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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을 대신해서 계백(이서진 분)에게 군권을 부여하는 백제 왕후(한지우 분).
 의자왕을 대신해서 계백(이서진 분)에게 군권을 부여하는 백제 왕후(한지우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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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방영된 MBC 드라마 <계백>에서는 의식불명인 의자왕(조재현 분)을 대신해서 왕후(한지우 분)가 왕권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속의 백제 왕후는 신라의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서 계백(이서진 분)을 대장군에 임명하는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오늘날에는 통치자가 의식을 잃으면 국무총리나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한다. 퍼스트레이디가 남편의 권한을 대행할 수는 없다. 아무리 비상시국이라도 퍼스트레이디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에는 왕후가 비상시국에 통치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제 때는 물론이고 조선시대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왕후들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중전의 명목으로, 남편이 죽은 뒤에는 대비·왕대비·대왕대비의 명목으로 비상시국을 지휘했다. 

참고로, 왕후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왕후의 지위를 유지했다. 남편이 사망할 경우, 왕후가 잃는 지위는 왕후가 아니라 중전이었다. 왕후는 현재 임금의 부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임금의 부인이나 부인이었던 여인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권한과 위상 높았던 왕후... 비상시국엔 최고통치권 행사

대비·왕대비·대왕대비가 최고통치권을 행사하는 사례는 사극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고, 선왕이 죽거나 물러난 뒤에 신왕의 등극을 승인했다. 수렴청정은 남의 권한을 대리하는 경우인 데 비해, 신왕 승인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에 해당했다.

중전이 최고통치권을 행사한 대표적 사례는 <세종실록>에 있다. 세종 8년 2월 15일(1426.3.23), 세종이 도성을 비운 사이에 한성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자, 소헌왕후 심씨가 조정을 지휘하고 화재진압을 감독한 일이 있다. 오늘날 같았으면 서울에 남아 있는 총리급이 국정을 지휘했겠지만, 전통시대의 상황은 지금과 달랐다.

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것이나 비상시에 조정을 지휘한 것은 임금의 권한을 대행한 경우에 해당한다. 하지만, 신왕의 등극을 승인하는 것은 자신의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에 속했다. 임금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비상대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왕후의 권한과 위상이 그만큼 높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의 퍼스트레이디는 왕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제4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퍼스트레이디는 그저 '대통령의 가족'에 불과할 뿐이다. 이 점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왕후는 단순히 '임금의 가족'에만 그치지 않았다. 왕후는 임금을 대신해서 '보조적인 권력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권한에 입각해서 '독자적인 권력기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백제 왕후의 평상복.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 안에 전시돼 있다.
 백제 왕후의 평상복.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 안에 전시돼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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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 '국가 수호 책무-독립적 권력기관 위상' 가져

전통시대에 왕후의 위상이 높았던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왕후도 국가 수호의 책무를 졌다는 점에 있다. 

현행 헌법 66조 2항에서는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고 했다. '대통령은…책무를 진다'고 했지, '대통령과 영부인은…책무를 진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인조 16년 12월 2일자(1639.1.5) <인조실록>에는 "(왕후 책봉 의식이 성대한 것은) 그와 함께 종묘사직을 받들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임금의 교화를 널리 천명하기 위해서다"라는 표현이 있다. 임금만 종묘사직을 책임지도록 한 게 아니라 임금과 왕후가 함께 책임을 지도록 했던 것이다. 이러했으니, 왕후가 독립적 권력기관의 위상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왕후의 위상을 높인 또 다른 요인은 왕후와 관련된 국가 의식이었다. 오늘날에는 대통령 취임식은 있어도 퍼스트레이디 취임식은 없다. 하지만, 전통시대에는 '왕후 취임식'이 있었다. 왕후 책봉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독자적 절차를 거쳐 지위를 얻었으니, 왕후가 남편의 생존 여부와 관계없이 비상대권을 행사하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또 왕후는 죽어서 종묘(왕실 사당)에 모셔졌다. 이것은 왕후가 사후에 국가의 조상신으로 승격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죽어서 신이 될 존재였으니, 왕후가 비상시국을 지휘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왕후의 위상을 높인 또 하나의 요인은 후계자 생산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국민경선이나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후보자를 선출하지만, 옛날에는 원칙적으로 왕후의 몸을 통해 예비 후계자를 생산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여성의 출산과 달리 왕후의 출산은 고도의 신성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왕후의 출산을 위해 산실청(후궁의 경우는 호산청)이란 기구를 설치한 것은, 그것이 신성한 국가 행사였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날의 퍼스트레이디가 아이를 밴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전통시대에는 왕후의 출산이 곧 예비 후계자의 생산이었기에, 그 시대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가 대통령선거에 집중하듯이 왕후의 출산과정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왕후의 몸은 한층 더 신성시되었다. '왕을 낳는 신성한 육체'로 숭상되었기 때문에, 임금이 없는 비상시에 왕후가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왕실의 소유물'인 국가, 안주인이 챙기는 건 당연한 일

청나라 말기의 근 50년 동안 실권을 행사한 서태후의 형상. 중국 북경 이화원(이허위안)에 있다.
 청나라 말기의 근 50년 동안 실권을 행사한 서태후의 형상. 중국 북경 이화원(이허위안)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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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의 위상을 높인 또 다른 요인은 전통시대의 정치환경에 있다. 옛날 국가는 오늘날의 국민국가와 달리 왕조국가였다는 사실이 왕후의 위상을 한층 더 제고했다.

현행 헌법 제1조 2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이렇게 비록 형식적으로나마 국민이 최고 권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현대 국가는 국민국가라고 불린다.

국민국가가 탄생한 것은 기본적으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간에, 국가는 기본적으로 왕실의 소유물 정도로 인식되었다. 또 군주는 왕실을 대표해서 왕실의 소유물인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지난 5월 종영된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백제 근초고왕의 정복전쟁에 저항하는 마한 연합체의 하층민들이 '무슨 무슨 나라 만세'를 외치며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장면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다. 전통시대에는 하층민들이 '내 나라'니 '나의 조국'이니 하는 인식을 갖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왕실의 소유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왕실의 소유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안주인인 왕후가 가장인 임금과 함께 나랏일을 챙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왕후의 권한이 한층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이 의식을 잃거나 죽은 경우에 안주인이 집안일을 챙기는 게 당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국민국가에서는 통치자에게 변고가 생기면 총리나 부통령이 직무대행이 되지만, 왕조국가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가장(통치자)에게 변고가 생기면 가복(총리·부통령)이 안주인(왕후)의 명령을 듣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됐던 것이다. 

지금까지 예시한 몇 가지를 포함해서, 왕후의 위상을 높인 제반 요인 때문에, 왕후는 퍼스트레이디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도의 권한과 책임을 보유했다. 많은 드라마에서는 왕후를 '남편 해바라기' 정도로 묘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실제의 왕후들은 직접 하늘을 우러러 자기의 책무와 역할을 고민하는 독자적인 권력기관이었다.


태그:#계백, #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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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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