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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발에 타일모자이크로 형상화 한 파발마.
▲ 파발마 구파발에 타일모자이크로 형상화 한 파발마.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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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팔도의 제1로는 의주대로다. 영남대로와 호남대로는 제4, 제5 순위로 한참 밀려있다. 세상의 중심 중국으로 가는 길이 의주대로이기 때문이다. 오가는 사신도 많지만 보내고 받아야 하는 문건도 많다. 사신들의 출발과 종착지는 홍제원이지만 문서의 수발기지는 연서역이다. 연서역에는 보발(步撥)도 있지만 일곱 필의 파발마(擺撥馬)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 긴급을 요하는 문건이 평양과 의주를 오가기 때문이다. 

이징옥 사건이 발발하면서 의주대로는 제1로의 영예를 경흥대로에 내주었다. 평소 다섯 필의 말이 대기하고 있던 노원역에 삼남대로의 기착지 청파역에서 차출한 다섯 필의 말이 합류하여 열 필이 되었다. 조선 개국 이래 한 역에 열 필의 말이 있게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노원역 대기 마(馬)들의 발바닥에 불이 붙었다.

긴 직함을 가지고 살아있는 임금을 뒤에 둔 채 전권을 휘두르는 수양과 살아있는 대통령을 뒤에 두고 긴 직함으로 전권을 휘두르던 국보위상임위원장은 너무나 닮았다. 앞이 전두환 뒤가 최규하 대통령이다
▲ 찬탈 긴 직함을 가지고 살아있는 임금을 뒤에 둔 채 전권을 휘두르는 수양과 살아있는 대통령을 뒤에 두고 긴 직함으로 전권을 휘두르던 국보위상임위원장은 너무나 닮았다. 앞이 전두환 뒤가 최규하 대통령이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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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수양은 스스로 중외병마도통사(中外兵馬都統使)에 올랐다. 영의정과 집현전 예문춘추관, 이조와 병조판서에 이어 병권(兵權)까지 틀어쥔 것이다. 그의 공식 직함은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경연 예문춘추관 서운관사 겸 판이병조사 중외병마도통사(領議政府事 領集賢殿經筵藝文春秋館書雲觀事 兼判吏兵曹事 中外兵馬都統使)라는 유례없이 긴 직함이었다.

역사가 흐른 훗날, 하극상을 일으켜 대권을 넘보고 있던 자도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상임위원장'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긴 직함을 가졌다. 대권 찬탈 야욕에 불타는 자들은 긴 것을 좋아하나 보다. 덩치가 작은 여우는 꼬리 손질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 커 보이기 위해서다.

두만강 넘어 야인들에게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통지문을 보낸 수양은 양계에 포진한 군 절제사들에게도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도전하는 자, 용서할 수 없다

사건 조사 특명을 부여받은 선위별감(宣慰別監)에 박대손이 임명되었다. 왕명에 의한 특별 조사반이다. 사건 진상과 사후처리를 위하여 현장으로 떠나는 박대손을 수양이 대군청으로 불렀다.

"신임 절제사 박호문을 살해한 자, 이징옥의 위칙을 쓴 자, 야인을 청한 통사(通事)는 용서할 수 없다."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이징옥을 거열하여 3일 동안 효수한 뒤 머리를 한성으로 보내고 그의 자식과 동모자는 효수하여 널리 보여라."
"예, 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징옥이 왕명을 거역하고 박호문을 살해한 사실을 알면서도 이행검과 정포(鄭圃)가 종성에 따라간 이유와 정종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이징옥을 출영한 연유를 추문하라."
"예, 명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이징석과 김문기를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럴까?

박대손을 종성으로 보낸 수양은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이징석과 그의 아들 팔동을 석방하라 명했다. 뒤이어 경상도 양산 옥에 갇혀있던 이징옥의 동생 이징규를 석방하라고 관찰사에게 유시했다. 이징옥이 평소에 그 형 이징석과 불목(不睦)하는 것을 온 나라가 알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이에 사헌부에서 반발했다.

"이징석과 이징규 형제와 징석의 아들 팔동을 모두 율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뒤이어 사간원이 들고 일어났다.

"이징석 부자와 이징규를 지금까지 법으로 다스리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징옥이 병장기를 한성으로 빼돌리는 것을 김문기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함에도 김문기를 그 도의 관찰사로 제수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김문기가 아니더라도 어찌 보낼 자가 없겠습니까? 청컨대 재고하여 주소서."

이징석과 김문기를 대하는 수양의 태도는 남 달랐다. 한명회의 입김이다.

이징옥 사건으로 공포에 휩싸인 종성
▲ 종성 이징옥 사건으로 공포에 휩싸인 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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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위별감 박대손이 이끄는 조사단이 한성을 떠났다는 소식이 함길도에 알려지자 길주에 찬바람이 불고 종성에 삭풍이 몰아쳤다. 한 때는 육진의 최전방 기지로 활기가 넘쳤던 고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종성(鍾城)은 북쪽에 동건산이 있어 종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두만강 건너 야인들은 종(鍾)을 동건(童巾)이라 부른다. 세종 이전까지 이곳을 점유했던 야인들이 동건산이라 불렀고 그것이 육진 개척 후 종성이라는 지명으로 굳었다.

엎어놓은 종(鍾)처럼 생겼다 하여 동건산(童巾山)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을 품고 있어서 그럴까? 종성에 날아든 소문은 종소리처럼 빠르게 전파되었다. '누구누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그럴듯하게 덧칠된 명단까지 나돌았다. 누구는 죽을 것이고 누구는 살 것이라는 종성 판 살생부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자발적으로 협조한 자는 목이 달아날 게 불 보듯 뻔한 일이고, 겁박에 못 이겨 부역했다 해도 증거를 대기가 매우 곤란한 일이다. 조사관이 아니라면 아니고 기다면 기다. 매에 장사 없다. 종성 백성들은 살았다 해도 산 숨이 아니고 숨을 쉬고 있다고 해도 자기 목숨이 아니었다.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종성 벌족 맹(孟)씨와 변(邊)씨, 염(廉)씨는 자신들의 문중에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위하여 매일같이 회의를 소집했지만 뾰쪽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데 누가 누구를 빼줄 수 있단 말인가.

평소에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은 물귀신이 무서웠다

죽을 것만 같은 사람은 억울해서 혼자 죽지 못하겠다며 저승길에 같이 갈 길동무 찾기에 혈안이 되었고 평소에 사이가 안 좋은 이웃이 있는 사람은 물귀신 작전에 걸려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혁명에 들떠 있던 종성은 그 열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어붙었고 공포가 읍성을 짓눌렀다.

모을고가동(毛乙古家洞)에 사는 장덕길은 불안에 떨다 식솔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도망갔다. 야반도주한 자는 덕길이뿐만이 아니다. 이 동네 저 동네 할 것 없이 자고나면 사라지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젖는 뱃사공이 어느 날 갑자기 대박이 난 것이다.

칠복이는 창고문을 열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 켕겨 강물에 투신했다. 야인들은 일곱(七)을 나단이라 부른다. 나단산(羅端山)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곱 가지 복을 내려 달라는 의미로 그의 아버지가 칠복이라 이름 지어 주었는데 칠복은커녕 한 개도 받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소고가동(所古家洞)에 사는 황숭찬은 겁에 질려 목을 맸다. 동량개동가월변동(同良介同家越邊洞)에 사는 손달식은 헛소리를 하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민심은 흉흉했고 바람은 살벌했다. 종성 가호(家戶) 9백 호 중, 삼백호 이상과 읍민 2만 1815명 중 절반 이상이 죽을 것이라는 괴소문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평화로웠던 변방 마을 종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맞을 매라면 먼저 맞는 게 좋아서일까? '선위별감이 한성을 떠난 지 언제인데 아직까지 안 오느냐?'는 웃지 못할 불평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툭하면 터질 것 같은 험악한 공기가 종성 하늘을 뒤덮었다.


태그:#이징옥, #수양대군, #종성, #전두환, #파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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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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