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기자말>

최근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시민군에 붙잡혀 총살된 것을 보고 박정희와 10·26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나도 새삼 놀랐다. 그런데 곰곰 따져 보니 실제 카다피와 박정희가 닮은 점이 생각보다 많은 게 사실이다.

박정희.
 박정희.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우선 두 사람은 색안경을 좋아한다. 언론에 보도된 카다피는 늘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박정희도 보도 사진이나 책에 진한 색안경을 쓴 모습으로 캐릭터화 돼 있다.
독재권력자와 색안경이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을까.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살펴보는 자신의 눈초리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특히 박정희는 정보장교 출신이어서 본색을 위장하려는 잠재의식이 있을 것이다.

또 대형 토목건설 공사를 벌인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그런 토목공사가 영웅주의적 카리스마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흔히 독재자들이 장기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큰 일을 벌인다. 박정희는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리비아의 사막지대에 지중해의 물을 끌어들이는 대수로 공사를 벌여놓았다. 이 공사는 나일강의 수량을 200년 동안 공급할 수 있는 양인 35조 톤에 이르는 물을 지중해 연안으로 송수, 한반도 면적의 약 6배에 해당하는 3억6800만 평에 이르는 사막을 옥토화 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세계 최대규모의 이 토목공사는 우리나라의 동아건설이 맡아서 눈길을 끌기도 했다.

거대 토목공사와 독재권력은 상당한 상관 관계가 있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중국 내륙에 운하를 건설한 것도 그런 예 중 하나다. 물론 우리의 경부고속도로나 고대 중국의 운하, 그리고 리비아의 대수로가 경제적 기여를 한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거기에는 얼마나 많은 국민의 피땀이 들어가야 하는가. 독재자가 그것을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세 사람 모두 개발독재자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 위상을 높인 것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지 결코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가져올 수가 없다는 점이 문제다. 더구나 국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한 탄압과 퇴행적 정치제도로 타락하는 공통점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하는 것이다.

박정희와 카다피는 닮은 꼴 독재권력

카다피와 박정희가 닮은 꼴인 것은 역시 민심의 이반으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공통점이다. 누구의 총에 맞아 죽었느냐는 것은 직접적인 사인에 해당하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장기독재에 대한 국민의 항거였다. 카다피도 붙잡히는 순간 경호원이 총을 쏘아 죽였다는 얘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민중의 손에 의해 처참해지기 전에 차라리 측근이 처리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일까. 김재규의 법정 진술에서도 그런 생각이 묻어나 있음을 느낀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한 10·26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은 1979년 12월 4일 첫 공판을 시작했다. 사건 발생 후 합수부가 수사를 개시한 지 39일 만에 재판이 열린 것이다. 1심 재판은 12월 18일 9회 공판으로 피고인들에 대한 사실심리와 증인신문, 증거조사 등을 끝내더니 20일 선고까지 초고속으로 치달았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물론이려니와 청와대비서실장 김계원과 중정부장 수행부관 박흥주 대령 등 7명 모두 사형이었다. 이 중 김계원은 나중에 무기로 감형된다.

재판이 시작된 지 불과 16일 만에 선고까지 모든 절차를 마친다는 것은 사법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속도전이었다. 대통령 살해라는 엄청난 사건임을 생각하면 법조인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혀를 내두를 만큼 정신 못차리게 밀어 붙인 재판이었다.

항소심인 고등군법회의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 1월 22일, 23일, 24일 연달아 3회 공판을 연 뒤 28일 선고해 버리고 말았다. 10·26 재판은 1심, 2심, 3심이 형량에 거의 변화가 없었다. 재판이 처음부터 이미 정해 놓은 결론을 실천하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었느냐는 시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거기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의 사형 확정 판결이 나오자 24일 김재규와 그 부하들을 함께 처형해 버리고 만다. 문명사회의 성찰과 고민이 눈꼽만큼도 담기지 않은 보복조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박정희 친위대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가 내란을 일으켜 국가권력을 찬탈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김재규의 변호인단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이 구명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란집단의 조치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치범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여론이 반영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김재규 최후진술 녹음테이프
 김재규 최후진술 녹음테이프
ⓒ 오마이뉴스

관련사진보기


10·26 군사재판 내용 중에서 중요한 역사 사료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정부장 김재규와 중정 의전과장으로 채홍사 역할을 한 박선호의 법정 최후진술이다. 두 사람의 최후진술은 1심과 2심에서 행한 것으로 모두 4개다. 이것이 다행히도 당시 계엄사 법무감실의 녹음테프에 담겨 이미 오래 전 기자 손에 입수됐다.

김재규의 최후진술 중 1979년 12월 18일 1심 재판정에서 행한 것은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이 눈길을 끈다. 당시 그의 최후진술은 기자들을 포함해서 방청객을 내 보낸 뒤 비공개 법정에서야 이루어졌다.

1980년 1월 24일 2심 재판정에서 행한 김재규의 두 번째 최후진술은 10·26 거사의 정당성을 명쾌하게 역설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선 그의 2심 최후진술을 녹음으로 정리한다. 당시 정치상황은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사실상 박정희 후계권력을 장악한 뒤다.

박정희 "서울에서 사태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김재규는 이런 바깥의 사정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의 최후진술은 조금도 더듬거나 중언부언하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한 편의 서사시와 같은 문장처럼 전개됐다. 어떤 숙련된 정치인의 연설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토해 내는 웅변이었다. 사람이 죽으면서 거짓을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증언인 셈이다.
법무사 : "김재규 피고인께서는…"
변호사 : "피고인이 몹시 불편한 모양인데, 앉아서…"
법무사 : "앉아서 이야기 하십시오. 피고인은 아까 변호인의 신문, 이제 막 변호사의 변론, 또한 피고인의 진술을 통해서, 또한 앞으로 제출될 항소이유보충서에 의해서 그것은 약속대로 공판기록에 틀림없이 찾아 놓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

김재규 : "네. 그동안 충분히 얘기했고, 변론도 있었고, 대부분 얘기는 됐지만, 이것이 최후의 진술이기 때문에 그저 몇 마디 마무리를 위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이 혁명의 필연성, 이것이 여러분들께서는 혹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정보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이제는 도리가 없다, 모든 방법이 다 끊어졌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 혁명을 결행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짐작은 했겠지만, 유신체제가 출범한 지 7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점 누적된 유신체제에 대한 항거하는 국민의 생각은 전국민에게 아주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부마사태는 좋은 증거입니다. 이것은 삽시간에 5대 도시로 번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유당 때 이승만 박사는 마지막에 가서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출신이고 또 너무 완벽한 분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러니까 어떤 저항이 있더라도 기어이 방어해 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다. 부산사태를 돌아보고 와서 보고를 드렸더니, 각하의 결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만일 서울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이때 재판을 주관하는 법무사가 참지 못하고 제지에 나선다. 그대로 나가다가는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는 이른바 '독대'자리에서 오간 얘기가 나올 판이다. 그것을 놔 둘리 없었다. 사형을 면치 못할 줄 뻔히 아는 피고인의 최후진술인데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 다 똑같아... 이 방법밖에 없어" 

법무사 : "저, 피고인 말이죠…"
김재규 : "네, 알았습니다. 그러나, 4·19 때 심한 불행이 있었습니다. 이 완벽한 성격의 이 분이 위에서 방어를 할 때, 어떤 험한 결과가 올지 상상해 보십시오. 이 결과가 몇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급기야는 국기(國基)를 흔들어 놓는다, 미국도 우리하고 등집니다. 그러면 사상적으로도, 국가방위에서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더 이상 늦출 길이 없다, 방법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대통령과의 관계가, 심판관님께서도 아시지겠지만, 친형제간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생각했지만, 야수의 마음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내 목숨이 이 혁명과 바꾼다는 것을 각오하고 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무사 말씀도 있고 해서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만, 하여튼 이런 필연성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알아주셔야 합니다.

보다 많은 희생을 막았습니다. 대통령 한 분을 희생시켰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이고, 역사적으로도 엄청난 일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다 아깝습니다. 다 똑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김재규는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방법 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비록 박정희가 대통령이지만 민주국가에서는 모든 국민이 다 똑 같기 때문에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였다. 이는 10·26의 역사적 의미로서 매우 핵심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 1979년 10월 19일 시민항쟁이 터진 부산·마산에서 진압군의 발포 가능성은 역사에서의 가정이 아니다. 7개월 뒤의 광주시민항쟁과 상황 변수들로 비교하더라도 동일한 것이어서 살상진압 음모를 부인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진압군으로 투입된 부대가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는 1공수여단,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장기오 준장의 5공여단이었다. 이들이 어떤 부대인가. 지휘관이 모두 전두환을 수괴로 하는 하나회 소속으로 1980년 5월 광주시민항쟁을 살상 진압한 바로 그 공수부대들이다.

뿐만 아니라 부산·마산에 강경진압을 건의하고 사나운 공수부대를 투입한 '지옥의 사자'도 다름 아닌 차지철과 함께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었다.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을 상대로 한 이들의 살상진압 음모는 1차로 김재규에 의해 저지됐다. 그러나 다음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발포까지 막지는 못한 셈이다.

차지철 "우리는 100만~200만 명쯤 희생 문제없어"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마치고 참가한 미 특전사 장병들을 격려하는 전두환 공수여단장.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마치고 참가한 미 특전사 장병들을 격려하는 전두환 공수여단장.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또 김재규는 1979년 12월 8일 열린 1심 2회 비공개 공판에서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사람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200만 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는 얘기가 나옵니다, 들으면 소름 끼칠 일들입니다"라고 증언했다.

이어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김재규는 민주정치와 여야 관계에 대해 견해를 밝힌다.

김재규 : "그 다음으로 가볍게 얘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 너무 완벽하면 곤란합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는 헐렁헐렁하게 좀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구멍이 너무 완벽해서 어디를 눌러도 손톱이 들어가지 않으니, 마지막 길로 치닿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20~25년 앞당겨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은 당돌한 얘기입니다만, 제가 제 목을 걸고 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에 할 사람 없습니다. 결국은 20~25년 동안 자유의 맛 못보고 그냥 갑니다. 그리고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야당을 긴급조치로 죄인을 다 만들어 놓고, 매일 같이 왜 빨리 입건하지 않느냐고 하니, 이거 다 입건하면 뭘로 정치를 합니까?

김영삼이란 사람, 국회에서 제명하면 됐지, 사법처리 하라고 하니, 이래 가지고야 누구를 믿고 누가 삽니까? 야당도 여당 믿고, 대통령 믿고 정치를 해야 하는데,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사지가 완전히 봉쇄된 상태다, 그래서 원컨대, 앞으로 어떤 분이 정치를 하든 간에, 민주주의 정치는 찬성이 있으면 반드시 반대가 있게 마련입니다. 대통령도 99.9% 지지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당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한 것이고,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것은 전체가 지지하면 오히려 몇 사람이 일어나서 "난 반대요"하는 것이 난 민주주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얘기는 더 장황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법무사 : "예, 이유보충서에…."

재판부는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자꾸 끊으려 했다. 갈수록 박정희 권력의 치부가 드러나는 증언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 군사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을 육성으로 듣고 있노라면 역사의 흐름을 실감한다. 권력의 속성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한다.



태그:#박정희 , #김재규 , #김재규 2심최후진술, #민중항거, #살상진압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울대 정치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하버드대 니만펠로십 수료. 동아일보 논설위원, 오마이뉴스 논설주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한국정치평론학회 회장,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제17대 국회의원, 방송통신위 상임위원-방송평가위원장, 서울디지털대 총장 등 역임. 현재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저서 : '한국정당과 정치지도자론' '군부와 권력' '우리시대의 정치와 언론' 외 10여권.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