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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1961년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는 한국의 역사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쿠데타의 주모자 박정희 소장 자신은 18년 동안 통치한 뒤 비운에 사라졌다. 그러나 1979년 10·26 이후 14년 동안의 또 다른 군부 통치는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라 부를 만큼 5·16 쿠데타가 만들어 놓은 그 후계 체제에 불과하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그 선대(先代)인 박정희 정권 없이는 태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노태우 시대는 역사학적인 시기 구분 외에는 사회과학적으로 따로 떼어 볼 수 없는 연속성을 지녔다.

박정희 후예들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이는 정당정치사로 보면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 노태우의 민자당과 그 후예들이 신한국당을 거쳐 오늘날 한나라당이 됐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일깨워 준다. 5·16은 군부가 직접 정치를 장악하는 불행한 선로를 깔아 놓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책임이 크다. 더구나 군부 정치집단과 그 후예는 필연적으로 역사발전을 거스르는 수구세력이라는 점에서도 5·16의 죄과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군사독재 정권의 가장 큰 죄과는 공통적으로 고문·테러 등의 체제폭력을 구사하는 공포통치라 할 수 있다. 군부란 정치사회학적으로 '무력의 합법적 관리권'을 허여받은 집단이다. 따라서 군인은 무기 사용과 체력 증진, 그리고 집단행동 능력을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힘, 곧 무력은 국민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합법적 무력을 국민과 국가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 남용하면 그것은 불법적 조직폭력이 되고 만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중앙정보부와 군부가 자행한 고문과 테러를 보면 그것은 불법적 범죄조직집단의 폭력행위였다. 조직폭력배들의 잔혹행위와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유로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갔다가 비명에 사라진 수많은 의문사와 야만적 구타···. 이것이 어떻게 국가기관에서 행해질 수 있는가.

박정희가 2기생으로 졸업한 신경군관학교 생도들의 야외전투 훈련 장면
 박정희가 2기생으로 졸업한 신경군관학교 생도들의 야외전투 훈련 장면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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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폭력을 어디서 배워 온 것일까. 박정희는 일본군대에서 훈련받은 장교 출신이고 자유당 때 악명높은 특무부대장 김창룡도 일본군 헌병보 출신이다. 일제는 우리에게 길게도 악질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일본군 헌병보 출신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

체제폭력의 유형으로 공공시설 안에 가두어 놓고 폭행하는 것은 고문이고 야외나 민간 건물에서 하면 테러다. 둘 다 공포통치의 수단이다. 독재권력이 자행하는 '더러운 전쟁'의 구체적 모습이다. 세계 시사용어 사전을 보면 '더러운 전쟁'이란 아르헨티나 군사정부가 1976년부터 시작한 반대자들에 대한 테러와 고문 악행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희 정권이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먼저 시작했다. 고문과 테러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세계 최고'로 기록됐다.

김영삼도 했는데... 김대중은 왜 박정희를 징벌 안했나

김대중씨가 1973년 8월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사건에 대한 회견을 하고 있다.
 김대중씨가 1973년 8월 14일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사건에 대한 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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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아래서 체제폭력의 희생자는 누구보다도 김대중이었다. 그는 1973년 8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한 도쿄 납치사건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미국 정보기관의 기동성 있는 구출작전으로 동해상에 수몰되기 직전 살아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거의 다 밝혀졌으나 최종 명령 계통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로부터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 그 아래 부하들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거명됐지만 명확히 조사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올랐으면서도 그 납치사건의 명령자를 가려내지 못한 셈이다.

그에 대한 체제폭력은 다시 전두환의 사법살해 기도로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내란과정에서 김대중을 체포하고 사형선고까지 내렸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석방하고 출국시킨다. 그러고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뒤 전두환의 5공세력과 화해를 추구한다. 그는 박정희기념관 추진위원회의 명예위원장까지 맡으면서 200여억 원의 예산지원을 하도록 했다. 좋게 말하면 '대인배의 통큰 정치'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비판도 많이 받았다.

그것이 김영삼과 김대중의 다른 점이었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뒤 자신에게 가한 군부 테러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게 하고 단죄했다. 하나회를 숙정했으며,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제정신 가진 사람 중에 그것을 정치보복이라고 하는 이는 없다. 그것은 인과응보, 정당한 처벌이었다.

정권을 잡았다 해서 개혁을 소신껏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교훈을 우리는 두 차례의 민주정부 때 똑똑히 보았다. 사회권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정치권력은 개혁의 뒷심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회권력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언론과 학벌과 지역세력이다. 민주국가에서 언론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다. 그리고 언론과 함께 언론의 사주도 그 성역 속에 함께 존재한다. 정치권력과 달리 선출되지 않았고 교체되지도 않는 언론 사주야말로 변하지 않는 '세습권력'이다. 사회권력의 지속적 힘과 무서움이 여기에 있다.

김영삼은 언론으로부터 매우 우호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영남 PK라는 막강한 지역세력이 정치적 기반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이같은 사회권력을 갖춘 정권이 출범한 셈이다. 그래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아래서 오랫동안 권력집단으로 할거한 정치장교 비밀결사 하나회를 숙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키고 단죄할 수 있었다. 김영삼이 1990년 박정희의 후예들과 손잡고 3당야합을 한 것으로 자신의 족적에 큰 오점을 남겼지만 집권 후 몇가지 뚝심 있는 개혁조치를 단행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 비해 김대중은 언론이 너무도 적대적이었다. 지역세력도 영남 PK에 비해 왜소했다. 어렵게 정권은 잡았지만 사회권력의 뒷받침은커녕 항상 대립적이고 취약했다. 그가 박정희, 전두환 쪽과의 화해를 내세운 이유는 개혁의지가 약해서도 아니고 현실적 여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국민통합과 화해, 그리고 암적인 지역주의의 단절이라는 '김대중 정신'으로 승화됐다.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이유는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의 극복이었다. 박정희, 전두환에게 내민 화해의 손길, 그것이 바로 그의 정치역정의 최종적 승리를 상징했고 노벨평화상의 한 바탕이 됐을 것이다.

강초산 테러당한 김영삼 "박정희씨는 독재자요"

1969년 6월 20일 서울 상도동 자택 근처 골목에서 세명의 괴한으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한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초산에 녹아 페인트가 벗겨진 자가용 승용차 뒷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1969년 6월 20일 서울 상도동 자택 근처 골목에서 세명의 괴한으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한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초산에 녹아 페인트가 벗겨진 자가용 승용차 뒷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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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6월 19일 밤 10시 5분경,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의 승용차가 상도동의 자택 근처 골목길에 이르렀다. 정국이 삼선개헌 문제로 소란해서 여느 때와 같이 밤늦게 귀가하던 참이었다.

길옆에 앉아 있던 작업복 차림의 청년 3명 중 2명이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싸우기 시작했다. 앞이 가로막힌 승용차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명의 괴한이 승용차 뒤로 돌아오더니 김영삼이 앉은 쪽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왠지 모르게 김영삼은 차에 타면 으레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것이 습관화돼 있었다. 야당 의원을 오래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에 대해 방어하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괴한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수류탄이라고 여긴 김영삼은 "빨리 속력을 내서 달려라"고 소리쳤다. 운전사가 클랙슨을 누르면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싸우던 2명은 엉겁결에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차 옆에 있던 괴한이 손에 든 물건을 차창에다 내던졌다. 그것은 나중에 자동차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질 정도의 강초산으로 밝혀졌다. 만일 자동차 문이 열려서 얼굴에라도 투척됐더라면 아찔한 일이었다. 얼굴에 공적 활동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적 상처가 났을 것이 뻔했다. 김영삼은 당연히 분노했다.

다음날 국회 본회의장, 김영삼 의원이 신상발언이 있다며 단상에 올랐다. 그는 박정희와 김형욱을 싸잡아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의 박정희에 대한 정면 대립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다.

"… 김형욱이는 제2의 최인규(4·19 때 내무장관으로 사형당함)와 같고, 민족반역자다, 이러한 무리가 이 땅위에 있는 동안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살 길이 없다라는 얘기를 한 사람입니다. 나에 대한 테러는 여기에 대한 보복이라 생각합니다. … 김영삼이를 죽이기 위해서 정보부에서 음모한 것입니다. … 박정희씨는 독재자요.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해도 권력을 휘두르는 자, 칼로 세운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있어요. 힘을 가졌다 해서 힘을 행사하는 자 반드시 그 힘에 의해서 망할 것입니다."

그 후 전두환의 5공 정권 아래 1985년 10월 10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영삼의 상도동 자택에 몇 명의 괴한들이 침입했다. 이들은 돈을 가져 간 것이 아니라 탁상일기와 카세트 녹음테이프, 명함 등을 절취해 갔다. 단순 절도가 아닌 정치적 사건이었으나 당시는 규명되지 못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1993년 7월15일 국방부는 그 사건이 정보사령부 간부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영삼은 군부 숙정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사건은 당시 정보사 3처장 한진구 대령이 전 부대원들을 매수해 김영삼의 활동상에 대한 정보자료를 입수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한진구는 그 정보자료를 보안사 정보처장 박동준 준장에게 건넸다고 군 검찰에서 진술했다. 보안사가 야권 정치인의 활동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정보사 간부를 행동대로 투입한 체제폭력이었다.

박정희 "검경이 잡은 범법자를 법원이 풀어주는 짓 안 된다"

박정희
 박정희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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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 의한 테러는 비단 야당 정치인뿐 아니라 모든 비판자들에게 가해졌다. 법관과 비판적 언론인도 군인이나 괴한으로부터 폭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체제폭력의 최종 책임은 역시 그 체제의 최고 권력자로부터 비롯된다. 권력자의 인식과 의지가 마치 마피아 두목의 그것처럼 지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민주정치의 기본인 권력분립과 법관에 대한 박정희의 부정적 인식은 정권 초기에 드러났다.
1963년 4월 어느 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당시 검찰총장 정창운을 불러들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정부에 반대하는 놈들을 기껏 구속해 놓으면 법원은 풀어주니 이따위 짓이 뭐요. 검찰이 뭐하고 있길래 …"
"판사들이 구속적부심사를 해서 불구속 수사하라고 하니 도리가 없습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검찰총장에게 서울지방법원장을 불러오라고 호통을 쳤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이 법관을 부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짓이다. 언론과 국민 여론이 가만 있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총구에서 나온 권력을 휘두르는 쿠데타 주도자의 초법적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홍남표 법원장(후에 대법원판사 역임)이 불려 왔다. 박정희는 홍 법원장에게 야단치듯 큰 소리를 냈다.

"아니, 법원은 이래도 되는 거요? 툭하면 경찰과 검찰이 힘들여 잡아들인 범법자들을 풀어주고 말이지, 왜 정부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는 거요."

홍 법원장은 박정희가 아무리 쿠데타 주동자지만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3권분립과 법관의 독립성을 전혀 모르는 듯한 말투에 난감함을 느꼈다. 그러나 차분히 법관으로서 할 얘기를 했다.

"법관의 지위와 직무행위는 헌법과 법률에 규정돼 있습니다. 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심판합니다. 아무도 그 독립성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행정부 관료들처럼 상명하복 관계가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상 보장된 독립관청입니다. 제가 법원장이지만 판사 개개인의 판결에 간섭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꼭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쓰여 있는 정도의 상식을 읽듯이 법원장은 쿠데타 권력자 앞에서 기죽지 않고 피력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민주정치나 권력 분립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다.

그런 통치자 아래서 껄끄러운 법관을 비롯한 비판세력에게 군 특수부대원들의 테러가 수시로 터졌다. 박정희에게는 야당정치인뿐 아니라 비판적 언론인과 학생운동권이 눈에 가시였다. 이들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군부와 중앙정보부 등에 의한 테러가 수시로 자행됐다. 

판사 앞에서 수류탄 자폭위협 "데모학생 구속영장 서명하라"

박정희가 법관들에게 불만을 토로한 지 1년쯤 지난 1964년 5월 21일, 새벽 4시 반경.

서울 서소문의 법원청사 정문 앞에 군용 구급차 한 대가 들이닥쳤다. 여명이 채 열리기도 전 어둠이 깔려있는 법원 건물은 조용했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가 한창이었지만 아직 6·3 계엄령사태 이전이어서 군용 차량의 출동은 긴장감을 주었다.

차 안에서 얼룩무늬 군복에 권총과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군인 12명이 뛰어내렸다. 이들은 수위를 불러 법원 숙직 판사실로 안내하라고 요구했다. 1층 숙직실에 가 보니 판사는 이미 퇴청한 뒤다. 이들은 다시 차를 몰아 이날 밤 당직 판사인 서울지방법원 양헌 판사 자택을 찾아간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4가 돈암초등학교 옆의 양헌 판사 자택. 새벽 시간에 문을 두드리고 들이닥친 얼룩무늬의 군인들은 양 판사에게 다그쳤다.

"데모학생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이유가 무엇이냐? 영장에 서명할 것을 약속해!"
"나는 이렇게 집에 있을 때는 한 개인이지만 영장에 서명할 때는 엄연한 헌법기관이오. 그렇게는 안 돼요."

그러자 군인들은 수류탄을 꺼내 보이며 협박했다.

"그냥 돌아가도 우리는 죽는데, 여기서 자폭할 테니 알아서 하라."
"나도 이북에서 월남해 고생하며 독학으로 고등고시 합격하고 군 법무관도 한 사람이오. 이것이 무슨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고 죽는단 말이오."

양 판사는 조서를 검토하던 생각이 났다. 공안당국은 시위를 구경하는 사람까지 잡아다가 구속하려 했다.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대학생에게 "돌을 안 던졌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묻는 웃지 못할 조서도 있었다.

이 양헌 판사 겁박사건은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됐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는 양심이 살아있는 정론지였다.

6월 6일 새벽 1시 반, 공수단 복장의 장교 8명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편집국에 난입했다. 그렇잖아도 이때는 6·3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여서 언론이 잔뜩 위축된 상황이었다. 군 장교들은 험악한 기세로 난폭한 언사를 써가며 기자들을 겁박했다. 사건은 사전 검열로 보도되지 못했지만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시중 여론이 악화되자 계엄사가 자체조사를 벌였다.

난입 장교들은 1공수특전단 최아무개 대령 등 행동대 8명이었다. 민기식 계엄사령관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난입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민심수습 차원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안할 수가 없었으나 최 대령만 유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였다. 배후조종 책임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 권력에 대해 보인 태도가 흥미롭다. 김대중은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박정희·전두환과 화해를 추구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자신이 경험한 정치테러에 대해 엄정하게 조사하고 응징했다. 사회적 기반이 강한 사람은 소신대로 징벌했지만 그것이 취약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가슴이 짠하다.



태그:#박정희 , #김형욱 , #정치테러 , #김대중의 화해정치, #김영삼의 테러 응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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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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