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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미루 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없는 자료 사진으로 옛 모습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낙양읍성 낙민루. 찰미루로 추정되나 고증된바 없다.
▲ 찰미루 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없는 자료 사진으로 옛 모습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낙양읍성 낙민루. 찰미루로 추정되나 고증된바 없다.
ⓒ 김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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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성의 영웅으로 떠오른 이징옥이 찰미루(察眉樓)에 올랐다. 환호하는 벡성들과 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징옥의 눈 아래 두만강 푸른 물이 밟혔다. 강을 건너면 여진의 땅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땅이다. 감회가 새롭다.

조선시대 지방 읍성의 구조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대동소이했다. 객사를 중심으로 동헌, 내아, 찰미루, 관아 소속 무관의 사령청, 군사들을 총괄하는 훈련청, 심부름하기 위하여 아이들이 대기하는 통인청, 고을 여론 주도층들의 사랑방 향청, 관노비들의 관노청, 흉년과 보릿고개용 구휼미 보관용 진창, 그리고 서민들 경제활동의 장시와 옥이 있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은 객사와 찰미루다. 객관이라고도 불리는 객사는 고을을 찾아오는 손님맞이용 영빈관 구실을 했다. 특히 의주대로와 영남대로를 통과하는 고을 객사는 오가는 사신들의 숙소였다. 또한 군왕을 상징하는 전폐(殿牌)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하여 망궐례를 올렸다.

동헌 남쪽에 위치한 찰미루는 읍성 안의 가장 높은 누각이다. 백성을 귀히 여기는 목민관은 이른 아침 이곳에 올라 '밤사이 편안했는가?' 백성들의 얼굴을 살피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찾아와서 하소연하면 들어주는 척하는 피동적인 소통이 아니라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반면, 백성을 수탈의 대상으로 생각한 수령은 이곳에 올라 거드름을 피우고 과시성 행사를 벌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면 불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여진족의 습격에 노출되어 있는 종성의 찰미루는 용케도 보존되어 있었다.

좀스런 자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소인배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가 무슨 자리인가?"
"영상입니다."
"영의정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렇다. 영상의 자리는 하늘이 낸 자리다. 씨름판에서 업어치기로 딸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투전판에서 장땡으로 따는 자리도 아니다. 헌데 수양은 영상에 있던 황보인을 죽이고 지가 그 자리에 올라가 있다. 세상에 이런 불한당 같은 놈이 어디 있는가?"
"옳소!"
"화적떼만도 못한 놈이오."
"수양이 김종서 장군과 원로대신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쳐들어가다 발길을 돌려 이곳으로 왔다. 여러분과 함께 가기 위해서다. 여러분은 수양의 군사인가? 이 나라 군대인가?"

"이 나라 군대입니다."
"장군님의 군대입니다."

들끓는 열기가 하늘을 찔렀다.

"회령을 지나 여기로 오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김종서 장군과 원로대신들이 죄를 지었다면 조사를 받고 법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한다. 헌데 수양은 아무런 조사도 없이 죽였다. 탈법 살인이고 막무가내 학살이다."
"그놈도 똑같이 죽여야 합니다."

군중 속에서 주먹이 솟아올랐다.

"내가 한성에 쳐들어가 수양 일당을 도륙 낸다 해도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중국에는 아무 소리 못하고 자국민을 죽이며 권력쟁탈에 혈안이 된 소인배들하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면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소인배가 되지 않겠는가? 맨 손으로 호랑이를 잡던 이징옥이 소인배가 되어도 좋습니까? 여러분!"

"아닙니다. 장군님은 대인배입니다."
"아닙니다. 장군님은 대장군입니다."

징옥 소년시절, 이웃 고을 김해에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가는 호환(虎患)이 발생했다.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고 관가는 전전긍긍했다. 징옥이 호랑이를 잡아 바치겠다고 관아를 찾아갔다. 부사는 16세 어린 소년이 택도 없는 소리라고 돌려보냈다.

화가 난 징옥이 홀로 산에 올라 호랑이를 잡아가지고 내려와 부사 앞에 디밀었다. 기겁한 부사가 뒷걸음 쳤다. 징옥이 호랑이 입을 두 손으로 쩍 벌려 부사 면전에 들이대며 '호랑이를 잡아 백성들을 안심시켜야 할 부사가 손발을 놓고 있으면 호랑이 밥이 되어도 마땅합니다'라고 일갈했다. 그 소년이 오늘날의 이징옥 장군이다.

"나는 그동안 김종서 장군을 도와 6진을 개척하면서 두만강을 건너와 우리 백성을 죽인 여진족은 가차 없이 응징했고 먹을 것이 없어 도적질 하다 잡힌 여진족은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두말없이 놓아 주었다."

"와, 와!"
"우, 우!"
"우리 장군 멋쟁이!"

호응하는 함성사이로 털벙거지를 쓴 사내가 튀어 나왔다.

"지가 그때 삼수보에서 장군님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한 걸막이옵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

앞으로 나와 덥석 절을 올린 사내는 코가 깨지도록 계속해서 절을 올렸다. 걸막이에게 이징옥은 잊을 수 없는 은인이지만 이징옥은 기억이 희미하다.

"나는 이 젊은이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이 젊은이를 포함한 여진족들이 배가 고파 두만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는 모습을 볼 때 솔직히 마음이 아팠다. 청년 장교 시절, 그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고 윗사람들로부터 꾸중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의 조상을 파고들어가 보면 고구려와 맞닿아 있다. 결국 우리와 같은 동족은 아니라 하더라도 중국에 시달리며 고난을 함께했던 동지라는 말이다."

"우와"
"장군님 멋져부러!"
"맞어, 맞어, 장군님 말이 맞어."

함성을 질러대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숙연한 마음으로 귀를 종긋 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발해 권역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발해 권역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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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너머 너른 평원과 송화강과 흑룡강 주변 저습지에서 밭농사와 수렵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말갈족과 여진족은 우리와 뿌리가 같은 퉁구스 종족이다. 그들은 고구려가 강성했을 때 고구려에 복속했고 고구려가 패망했을 때 망국의 한을 같이했다. 고구려 유민을 규합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할 때 그들도 힘을 보탰다."

"우와. 그들은 적이 아니라 형제네."

여기저기서 긍정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타깝게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자 흑수부를 주축으로 한 말갈족이 거란의 지배 아래 들어가 요나라와 고려를 괴롭혔다. 거란이 쇠퇴하자 그들은 중국과 우리나라에 위협세력으로 떠올랐다. 만주 일대를 석권한 여진족이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란을 멸망시켜 대륙의 맹주로 등장했다.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으로 밀어내며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그들은 고려에 조공을 요구했다.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던 그들을 생각하면 괘씸하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우리네 인간들처럼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아니꼽지만 어쩔 것인가? 힘의 속성이 그런 것 아닌가. 현실론을 앞세운 이자겸의 협상으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 고려는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할 때까지 그 관계를 유지했다. 굴욕적이지만 그것이 국제관계다.

송나라에 동화되어 농경화된 집단이 숙여진이고 수렵 전통을 고수한 집단이 생여진이다. 건주여진이라고도 불리는 그들이 바로 두만강 너머에 똬리를 틀고 호시탐탐 중원을 엿보고 있다. 그들은 중원이 막강할 때는 움츠러들고 분열할 때는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은 오이라이트족의 침공을 분쇄하겠다고 직접 출정하여 포로가 되었던 정통 황제가 돌아와 아우 경태 황제와 박 터지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지금 이때가 적기라 판단한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한다. 쪼잔하게 한성에 쳐들어가 수양을 도륙내느니 그들과 힘을 합쳐 이곳에 나라를 세워 북경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싶다. 인간 말종 수양은 그 다음 문제다. 북경이 쇠(衰)하고 우리가 흥(興)하면 북경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북경으로 하여금 수양을 묶어 이곳에 보내게 하여 문초하려 한다. 내 생각이 어떤가? 여러분은 나를 따르겠는가?"

하늘 구글 위성에서 내려다 본 종성. 두만강을 건너면 한민족의 희망과 좌절이 서려있는 용정이다.
▲ 하늘 구글 위성에서 내려다 본 종성. 두만강을 건너면 한민족의 희망과 좌절이 서려있는 용정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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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한 포부다. 중국을 지렛대 삼아 수양을 잡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조선은 중국을 아버지나라로 받드는 사대의 나라다. 중국이 부당한 것을 요구해도 거절하지 못했다. 표전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표문(表文), 황태자에게 올리는 글을 전문(箋文)이라 한다. 조선 건국 초, 중국은 황제에게 올린 표문에 경박한 문구가 있으니 그 글을 지은 사람을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생트집이다. 거역할 수 없는 조선은 표문을 작성한 정도전은 빠지고 전문을 작성한 김약향을 보냈다. 표적으로 삼은 자가 안 왔으니 그것으로 끝날 중국이 아니다.

3개월 후, 고명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정총이 억류당했다. 정도전을 보내라는 것이다. 문제의 표문은 정탁이 지었고 정총과 권근이 교정했다고 변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압박에 굴복한 조선은 권근과 정탁 그리고 노인도를 명나라에 묶어 보냈다. 죄인 압송은 판사 이을수가 맡았다. 우리나라 관료가 우리 신하를 사지(死地)로 끌고 가는 꼴이었다. 사대관계가 더욱 심화된 현재 북경을 움직이면 수양 압송은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일장 연설이 끝나자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움직였다. 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중국과 대등한 대국의 백성이 된 양 서로서로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날 밤, 강 건너 조선 땅에서 벌어진 급변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여진족에서 밀사가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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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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