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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함길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 선춘령에 세운 비. 종성, 온성 경원 등 두만강 일대는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 땅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척경입비도 우리나라가 함길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 선춘령에 세운 비. 종성, 온성 경원 등 두만강 일대는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 땅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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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 3명과 함께 이징옥의 군영을 찾아온 밀사가 붉은 보자기에 싼 초구(招裘)를 내밀었다. 담비 가죽으로 만든 옷이었다. 여진족이 전통 의상을 선물하는 것은 혈육으로 대하고 싶다는 마음의 징표다.

"장군의 거사를 축하한다는 부장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훗날 청나라를 건국한 누루하치의 5대조 타라(妥羅)가 보낸 김수산이었다.

"무에 축하받을 일이라고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우리 부장께서 대금(大金)황제국을 선포하고 도읍을 오국성에 정하였습니다. 황제에 장군님을 추대하고 싶다는 것이 부장님의 간절한 청입니다."

김수산이 4번 절하고 4번 이마를 땅에 찧었다. 수락하지 않았지만 황제에 준하는 예우다. 뜻밖이다.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고 싶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있으면 좋겠다는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금나라 사람들이 함길도 경원에 세운 비 탁본. 현재까지 확인된 여진 문자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다. 이 비가 발굴됨으로서 한반도에 남아있는 여진 유적과 베일에 가려져있던 여진 문자, 인명, 지명이 알려지게 되었다.
▲ 경원여진자비 금나라 사람들이 함길도 경원에 세운 비 탁본. 현재까지 확인된 여진 문자 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다. 이 비가 발굴됨으로서 한반도에 남아있는 여진 유적과 베일에 가려져있던 여진 문자, 인명, 지명이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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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강 유역 의란에서 발흥한 건주 여진은 몽골족의 세(勢)에 밀려 두만강 너머까지 남하했다. 몽골과 조선 사이에 낀 것이다. 강한 쪽이 밀면 약한 쪽으로 밀리는 게 힘의 논리다. 대륙의 강자가 갑이라면 힘이 약한 소수민족은 을이다. 갑이 밀면 밀려들어오고 느슨하면 튕겨나간다. 하여 반도는 대륙의 용수철이다.

회령에서 힘을 키운 뭉거티므르는 강 건너 풍주로 진출했으나 몽골족과의 전투에서 패배. 다시 회령으로 돌아왔다. 칼을 갈며 재기를 노리던 뭉거티무르는 북경에 낮은 자세로 접근하여 우도독의 지위를 획득했다. 약자의 생존방법이다.

평화도 잠시, 7성 야인의 반란이 일어났다. 북경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에 휘말린 건주여진은 부장 뭉거티무르와 그의 장자 권두가 전사하고 차자 동산이 포로로 잡혀가는 위기를 맞았다.

포로에서 풀린 동산이 회령에 돌아왔다. 절치부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동산은 부중 백성 3백여 호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넜다. 혼하 강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소자하 유역까지 세력을 넓힌 동산은 건주여진의 제2 부흥기를 맞이했다. 지금으로부터 53년 전 일이다. 

"대금 황제국이라 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황제(皇帝).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북경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륙의 장래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리. 반도에 밀려난 조선쯤은 큰 기침 한 번에 스스로 기게 만들 수 있는 자리.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수양쯤은 단박에 혼내줄 수 있는 자리. 욕심나는 자리다.

"황제라!"

가슴이 뛴다. 고구려 땅 요동. 고구려의 고토 만주 벌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하던 선조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비록 남녘 땅 두메산골 양산에서 태어났지만 마음의 고향은 항상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 곳이 요동이었다. 그 벌판을 수하 장졸들과 함께 달릴 수 있는 날이 다가온다 생각하니 심장이 격하게 박동했다.

여진족의 전략은 탁월했다. 조선의 용맹스러운 장군을 옹립하여 대륙을 흔들면 북경 정권이나 한성 정권이 감히 자신들을 깔보지 못하고 후금 건국을 기정사실화 할 수 있다는 전략이었다.

여진족 스스로 황위에 오르면 부자(父子)의 나라 중국과 조선의 협공을 받는 위치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이징옥을 전면에 내세우면 형제간 내홍(內訌)에 여념이 없는 중국은 여진과 조선이 연합할까봐 요하 동쪽 변방쯤은 신경 밖에 덮어둘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전설적인 부대 ‘공포의 8기군’ 전신 4기군 깃발. 황색. 백색. 적색. 남색이다. 심양 고궁 소장
▲ 팔기군 전설적인 부대 ‘공포의 8기군’ 전신 4기군 깃발. 황색. 백색. 적색. 남색이다. 심양 고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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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석권했던 아골타(阿骨打)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는 여진족의 군사조직은 특이했다. 백성과 군사가 따로 있지 않았다. 백성이 군사이고 군사가 백성이었다.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던 그들은 위급상황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군대 체제로 돌변했다. 말을 다루는 기술은 기본이고 긴 창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장창술이 뛰어났다.

유목과 수렵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건주여진의 기초 단위는 50여 가구다. 금나라 시절 300가구를 1모극(謀克)으로 하던 군사조직을 정실(精實)화 했다. 이들 3개를 묶어 150여 가구가 화살(矢)이라 부르는 단위로 조직되었다. 이 화살 50개. 즉, 7500 가구 규모가 한 개의 기(旗)를 이루었다.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군대가 되는 조직은 사회조직과 군사조직을 통합한 병민일체(兵民一體) 조직이었다. 공포의 8기군 전신 4기군의 원시 조직이다. 각창안은 4기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황기(黃旗) 부장이었다.

"무슨 함정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짚이는 게 없었다. 이징옥과 그의 부관 박문헌이 여진족 밀사를 만나고 있을 때 한명회의 특명을 받고 밀파된 석동이가 도진무 이행검과 종성판관 정종을 은밀히 불러냈다.


태그:#이징옥, #여진족, #두만강,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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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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