 이용객들의 불편 사항을 체크하고, 도움을 주고 있다. 이용객에게 친절한 그의 모습은 역장의 권위 대신, 철도원이 푸근함이 느껴진다. 그를 만나 첫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김행균 역장님. 최근 근황이 궁금합니다.
"네, 저는 현재 코레일 1호선 개봉역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이 직원이 많은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나서 이곳 저곳을 살펴야 합니다. 밤사이 상황도 살펴보고, 시설물도 둘러보고, 또 많은 승객이 이동하기에 응급환자도 발생하는데. 이런 부분에 신경을 씁니다."

- 여전히 현장을 잘 살피시는 것 같습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지금 (사고 후) 8년이 지났지만, 예전처럼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을 합니다. 연속성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크게 달라진 것 없습니다. 다만,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예전과 같이 달리지를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가는 것, 그런 점이 좀 달라졌습니다."

업무를 하고 있는 김행균 역장의 모습에서 철도원이란 직업이 천직처럼 느껴진다. 문득, 그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 철도원 꿈은 어떻게 가지신 건가요? 천직이신 것 같습니다만,(웃음)
"61년 태어났는데, 서울 마포 산동네에 살았습니다. 제가 사는 산동네 주변에, 하루에 4번 운행하는 기찻길(당인리선)이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지요. 그래서 철도가 정겨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꿈이 마도로스(선장)와 기관사였습니다. (웃음) 하지만 고등학교에 갈 당시, 당시 아버님이 아프시고, 형님도 군대 가고 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학비가 무료인 '국립 철도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적성에 잘 맞았고, 나쁘지 않았습니다."

▲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역장을 만나다
ⓒ 곽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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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철도원의 첫 발을 내딛으신 거군요. 첫 근무지는 어디셨나요?
"부산이었습니다. 1979년 12월로 기억을 합니다. 당시 한 겨울에 발령을 받았는데,  바닷바람이 워낙 세서 고생을 했습니다. 화물열차행선지 별로 정리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 혹 그 당시, 결혼도 하셨나요?
"네, 첫 부임을 받을 때 부산, 포항 등지에 있었는데, 아내를 포항에서 만났습니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친구의 친척 동생을 보고 마음이 갔지요. 아내도 제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는지. 만남을 가졌고 결혼을 했습니다."

많은 신입사원이 그렇듯, 김행균 역장도 철도원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넘쳐나는 그런 젊은이였다. 1990년 초반, 서울로 자리 이동을 한 그에겐 파란만장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철도원의 아픔, 고통이 찾아오다

11일, 개봉역 이용객을 돕는 김행균 역장의 모습
 11일, 개봉역 이용객을 돕는 김행균 역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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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후유증이 밀려오던 당시, 적잖은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잃고 목숨을 끊었다. 철도에서는 유독, 그런 사고가 잦았다. 누군가의 끝을 본다는 것은, 철도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 1990년 대 후반, 철도에서 (자살) 사고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에서 현장 근무를 하다보면, (자살) 사고를 많이 접합니다. IMF 이후, 사건 사고가 유독 많았습니다. 열차가 통과하는데, 뛰어들고 그런 일들이…. 제가, 서울 지하철의 한 역에 3년 동안 있으면서 사고처리를 7번 정도 했습니다. 열차사고는 정말 참혹합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을 치우다 보면 마음이 많이 아프곤 합니다."

2003년 4월, 그는 서울 영등포역 열차운용팀장으로 이동을 한다. 신입 사원시절의 열정을 잊지 않고, 열심히 현장을 누비던 철도원, 하지만 6개월 후,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 2003년 4월. 영등포 역 부역장으로 발령을 받은 후, 6개월 후 사고가 발생했죠? 진입하는 열차을 못 보고 선로로 향하던 아이를 구하다, 큰 사고가 났던 것이지요?
"네, 사고가 일어나고 처음에는 철도원으로 복귀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왼쪽 발목과 오른쪽 발등이 잘리는 사고가 일어난 후, 다리 접합을 했는데 기능이 없어서 결국 절단을 했습니다. 7번 정도 수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행균 역장
 김행균 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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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매스컴에서 의인으로 많이 보도됐고, 팬카페도 생기셨었습니다.
"네, 그래서 사실, 부담이 됐었습니다.(웃음) 팬카페에는 죄송했지만 여태껏 글도 한 번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지, 철도원이라면 모두들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인데 너무 크게 보도되고 그런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 당사자 입장에서는 '현실'이기에, 좌절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좌절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수술이 잘 안 돼 7번 정도 계속되다 보니 힘들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자연히 희망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있다 보니, 더 어렵고 아픈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 제가 힘들다는 소리를 못하게 됐습니다.(웃음)"

1년 여의 기나긴 재활이 이어졌다. 디딤돌이 될 다리가 없었기에, 재활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자, 작은 기적은 일어났다. 100m, 200m, 하루하루 그의 발걸음은 늘어났고, 마침내 재활에 성공했다.

- 사고 후, 1년여 만인 2004년 8월, 복귀를 하신 거지요?
"네, 처음에 회사에서 내근직을 배려해줬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현장 업무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을 드렸습니다. 회사에서도 제 상태를 지켜보고 복귀를 시켜줬습니다." 

평범한 철도원이 빚은, '작은 기적'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역장. 그는 자신을 '평범한 철도원' 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역장. 그는 자신을 '평범한 철도원' 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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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6년 7월 27일에는 코레일 부개역의 역무과장을 거쳐, 2007년 6월 27일, 가산디지털역 역장이 됐다. 그 후 역곡역 역장을 거쳐, 현 개봉역 역장이 됐다. 기분 좋은 소식도 있었다. 2008년 '코레일을 빛낸 인물'로 수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이력에 대해 겸손해했다. 자신에 대해 '평범한 철도원'이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 자신에 대해 OOO철도원 이라고 수식어를 붙인다면요.
"음… '평범한' 철도원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평범한 철도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도전에 나서기도 한다. 바로 북한산 등산과 자전거 타기가 그것이다.

- 혹 등산을 다녀오신 적은 있나요?
"네, (사고 이후에도) 북한산이나 서울 근교 산을 많이 갔습니다. 사고 전에는, 지리산 종주를 6번 정도 했고, 강원도 산도 자주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울 동네 산을 자주 갑니다. (웃음) 올라갈 때는 빠르게 가곤 했는데, 내리막길에서 많이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관절이 좀 안 좋아 최근에 많이 못 갔습니다."

- 자전거요? 설마, 자전거도 타시나요?
"네, 시도해봤는데, 되더군요. 그 후로 자전거도 시간 날 때 많이 타고 있습니다. 오르막길 오를 때는 전동자전거 보조장치를 이용하지만, 보통 길은 그냥 갑니다.(웃음)"

아름다운 철도원이 젊은 세대에게
 아름다운 철도원이 젊은 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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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를 잃은 절망에서, 재활, 그리고 복직, 그리고 등산, 거기에 자전거 타기까지…. 남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김행균 역장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는 2008 베이징올림픽 때는 서울봉송 주자로 뛰며 '불가능은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줬다.

- 요즘 젊은 세대가 용기를 많이 잃고 있는데, 한마디 용기를 주신다면요?
"큰 파도를 견뎌내면, 작은 파도는 쉽게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많은 것이 힘들지만, 이겨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후회했던 순간 없다... 행복하다"

사고 후 길고 아팠을 재활의 시간, 김행균 역장에게 우문(愚問)을 하나 던졌다.

- 혹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도 살신성인을 하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김행균 역장은 담담히 답했다.)
"당시의 행동은 의로운 행동이라기보단 당연한 직업의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말고도 다른 동료들도 그런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좋게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행균 역장, 아름다운 철도원의 모습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 같다
 김행균 역장, 아름다운 철도원의 모습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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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난 행동을 겸손하게 대답하는 김행균 역장, 하지만 미래의 꿈 앞에서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릴 적, 마도로스(선장)와 기관사를 동경했다는 그는 새로운 철도 길을 달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제 철도가 부흥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선로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나름대로 희망도 커질 것 같습니다. 이런 새 철도에 뭔가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천상 철도원이었다. 김행균 역장을 보며 문득 영화 <철도원>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 영화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사고 후, 한 도서관 DVD로 영화를 감상했다는 김행균 역장, 그에게 감상평을 물었다. 답이 들렸다.

"마지막 열차가 지나가고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는 철도원의 모습에 마음이 찡했습니다. 총각 시절 놀러갔던, 동료가 일했던 철암의 모습과 닮아서 정이 많이 갔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지만,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모든 철도원의 마음이 그와 같지 않을까요."


태그:#김행균 역장, #아름다운 철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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