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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이문열씨가 19일 오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강연에서 강연하고 있다.
 소설가 이문열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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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29일, 대한민국 검찰은 연세대 교수 마광수를 소설 <즐거운 사라>의 외설 혐의로 긴급 체포, 구속했다. 이후 이문열은 11월 2일자 <중앙일보>에 마광수 구속과 관련하여, '문학을 뭘로 아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다. 이문열은 이 칼럼에서 "내가 이 나라에서 글 쓰는 사람들 중에 가장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 중 하나는 바로 그 <즐거운 사라>를 쓴 마아무개 교수다"라고 전제한 후,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그 첫째는 그의 보잘것없는 상품이 쓰고 있는 낯 두꺼운 지성과 문화의 탈이다. 근년 그가 쓴 일련의 글들은 이미 알 만한 사람에게는 그 바닥이 드러났을 만큼 함량 미달에 정성까지 부족한 불량상품이었으나 그는 어거지와 궤변으로 과대 포장해 왔다. 둘째, 그가 못마땅한 이유는 이미 자신의 생산에서 교육적인 효과는 포기한 듯함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라는 신분을 애써 유지하는 점이다. - 이문열 <중앙일보> 기고문 중에서

이 글에서 이문열은 문학뿐 아니라 지성과 문화에 대해서까지 근거 없이 배타적 권리를 행사했다. 그는 마광수의 소설은 '상품'일 뿐이고, 마광수가 가진 지성과 문화는 '낯 두꺼운 탈'일 뿐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기의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자기는 지성인이자 문화인이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다음으로 이문열은 타인의 직업에 대해 월권을 감행했다. 그는 마광수가 '대학교수라는 신분을 애써 유지하고 있는 점'을 비난한 것이다.

진중권의 모함과 월권은 어디까지

곽노현 사건 초만 해도 진보매체들은 올바른 스탠스를 유지했다. 하지만 '나꼼수'의 선동 방송 한 방에 대중의 분위기가 바뀌자 태도를 180도로 바꾸었다. 더 한심한 것은 진보적 학자들마저 이 분위기에 편승해 곡학아세를 한다는 것. "도덕은 보수에게 줘 버리라"는 윤리적 자살 테제, "상식에 맞지 않는 진실도 있다"는 논리적 자살 테제, 심지어 "진중권은 <조선일보>에 세뇌됐다"는 '박헌영 미제간첩 테제'까지. 읽지도 않는 신문에 세뇌까지 당한다는 이 심오한 이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 진중권 <오마이뉴스> '곽노현 거울에 비친 진보의 일그러진 초상'

이 글에서 진중권은 진보에 대해 근거 없이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그는 곽 교육감을 두둔하는 진보는 '선동'이고 그들의 행위는 '곡학아세'일 뿐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가 진짜 진보라는 자부심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진보매체가 '나꼼수' 선동 한 방에 태도를 확 바꾸었다는 그의 주장은 모함에 가깝다. 곽 교육감을 두둔하는 주장은 '나꼼수' 곽노현 편이 처음 방송된 8월 31일 전에도 이미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사실 나는 '나꼼수'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나꼼수'에서 8월 31일에 곽노현 편이 방송되었다는 것도 지금 찾아보아 안 것이다. 내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나는 검찰보다는 곽노현에 걸겠다'는 제목의 글을 쓴 시점도 8월 31일 점심 때였다. 나는 모든 것을 '나꼼수 한 방'으로 몰아붙이는 진중권의 저돌성이 놀랍다. '선동'이라면 민주노동당 분당 시점의 그가 먼저 떠오른다. 같은 당의 동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며 분당을 선동했던 결과가 지금 어떠한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다음으로 진중권은 곽노현의 사퇴를 주장할 뿐 아니라 그의 사퇴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비난의 화살을 쏘고 있다. 대관절 이것은 무슨 월권이란 말인가? 서울시교육감 직에는 인간 곽노현의 꿈과 노력이 집대성되어 있다. 동시에 교육감 직은 그의 필생의 직업이기도 하다. 나는 진중권의 주장이 이문열이 마광수에게 왜 대학교수 직을 유지하고 있냐고 힐난한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여긴다.

나는 곽 교육감의 유무죄에 대해 판단을 내린 적 없다. 다만 '법률과 도덕은 규제하는 범위가 다르기에, 유무죄의 법률적 판단 이전에 곽 교육감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미래의 법률적 판단에서 도덕적 판단을 이끌어낸 적은 없다. 법률과 도덕을 동일시하는 것은 외려 곽 교육감을 옹호하는 측이다. 그들이야말로 판결 전까지 사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 진중권의 같은 글

진중권은 '곽 교육감의 유무죄에 대해 판단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장문의 글 중 반 이상을 곽 교육감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할애했다. 논리 용어로 말해서 이것은 '자가당착의 오류'가 된다. 그의 글은 가히 검사의 논고 수준이었다.

나는 10여 년 전 진중권이 이문열을 비판한 글 '이문열과 젖소부인의 관계'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 글은 참으로 신랄하고 논리적인 '불후의 명작'이었다. 진중권은 자기가 보지도 않는 <조선일보>를 닮았다는 한 진보인사의 주장에 대해 황당해 했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진중권은 <조선일보>를 닮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이문열을 닮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9일 오후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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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로 점철된 진중권의 허박한 논리

진중권은 자기를 비판하는 글은 모두 '허접'했다고 하면서 '그나마 읽어 줄 만한 것'은 한상희 교수의 글이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글의 곳곳에서 '논리적 오류'를 운운했다. 논리를 중시하는 그에게 논리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아 눈에 띄는 몇 군데만 골라서 지적하고자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물었다. "진중권의 정의는 무엇인가?" 건국대 법대의 한상희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정의라는 말 앞에 이렇게 소유격을 붙이면, 더 이상 정의는 정의일 수 없다. 네 정의가 다르고, 내 정의가 다르다면, 정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의란 네 편, 내 편을 떠나 공정함을 의미한다. 정의가 눈 가린 여신의 손에 든 천칭으로 상징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교수의 물음은 법학이 아니라 차라리 정치학의 영역에 속한다. - 진중권의 같은 글

여기서 진중권은, 한상희가 정의라는 말 앞에 '소유격'을 붙여 말한 것이 잘못이라고 했다. '진중권의 정의'라는 표현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소유격이 아니다. 영어의 '아포스토로피(apostrophe)'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말에서 '의'는 소유격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의 '의'는 진중권 '소유'의 정의가 아니라 진중권이 '생각하는(또는 말하는)' 정의다.

그러므로 한국어 문법에서는 '의'를 '소유격'이라고 하지 않고 의미의 폭을 넓혀 '관형격'이라고 한다. 진중권은 관형격의 '의'를 소유격의 '의'로 혼동했거나 아니면 이 혼동을 이용해 말했을 터이다. 논리에서는 이런 오류를 '다의어(애매어)의 오류'라고 한다. 참고로 오류를 모른 채 오류를 행하면 '무지'한 것이지만 오류인 줄 알고도 오류를 행하면 그것은 '기만'이 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에 대한 진중권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그의 정의 개념은 다분히 '신자유주의적'이다. 현대적 의미의 정의란 그의 말대로 '일률적인 공정'이 아니다. 그가 글에서 써먹은 '눈 가린 여신의 천칭'도 아주 낡아빠진 것이다.

진중권에게는 의문스럽겠지만 나는 그가 글 첫머리에 제시한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을 그리 우대하지 않는다. 나는 마이클 샌델의 것보다는 존 롤스의 정의론을 더 우대한다. 거칠게 말해서 현대 정의론의 핵심은 '일률 공정'이 아닌 '차등의 원칙'에 있다. 부자의 정의와 빈자의 정의가 어떻게 일률적일 수 있겠는가?

진중권이 '극우'일 리는 없을 텐데...

한상희 교수의 논리를 재구성해 보자. '①후보사퇴와 금품제공 사이에는 시간적 연속만 존재할 뿐이다. ②그런데도 법률은 곽 교육감을 처벌하려 한다. ③그렇다면 법률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④잘못된 법률로 곽 교육감을 단죄하는 진중권은 법 실증주의자다.' 이 논증에서 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당연히 ①이다. 즉 한상희 교수는 곽 교육감의 "선의"를 너무 굳게 믿은 나머지, 입증되어야 할 명제를 미리 전제한 채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그래서 앞에서 '선결문제 전제의 오류'라 했던 것이다). - 진중권의 같은 글

아마도 이 부분이 진중권 글의 백미(?)가 될 것 같다. 이  부분에는 한상희의 주장에 대한 심한 왜곡이 개입되어 있다. 한상희는 검찰이 곽 교육감에게 적용한 '선거법 232조 제2항'의 정당성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 부연했을 뿐이지, 위에 제시된 것처럼 '시간적 연속만 존재할 뿐'인데 검찰이 곽 교육감을 처벌하려 했으니 그 법이 악법이라는 식의 주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진중권이 한상희에게 사과해야 할 대목이다.

다음으로 진중권은 '선결문제 전제의 오류'를 말했다. 그는 한상희가 곽 교육감에 대한 선의를 너무 굳게 믿은 나머지 '후보 사퇴와 금품 제공 사이에 시간적 연속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입증되어야 할 명제를 미리 전제한 채 논리를 전개했으니 오류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한상희는 '후보 사퇴와 금품 제공 사이에 시간적 연속만 존재할 뿐이다'고 한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서 증명된 것은 시간적 연속밖에는 없다'고 주장했을 따름이다.

인과관계의 입증 책임은 곽노현이나 한상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검찰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상식이다. 오히려 진중권이야말로 마치 자기가 검사인 양, 금품 제공과 후보 사퇴 사이에 인과적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곽 교육감의 유죄를 단정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 진중권은 선후관계를 다짜고짜 인과관계로 오인한 것이다. 이것은 '원인오판의 오류' 또는 '거짓 원인의 오류'가 된다.    

혹자는 검찰을 탓한다. 우리는 검찰의 피의사실 유포를 비판할 수 있고, 이번 수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의 잘못에서 논리적으로 곽 교육감의 결백이 추론되는 것은 아니다. 둘은 논리적으로 독립된 사안이다. 그러므로 검찰을 비판하기 위해 곽 교육감의 행위를 정당화해줄 필요는 없다. - 진중권의 같은 글

수사와 범죄가 '논리적으로 독립된 사안'이라는 진중권의 주장은 인류 형법사상 최초로 제기된 주장일 것이다. 여기에는 극우적인 목적지상주의 또는 결과우선주의의 가치관이 잠복되어 있다. 명민한 진중권도 궁색한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려다 보니 이런 무리가 나타난 것 아닌지. "예리한 감각과 치열한 논증이 장점이던 진중권의 글이 왜 이리 일그러져 보이는가? 뜬금없이 맥락도 없이 <한겨레>가 게재한 그의 칼럼은 첫 문단에서부터 자의적인 개념과 밑 빠진 비약으로 일관한다"고 한 한상희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어제(11일) 수원지법에서는 음주운전사고 혐의로 기소된 두 명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있었다. 운전자의 동의나 사전 또는 사후 영장 없이 불법으로 채취한 혈액 등은 음주운전 유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연히 이것은 과정이 잘못되면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다.

 19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저자와의 대화 : 진중권 '교수대 위의 까지>가 열리고 있다.
 평론가 진중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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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공세에는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의'

"정치인들이 하는 짓과 뭐가 다른가? 정치인들은 자신의 비리가 들통 나면, 일단은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것이 '권력의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그들이 이렇게 윤리적, 법률적 사안을 툭하면 정치 문제화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정치에는 늘 두 개의 파당이 있어, 그렇게 하면 인구의 절반이 제 편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속으로 그의 유죄를 믿는 이들까지도 정치적 담론의 장에서는 그가 가련한 권력의 희생양이라고 우겨준다. 진보가 이런 것까지 닮아야 하나?" - 진중권의 같은 글

진중권은 진보진영에서 도덕적인 문제를 부당하게 정치화한다고 날을 세운다. 2009년 진중권은 강의 중이던 중앙대의 겸임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겸임교수'란 말 그대로 다른 기관의 겸직이 있어야 임용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실하고 유능하게 강의해오던 그를 갑자기 탈락시킨 것은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때 그는 "이번 정권 들어와서 한국종합예술학교, 카이스트에 이어 중앙대까지 겸임교수 직이 날아가버렸는데 우연의 일치겠느냐?"고 말하면서 자신의 재임용 탈락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정치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 때는 하는 것이 마땅한 경우가 많다. 

위 문단의 마지막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심지어 속으로 곽 교육감의 유죄를 믿는 이들까지도' 그를 두둔한다고 말한다. 그는 타인의 심중을 꿰뚫고 있다. 나는 이것이 그가 남을 비판할 때 곧잘 쓰는 '궁예의 관심술'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곽 교육감의 보석신청에 대한 법원 판단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동안 잠잠히 있던 진중권이 왜 분주히 글을 올린 것일까? 진중권도 이번 곽 교육감의 수사에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 바 있다. 어차피 정치적으로 시작된 수사라면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론이 된다.

예로부터 정의란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힘의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란 없다. 옛날 마광수 구속 때에도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재판에서 마광수를 비난한 이문열의 칼럼이 검사의 심증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진중권은, "아무리 비루하고 허접해도 내 영혼은 최소한 그런 짓에 동참하지 않을 정도만큼은 고결하다"고 고백했다. 나는 스스로 '고결하다'는 그의 '심증'의 확신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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