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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유가 병장기를 빼내어 안평에게 실어 보낼 때 이경유 혼자 빼내고 혼자 운반하였겠습니까? 반드시 함께 일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기에 참여한 자가 있다면 손 한번 놀리고 발 한번 굴린 자까지도 모두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음모에 참여한 자이겠습니까? 하물며 이를 맡아 지킨 자이겠습니까? 하물며 이를 실어 나른 자이겠습니까? 하물며 상사(上司)가 되어 짐짓 놓아주고 묻지 않은 자이겠습니까? 이들은 죄가 크고 악이 극에 달해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경유의 수하 병방전무(兵房鎭撫), 군기고직(軍器庫直), 그리고 병장기를 빼내는데 음모한 자, 실어 보낸 자들을 끝까지 추문하여 법에 의하여 처치하고 그때의 감사(監司) 김문기, 도사(都事) 권수는 난적에 부동하여 덮어두고 묻지 않았으니 어찌 신자로서 할 일입니까? 모두 율에 의하여 왕법을 밝게 보이소서."

1453년 10월 17일 단종실록에 기록된 성삼문 상소 전문.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의 거사가 있었다
▲ 성삼문 1453년 10월 17일 단종실록에 기록된 성삼문 상소 전문.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의 거사가 있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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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간(司諫)답게 추상같다. '손 한번, 발 한번 놀린 자도 모두 용서할 수 없다'고 논박하고 있다. '하물며(況)'를 네 번이나 반복하며 힘주어 말하고 있다. 병장기 밀반출사건 당시의 함길도 관찰사 김문기를 실명으로 거론하며 '난적에 부동하여 덮어두고 묻지 않았으니 어찌 신하로서 할 일입니까? 왕법으로 다스리소서'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간이라면 당연한 발언이다.

하지만 병장기 밀반출 사건은 이제 수사 초기 단계다. 온갖 설(說)만 무성할 뿐, 아무런 증거와 증언이 없다. 권력을 장악한 수양으로부터 의금부 도사에 명받은 송취(宋翠)가 사건의 주체 이징옥을 체포하여 한성으로 압송하기 위해 함길도로 떠났을 뿐이다. 헌데, '난적에 부동하여 덮어두고 묻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예단이다. 이렇게 예단하고 강제 수사하는 의금부와 형조를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사간원의 간원이 먼저 치고 나선 것이다.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하지 말고 제일 큰 도적을 정조준 하라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대간(臺諫)이라 부른다. 대각(臺閣)이라는 또 다른 호칭도 있다. 홍문관과 함께라면 삼사(三司), 형조와 함께라면 삼성(三省)이라 부른다. 권력 감시기구의 최고위다. 형조와 의금부처럼 직접 수사권은 없지만 그들이 법을 벗어나거나 형벌을 남용하여 죄인들을 다루면 그들을 견제하거나 탄핵할 권한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정승판서가 도덕과 법률에 벗어나도 탄핵하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마저도 간(諫)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오늘날의 언론과 비슷하다.

지금 현재. 진정 간(諫)을 받아야 하고 탄핵을 받아야 할 대상은 국법을 유린한 수양대군이다. 그는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를 법에 의하지 않고 직접 참살했다. 왕명을 빙자하여 황보인과 이양, 조극관 등 조정 대신들을 시좌소로 불러들여 불법으로 격살했다. 초법적 살인이다. 진정 용기 있는 사간원 관원이라면 수양대군에게 간(諫)이라는 칼을 들이대야 한다. 사간원의 초기 대응을 보면 1979년 12월 전두환과 당시 언론의 행태가 겹쳐진다.

1979년 12월 12일 밤.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튿날 동아일보 호외. 반란군의 하극상을 보도해야할 신문이 합수부의 발표에 따라 정승화 총장 연행사실만을 보도하고 있다.
▲ 신문 1979년 12월 12일 밤.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튿날 동아일보 호외. 반란군의 하극상을 보도해야할 신문이 합수부의 발표에 따라 정승화 총장 연행사실만을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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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언론은 전두환 패당의 하극상을 집중 조명하기는커녕 합동수사본부에서 내려주는 보도자료를 받아 복사기처럼 확대 재생산했다.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갈 때 신문과 방송은 반란군의 나발이 되어 국군의 자국민 학살을 정당화했고 광주시민을 폭도라 규정했다.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이 국권을 유린한 수양대군에 맞서 봉기했는지? 변방을 지키는 순수한 장수였는지 아직은 모른다. 성삼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성삼문 그 역시 인간이기에 서슬 퍼런 무단 권력 앞에 움츠러들었는지 전략적인 발언이었는지 지켜볼 일이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 전두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12.12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맹자 이루하(離婁下)편에서 유래한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중국은 만만디가 생활화 되어 있고 우리나라 백성들은 성질이 급해서일까? 중국인들은 신중하게 행동하지만 우리는 생각 즉시 말하고 행동하는 성정 때문일까? 한자의 종주국 중국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즐겨 쓴다.

성삼문 나이 서른다섯. 아직 인생을 관조하기에는 이르다. 혈기왕성하여 너무 나가지 않았는지 불안하고 수양에게 이용당하고 있는지 의아스럽다. 수양이 거사하고 대위(大位)에 오르는데 20개월,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키고 대권(大權)에 오르는데 15개월. 언론을 이용하는 방식과 기간이 흡사하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불과 얼마 후에 자신이 역지사지란 말을 곱씹어야 할 처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남이 하면 투기 내가 하면 투자, 내가 위등하면 자식사랑 남이 하면 불법, 남이하면 뇌물 내가 하면 선물, 내가 하면 면제 남이 하면 면탈, 내가 지으면 아담옥 남이 지으면 아방궁,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의(義)로운 배려다. 항상, 늘 그랬듯이, 인생을 일관되게 역지사지를 추구하기란 어려운가 보다.

작심 3일이라는 말이 있다. 일관(一貫)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반어다. 하물며 3개월은 대단히 어렵다고 공자도 실토했다. 마음먹은 일을 3개월 이상 줄기차게 지속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안회는 한번 하겠다는 일을 3개월 이상 꾸준히 실행하는데 자신은 2개월이 지나면 무너진다고 고백했다. 하여 '인간의 구(久)는 3개월이다. 이를 지속가능하게 갈고 닦는(修身) 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다'라고 설파했다.

성삼문 시문집. 매죽헌집
▲ 성삼문 성삼문 시문집. 매죽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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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에 이어 좌헌납 허추가 가세했다. 성삼문과 함께 사간원 간원이다.

"병장기를 실어 나른 죄는 실로 엄중한 일입니다. 배 두 척을 써서 나를 때 이징옥과 김문기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뒤이어 우정언 공기(孔頎)가 지원에 나섰다.

"안평이 비록 부도한 마음이 있었더라도 더불어 같이 할 자가 없었으면 어떻게 역모를 도모하겠습니까? 김문기가 함길도의 통찰(統察)인데 어찌 병장기 실어 나르는 일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말하기를 '한양에 도착한 뒤에 하인의 얘기를 듣고 비로소 알았다.'하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수양이 우헌납(右獻納) 김계우를 불렀다.

"병기를 실어 나른 일은 이미 전지를 내렸으니 다시 추문할 수 없다."

"병기를 실어 나른 일은 그 행적이 분명하니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징옥과 이세문을 극형에 처하고 김문기와 권수를 법으로 다스리소서."

수양이 움직이지 않자 장령 이언(李堰)과 우헌납 김계우가 다시 아뢰었다.

"김문기가 말하기를 '병장기 실어 나르는 일을 함길도에서 어슴푸레 듣고 왔는데 서울에 도착해서 하인의 말로 자세히 알았습니다.'라고 하였으니 대단히 정직하지 못합니다. 비록 이미 전지를 내려서 다시 국문을 할 수는 없다 하나 김문기의 일은 역당과 관계된 엄중한 일이오니 다시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문기는 다시 추문할 것이 없다."

수양이 단호하게 잘랐다. 한명회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김문기 문제를 일단락 지은 수양은 종친과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길복(吉服)으로 전(箋)을 올렸다.

"슬기로운 지혜로 번개처럼 달리니 하늘과 사람이 화합하고 순응하였다. 흉한 음모가 와해되니 국토와 나라가 편안해졌고 윤음이 반포되니 환호하는 소리가 사방에 들끓었다. 충만한 자리를 보존하고 이룩한 공덕을 지켜 열성(列聖)의 계통을 이었다. 조상의 뜻을 계승하고 대업을 준수하여 바야흐로 태평의 아름다움을 맞았다."

녹권을 받은 자들에게는 토지와 노비가 내려지고 자식에게 음직 혜택이 주어졌다
▲ 공신녹권 녹권을 받은 자들에게는 토지와 노비가 내려지고 자식에게 음직 혜택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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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공행상이 벌어졌다. 판중추원사 정인지, 좌찬성 한확, 운성위 박종우, 판중추원사 김효성, 우참찬 이사철, 병조참판 이계전, 도승지 박중손, 좌부승지 최항, 첨지중추원사 홍달손, 집현전 교리 권람, 경덕궁직 한명회에게 정난공신 1등이 내려지고 우승지 권준, 부승지 신숙주, 제용감정 윤사윤, 호군 양정, 유수, 유하, 행호군 봉석주, 전 주부 홍윤성, 전부사직 곽연성, 행동판내시부사 엄자치, 행 첨지내시부사 전균이 2등이 되었다.

3등에는 상호군 이흥상, 사인 이예장, 행 집현전 직제학 성삼문, 행 사직 김처의, 겸군기 주부 권언, 부사직 설계조, 유사, 행 사용 강곤, 부사 직 임자번, 주서 유자황, 사정 권경, 승사랑 송익손, 사용 홍순손, 전사용 최윤, 학생 유숙, 부사직 안경손, 진사 한명진, 진의부위 한서구, 전대부 이몽가, 전사직 홍순로에게 내려졌다.

전토·노비·음직 하사받은 공신, 가문의 영과? 역사의 죄인?

수양은 이들에게 전각을 세워 초상을 그려 붙이고 1등에게는 전토 200결과 노비 25구, 2등에는 전지 150결과 노비 15구, 3등에는 전토 100결과 노비 7구를 내려주라 명하고 그의 자손들은 과거시험 합격 여부와 관계없이 관직을 제수 받을 수 있는 음직을 부여했다. 오늘날의 훈장보다도 더 큰 혜택이다.

논공행상을 마친 수양은 조정을 개편했다. 박종우를 운성위로 삼고 우의정 한확, 좌찬성 이사철, 판중추원사 김효성, 좌참찬 이계린, 형조판서 박중림, 호조참판 이변, 경창부윤 김말, 첨지중추원사 이흥상, 집현전 부제학 김신민, 사간원 좌사간 하위지, 우사간 성삼문, 사헌부 집의 이개, 지사간원사 구치관, 평안도 도절제사, 충청도 처치사 박쟁, 밀양부사 이교을 제수했다.

거사 당시 판중충뤈사 정인지는 우의정으로 승차했고 집현전 직제학 성삼문은 우사간으로 승진했으며 경덕궁직이었던 한명회는 동부승지로 발탁했다. 이어 잔치가 벌어졌다. 여흥이 무르익어갈 무렵, 이징옥을 압송하라는 명을 받고 함길도에 파견된 송취가 보낸 전령이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박호문이 살해당했습니다."

이징옥의 뒤를 이어 함길도 도절제사에 제수된 박호문이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태그:#수양대군, #성삼문, #전두환, #역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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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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