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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1961년 11월 21일 오후 5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마크 홉킨스 호텔.

한 평복 차림의 40대 한국 남자가 로비에 들어섰다. 불과 6개월여 전만 해도 한국 야전군 5개 군단, 20개 사단을 호령하던 제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 그는 군에서 호랑이 장군으로 불렸다. 목청이 유달리 우렁찬 데다 눈빛이 강렬하고 정통 야전 작전통답게 엄정한 군기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5·16쿠데타 때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다가 체포당하고 석 달여나 헌병사령부와 교도소들을 전전해야 했다. 지금은 불우한 '추방자' 신세로 가족도 서울에 남겨 둔 채 홀로 이국 땅에 격리된 외로운 기러기로 미국 정부에서 알선해 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산타바바라 캠퍼스에서 망명 겸 유학 중이었다.

정일권의 화해 종용에도 손 잡기 어려운 직업군인과 정치군인

기백은 많이 죽어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부리부리했다. 한 검정 싱글 차림의 청년이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그를 객실로 안내한다. 객실에서는 주미대사 정일권이 문 앞에 나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정일권은 6·25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미국을 비롯한 유엔연합군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국군 출신 명사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박정희나 이한림 등 일본 육사 출신들의 대부 격이었다.

본래 일본 육사 출신 중 군 안팎에서 존경을 받은 인물은 정일권보다 1년 선배이며 참군인으로 불린 이종찬 장군이었다. 이종찬은 해방 후 일본 군 경력을 자괴하는 뜻에서 임관을 거절한 채 3년여 야인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1949년에야 군 간부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대령으로 임관한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임 때인 1952년 이승만이 자신에게 유리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계획하면서 군 동원을 지시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거꾸로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훈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육참총장직에서 해임당한 뒤 미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나중에 박정희가 5·16쿠데타 전에 '군사혁명최고지도자'로 추대하려 했으나 두 차례나 거절했다.

이종찬과 달리 정일권은 쿠데타에 협조했다. 그가 주미대사에 임명된 것도 쿠데타 정권이 미국이 인정해 주는 군 출신 인물을 고른 결과였다. 쿠데타 정권의 주미대사 정일권과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이른바 '반혁명분자'로 축출된 이한림은 이날 샌프란시스코의 호텔 방에서 밤새 통음했다. 정일권은 이한림에게 박정희와의 화해를 끈질기게 종용했다. 어차피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국가수반이 아니냐는 얘기다.

다음 날 아침 7시, 이한림은 호텔의 한 귀빈실을 노크한다. 안에서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은 박정희의 의전비서관 조상호(후에 대한체육회장과 체육부장관 지냄). 박정희는 쿠데타 거사 후 처음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상견례를 가진 뒤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리 호화스러운 방은 아니지만 전망이 매우 좋은 거실 안에서 박정희가 나타났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며 빛났다. 박정희는 예의 수줍은 듯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한림은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악수할 생각은커녕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하냐!"

이 광경을 목격한 조상호 등의 얼굴은 흑빛이 됐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박정희는 식탁을 가리켰다. 정일권을 비롯한 주요 수행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5·16쿠데타 직후 구금돼 있다가 미국에 온 이한림은 박정희가 이미 권력자 위치를 굳혀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계속해서 함께 다닌 동기생으로 오랜 친구일 뿐이었다. 당시 일본 육사에 박정희의 조선인 동기생은 이한림, 이병주(후에 군내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사형당함) 등 모두 6명이었다. 이들은 동병상련 격으로 가까웠으며 이한림과 박정희는 특히 같은 중대에서 지내 친형제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소령, 김창룡 특무대에 남로당 연루자 밀고 후 풀려나 

전경련에서 건설진흥회 주최로 열린 건설부 장,차관 환영, 환송 간담회에서 역대 건설부 장관들이 환담하고 있다. 오른 쪽 두번 째 이한림 전 장관. 이한림 전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건설부 장관을 지낸 바 있다.(1986.1.28)
 전경련에서 건설진흥회 주최로 열린 건설부 장,차관 환영, 환송 간담회에서 역대 건설부 장관들이 환담하고 있다. 오른 쪽 두번 째 이한림 전 장관. 이한림 전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건설부 장관을 지낸 바 있다.(1986.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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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곡절을 거쳐 미국으로 쫓아 낸 장본인이지만 이한림은 그래도 박정희를 옛 친구로 대했다. 이한림은 박정희에게 다시 사담을 건넸다.

"그런데 자네 왜 그렇게 검은 안경을 끼고 다니냐?"
"너무 고단하게 뛰어다니다 보니 눈이 벌겋게 충혈되는 일이 많아서 그런다."

이한림은 박정희의 대답이 변명으로 들렸다. 탐욕 때문에 숱한 악행을 하고 보니 양심의 거울이라는 눈을 남에게 가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뉘앙스 같기도 했다. 그날 그는 박정희에게 국제적인 평가에 신경을 쓰라고 충고했다. 박정희와 정일권이 함께 그의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지만 큰 진전 없이 술만 마시고 헤어졌다.

해방 후 박정희의 군 생활과 가정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결혼했던 본부인과는 일찍 헤어졌다. 특히 1948년 10월 군 내 남로당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후 더욱 여러 가지가 꼬이기만 했다. 김창룡 특무대에서 조사받았지만 동료들을 밀고하는 진술서를 쓰고 그 대가로 풀려났다는 주변의 눈초리가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 터다. 그 진술서를 토대로 악명높은 특무대의 고문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천 명 안팎의 장교가 숙정당하고 그 중 상당수가 처형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제아무리 철면피한 사람이라도 자책감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구속돼 있는 동안 동거녀 이현란이 집을 나가 버려 더욱 쓸쓸한 남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현란은 육사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 때 신부 들러리를 섰는데 거기서 박정희의 눈에 띄어 함께 살게 됐다. 결혼식을 올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으나 6개월 만에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가 이렇게 우울할 때 미 군사학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한림이 그를 만난다. 박정희는 구속될 때 군복을 벗었지만 석방된 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문관 신분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혼자 기거하는 박정희의 용산 관사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거듭 위로하며 친구의 정을 다했다. 그 후 박정희는 6·25 전쟁이 터지면서 현역 소령으로 복귀한다.

이처럼 불우한 군 생활을 한 박정희와 달리 이한림은 이승만 정부뿐아니라 4·19 이후 장면 정부에서도 가장 촉망받던 몇몇 장군들 중 한 명이었다. 1947년 국방경비대 연대장, 6·25전쟁 당시 사단장, 1952년 휴전회담 국군 수석대표, 1954년 군단장, 미 하버드대 유학, 1957년 육사교장, 1960년 제1야전군 사령관.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일본 군국주의 뼈대에다 미국 자유주의 교육의 옷을 입었다. 이종찬 장군 못지않게 그도 군의 정치개입을 끝내 반대,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낙인이 찍히고 만다. 이에 대해 한 군 출신인사는 "호랑이 장군 이한림이 시라소니에 불과한 박정희에게 물린 것"이라고 비유했다.

5·16전야 15일, 1군 창설 기념행사에 야전군 지휘관 공백상태 

1961년 5월 16일 사회의 혼란을 위압하 듯 총소리가 한강에 울리고 군사혁명. (1961.5.16. 합동통신 자료사진)
 1961년 5월 16일 사회의 혼란을 위압하 듯 총소리가 한강에 울리고 군사혁명. (1961.5.16. 합동통신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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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후 사실 군 내 쿠데타설은 여러 차례 노출됐다. 모든 정보에서 지목된 위험 인물은 박정희 소장이었다. 그러나 장면 총리 정부가 취한 조치는 참으로 한심했다. 쿠데타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닌 불평분자 박정희를 기껏 조치한다는 것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에서 휘하 병력이 없는 광주 1관구사령관으로, 다시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시킨 것이다.

1961년 5월 15일, 바로 5·16쿠데타 전야다. 이날은 이한림 사령관이 1군사령부 창설 7주년 기념행사일로 잡아 놓은 날이었다. 이 행사를 위해 야전군 내 모든 주요 지휘관이 원주에 모이게 돼 있었다. 그것은 쿠데타 모의자들에게는 바로 '지휘관 공백' 상태, 모반을 일으키기에 절호의 찬스였다.

5월 15일 기념식 행사를 치르고 지휘관들은 만찬을 한 뒤 원주에서 하룻밤 숙박한 뒤 부대로 돌아갈 참이었다. 여기서 5군단장 박임항(육사8기, 후에 반혁명사건으로 구속됨), 5사단장 채명신(육사5기, 후에 주월국군사령관), 12사단장 박춘식(육사5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등은 예외였다. 이들은 초기부터 쿠데타에 가담하고 있었다.

운명의 5월 16일 새벽, 1군사령관 이한림은 숙소의 노크 소리에 잠을 깼다. 벽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2분. 부관이 전화기를 연결해 주니 육군본부 참모차장 장창국 장군이었다.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무어라고요?"
"군사 쿠데타 말입니다."

이한림은 그동안 소문으로 떠돌았지만 쿠데타가 실제 터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쿠데타라면 '역모' 아닌가. 옛날 같으면 3족을 멸하는 국사범이 되는 행위다.

"주모자가 누구요?"
"박정희 소장이오."
"기어코 그 사람이 일을 저질렀군 … 지금 어떤 상황이오?"
"3시 조금 지나서 쿠데타 부대가 육군본부에 진입했소."

육군본부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참모총장 이하 군 실권자들이 모두 넘어간 것 아닐까. 이한림은 즉각 원주 시내에 유숙하고 있던 군단장과 사단장들을 긴급 소집했다. 이들이 모두 집결한 시각은 새벽 5시 반경. 야전의 군 장성들은 아직 서울의 쿠데타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1군단장 임부택 소장에게 반란군 토벌을 위한 출동준비를 명령했다. 그리고 다른 장성들에게 즉각 귀대하여 전선 방어에 역점을 두되 추가 지시를 기다리게 했다. 임부택은 굳은 결의를 다지면서 다른 군단장보다 앞서 출발했다.

윤보선 대통령 "국군끼리 충돌과 출혈은 하지 말라"

윤보선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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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한림이 취해야 할 조치는 정부의 군 통수부에 연락하고 쿠데타 진압명령을 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참모들은 정부 쪽과 전화 연락이 전혀 안 된다고 보고했다. 당시는 내각책임제였으므로 실권자는 국무총리 장면이었다. 그런데 총리실은 전화도 안 되는데다 장면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국방부장관 현석호, 참모총장 장도영과도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장도영은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와 야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전군을 출동시켜 쿠데타군을 진압하다가 큰 유혈사태가 발생해 혼란이 오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5월 16일 밤까지 이한림은 출동준비가 완료된 임부택의 1군단에 진압작전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이 지난 뒤 윤보선 대통령이 비서관들을 1군사령부와 각 군단사령부에 보내 친서를 전했다. 이한림은 사령부 비행장에 나가 대통령 특사를 맞이했다. 대통령의 국방담당 비서관 김남과 공보담당 비서관 김준하가 공문서로 된 대통령 친서를 내밀었다. 이들은 3군단 사령부와 2군단 사령부에도 같은 공한을 전한 뒤 서울로 돌아갔다.

출동 대기 중인 1군단장 임부택에게는 대통령의 다른 비서관인 윤승구와 한규선이 친서를 전했다. 친서의 내용은 한마디로 "국군끼리 충돌과 출혈은 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것으로 야전군에 의한 쿠데타 진압작전은 불가능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내각책임제 아래서 비록 형식상이지만 그래도 국가원수인 윤보선 대통령의 친서는 진압작전을 동결시킨 결과를 만들었다. 임부택은 강제 예편당했다.

대통령 비서관들이 돌아간 직후, 오후 2시 반 경 미 8군사령관 매그루더 대장이 군사령부로 이한림을 찾아왔다. 매그루더는 강경하게 쿠데타 반대입장을 밝혔다.

"주한 미8군은 박정희 소장의 군사쿠데타를 강력히 반대합니다. 박정희의 폭거를 용납할 수 없어요."

매그루더는 일부 장교들이 국민이 선택한 문민정부를 무너뜨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불법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한 군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같은 미국 측의 태도는 18일 오전 9시 육사생도들의 5·16쿠데타 지지시위 이후 바뀌기 시작했다.

이한림 "내란 피하기 위해 쿠데타 반대에서 묵인으로 선회"

미 8군사령관의 지지 의사를 확인하고도 이한림은 쿠데타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대통령 윤보선의 친서 때문이었다. 실권자인 국무총리 장면은 이때 혜화동 수녀원에 숨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역사는 이렇게 오도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30여 시간이 지난 5월 17일 오후 5시, 1군사령부 연병장에서 국기 강하식이 열렸다. 이한림이 무거운 표정으로 사령부 장병들 앞에 섰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음을 여러 장병에게 알립니다."

이한림은 집무실에 들어가 신변을 정리했다. 이어 부관에게 박정희를 전화로 부르라고 지시했다. 그와 통화한 지도 1년이 넘었을 때였다.

덧붙이는 글 | 5·16쿠데타는 진압이 충분히 가능했다. 최대 무력을 가진 제1야전군 사령관 이한림이 군의 정치개입을 철저히 반대했다. 주한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 대장도 그에게 찾아와 야전군의 쿠데타 진압행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권자인 장면 국무총리는 연락 두절이고 윤보선 대통령은 국군끼리 충돌을 반대하는 친서를 보냈다. 역사가 오도되는 30시간이었다.



태그:#박정희, #이한림, #5.16쿠데타진압 불발, #윤보선 대통령, #매그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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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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