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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를 선고한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

 

10월 31일,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윤갑근 서울중앙지검 3차장이 출입기자들에게 한 얘기다. 윤 차장은 재판부를 향해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주관적 판단을 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검찰이 '완벽한 물증'을 제시했는데도 재판부가 "합리적 사유없이 배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한 김우진 부장판사의 생각은 달랐다. 김 판사는 "(9억여 원 수수 의혹의) 입증 책임은 검찰에 있다"며 "형사소송법에서 요구하는 정도의 입증에 이르는 데는 실패했다"고 검찰의 반발을 일축했다.

 

이는 최소한 한 전 총리의 '9억여 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사건(이하 9억여 원 사건)에 관한 한 '수사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지적으로 들린다. 수사를 맡았던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 가장 뼈아픈 대목이다. 

 

'확실한 물증 확보 후 기소'라는 특수수사의 원칙 무너져

 

검찰은 한 전 총리의 9억여 원 사건을 수사하면서 "이번에는 확실하다"고 호언장담했다. 검찰이 "이번에는"이라고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수사했던 한 전 총리의 '5만 달러 뇌물수수 의혹' 사건(이하 5만 달러 사건)이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9억여 원 사건으로 '1심 패배'를 만회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판부가 9억여 원 사건에도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검찰은 한 전 총리에 '1심 2패'하는 드문 기록을 남기게 됐다. 검찰이 두 사건에서 패배한 1차 원인은 핵심증인들이 모두 검찰에서 한 진술을 법정에서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는 검찰의 공소유지에 문제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먼저 5만 달러 사건. 검찰은 지난 2009년 12월 18일 노무현재단에 있던 한 전 총리를 체포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인사청탁 명목으로 5만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였다. 그리고 나흘 뒤인 12월 22일 한 전 총리를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하지만 뇌물공여자인 곽 전 사장의 검찰진술이 법정에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5만 달러를 한 전 총리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진술은 "총리 공관 의자에 놓고 왔다"로, "인사청탁과 함께 5만 달러를 줬다"는 진술은 "한 전 총리에게 대한석탄공사나 남동발전 사장 인사와 관련해 청탁해본 적이 없다"로 바뀐 것이다.

 

9억여 원 사건도 이와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검찰은 지난 2010년 7월 20일 건설업자인 한만호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9억여 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한 전 총리를 불구속 기소했다. 한 전 총리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에 패한 직후였다. 

 

하지만 한 전 총리에게 9억여 원을 건넸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한만호 전 대표의 진술도 법정에서 바뀌었다. 한 전 대표는 2010년 12월 20일 증인으로 법정에 나와 이렇게 진술했다.

 

"한 전 총리에게 어떤 정치자금도 준 적이 없다. 검찰수사 초기에 제보자 남아무개씨가 겁박하고, 수감 후 억울하게 빼앗긴 회사자금을 되찾을 욕심도 들어 허위진술을 하게 됐다."

 

검찰이 뇌물과 불법 정치자금 공여자의 진술에만 의존하다가 '진술번복'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자초한 셈이다.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를 다 확보한 뒤 소환조사하거나 기소해야 한다'는 특수수사의 원칙이 허물어진 셈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법원은 법정증거를 중시하는 공판중심주의로 가고 있는데 검찰만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5만 달러 사건과 9억여 원 사건은 각각 2010년 4월 9일과 2011년 10월 31일 무죄를 선고받았다. "중요한 사건에서 증거법상 무리하게 기소하면 법정에서 무죄가 나오기 마련"이라고 했던 김승규 전 대검 차장(전 법무부 장관)의 발언(2005년 1월)이 한 전 총리 사건에서 적중한 셈이다.

 

'1심 2패'로 특수부 수사력에 치명적인 문제점 드러내

 

흥미로운 사실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두 사건을 맡았다는 점이다. 5만 달러 사건은 특수2부에서, 9억여 원 사건은 특수1부에서 맡아서 진행했다. 특수1부는 특수부의 선임부서다.

 

전국에서 가장 수사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검사들이 배치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대검 중앙수사부와 함께 검찰의 주요 수사부서로 검사들이 가장 선망하는 곳이다. 하지만 특수1부와 2부가 2건의 '한명숙 사건'에서 연속 패배하면서 특수부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게 됐다. '한명숙 흠집내기'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특수부 수사력에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난해 검찰 안에서는 '한명숙 트라우마'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5만 달러 사건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4월), 피의사실 공표 논란까지 일으키며 의욕적으로 수사했던 9억여 원 사건의 핵심 증인이 법정에서 검찰진술을 번복하자(12월) 충격에 빠진 검찰 내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최고 수사부서인 특수부가 한 전 총리에게 '1심 2패'하자 검찰 안에서조차 "수사의 기본이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은 검찰이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고 무리하게 수사를 벌였다는 얘기와 같다. 그래서 한 전 총리도 "이번 무죄판결은 정치검찰에 유죄를 선고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한명숙 사건'은 10년 민주파 정부에서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던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제기하고 있다. 향후 ▲ 검·경 수사권 조정 ▲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 ▲ 대검 중수부 폐지 등 검찰개혁 과제들이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태그:#한명숙, #9억여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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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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