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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부터 친하게 지내는 동생뻘 되는 후배가 한 명 있다. 집에서 조신하게 알뜰살뜰 살림만 하다가 IMF 때 남편이 직장을 잃어버린 관계로 지금은 일터에서 열심히 돈을 벌며 산다. 일산에 있는 작은 보습학원에서 실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주로 학부모 면담을 맡아 일을 한단다. 착실하고 성실하고 거기다가 수시로 문자며 전화며 인사도 잘하는 예쁜 그녀와 며칠 전 일산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났다. 서로가 바빠서 얼굴도 못 본 지 반년쯤은 된 것 같다.

"잘 지내지? 학원도 잘 나가고? 남편은 아직도 집에서 놀아?"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을 향해 연달아 계속 질문을 퍼부어댔다. 학원에선 진급을 해서 월급이 좀 올랐고, 남편은 아직도 놀고 있단다. IMF가 지난 지 13년이 되었으니 13년째 노는 셈이다. 살림하는 재주가 전부였던 그녀가 갑자기 나가서 돈을 벌려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학부모 상담이라는 것이 밤 10시가 되어야 끝이 나는 직업이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일을 하며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자란 두 아들은 벌써 다 커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직장도 얻어 지금은 돈까지 벌어온단다.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남편이 그 모양으로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연년생인 두 아들은 엄마가 힘들게 벌어온 돈인줄 아는지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지금은 둘 다 좋은 직장도 얻었고 착실하게 생활하며 시간만 나면 틈틈이 집안일도 많이 도와준단다. 문제는 바로 이 남편이다.

몸도 건강하고 덩치도 좋은 사람이 일을 찾지도 않고 하지도 않는다는데, 밖에 나가 일을 하지 않으려면 집에서 설거지나 청소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해놓은 밥만 먹고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단다. 그런 아빠를 아이들은 미워하는 대신 옛날의 아빠를 생각하며 불쌍해하고 안쓰러워하는 모양이다.

어디서 무슨 돈으로 밤마다 술은 사오는지(어쩌면 자식들이 자기가 받은 용돈을 쪼개주는지도 모르겠다.) 후배가 일을 끝내고 밤 11시쯤 집에 돌아오면 굴러다니는 소주병이 두서너 개는 된단다. 술병을 치우는 것이 귀찮아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만큼이나 괴롭다'라고 시위하는 것인지도 헷갈린단다. 내가 얘기를 들어보니 완전히 알코올중독자 수준이다.

"부인 밖으로 내돌리기 싫다 했는데... 기다릴 걸 그랬나봐"

KBS 드라마 <사랑을 믿어요>에 나오는 김영희(문정희), 권기창(권해효) 부부 가족. 남편의 학원이 문을 닫고 아내가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둘 사이 싸움이 잦아진다.
 KBS 드라마 <사랑을 믿어요>에 나오는 김영희(문정희), 권기창(권해효) 부부 가족. 남편의 학원이 문을 닫고 아내가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둘 사이 싸움이 잦아진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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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내 기억 속의 그 남자는 지금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부인을 아끼며 아이들을 사랑했고 열심히 일을 하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땡 치면 출근해서 땡 치면 퇴근하는 말 그대로 '땡치리' 남편였다.

남을 속일 것 같지도 않고 남과 싸우지도 못할 것 같은 선한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러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회사 부도로 인해 직업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하루 불안한 상태였던 그 시절. 남편은 일자리를 찾으러 매일매일 여기저기 수소문하러 다니지만 매번 허탕이고, 애들 교육비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갈 때인데 돈은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내가 그때 그녀를 꼬드겼다.

"자기야, 그럼 자기가 대신 일을 찾아봐. 꼭 남자만 돈 벌어 와야 한다는 법이 어딨어? 자기가 일을 하면 남편이 대신 살림 좀 해주겠지."

이렇게 시작해서 그녀는 일을 찾았고 13년이 흘러서 여기까지 왔다. 그동안은 자주 그 후배가 내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었다. 망연자실 넋놓고 있던 자기를 깨우쳐줘서 고맙다고. 자기라도 정신을 차리고 돈을 벌어서 그나마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고. 그러던 그녀가 그날은 술의 힘을 빌려서 내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언니, 나 일 괜히 시작했나봐. 내가 일 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이 무지 말렸던 것 언니도 기억하지? 자기가 일 더 찾아볼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고, 나는 집에서 실림만 하라고 말이야. 자기는 부인을 밖으로 내돌리는 무능한 남편이 되기 싫다고 그랬잖아."

폐인이 되어버린 남편이 속상하고 그 남편이 너무도 미워서 흐느끼는 그녀에게 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다가 옹색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말은 바로 하자. 부인이 밖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무능한 거냐. 부인이 밖에서 일하는데도 집에서 놀면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 무능한 거냐."

사회생활 하는 부인 안 도와주는 게 진짜 '무능 남편'

천성이 착한 내 후배. 집을 나올 때마다 밥도 해놓고 국도 하나씩 꼭 끓여 놓고 나온단다.
그런데 남편이 먹을 건 다 챙겨 먹고 설거지통에 빈 그릇만 다 처박아 놓는다는데, 13년 동안 꼭 필요한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대화도 거의 안 하는 상태이고 아무리 집안일 좀 도와 달라 해도 못 들은 척 한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 아빠인데 생으로 굶길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내게 묻는다.

"남편을 붙잡고 '나 일하고 밤늦게 돌아와서 그릇 닦고 치우려면 너무 힘들어. 설거지랑 청소는 대충 해주면 좋겠어. 계속 그렇게 처박아 놓으면 나 더 이상 밥 안 해'라고 말해. 그리고 그 다음에도 또 처박아 놓으면 진짜로 더 이상 밥 해주지 마. 그런 사람은 밥 먹을 자격 없어."

"언니, 내가 그때 남편이 일 찾을 때까지 좀 기다려 줄 걸 그랬나봐. 집에서 살림만 할 때는 나가서 돈 좀 벌고 큰 소리 치고 싶더니만, 해보니 밖의 일이 더 힘들어."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 밖의 일이나 집의 일이나 다 힘든 거야. 그리고 남자만 나가서 일하라는 얘기가 말도 안 되듯이, 여자만 부엌일 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그때 네가 발 벗고 나가서 일을 했기에 그나마 애들도 잘 커서 직장도 얻었고 가정도 지켰잖아. 넌 큰 일 한 거야."

"언니, 나 남편하고 이제 그만 헤어질까?"
"......."

그때 그녀가 집에서 남편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직장도 구하고 일도 했다면 과연 저 정도 폐인까지는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밤늦게까지 일하다 들어 온 부인에게 자기가 먹은 음식 설거지며 빨래며 청소까지 시키는 그의 행동을 보면, 그녀가 직장 구하기를 단념한 채 남편에게 경제적인 책임을 맡기고 살림만 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녀가 남편을 더 기다렸다 하더라도 그는 몇 번 더 일자리 구한다고 애쓰다가 좌절해 지금처럼 소주병을 옆에 끼고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폐인이 된 이유는 아내의 사회활동이 아닌 본인 안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사적 영역인 가정 일을 하고 남자는 공적 영역인 임금 노동 일을 해야 했던 지난 시절. 그토록 오랫동안 길들여진 가부장제의 틀을 선뜻 깨고 나오기에는, 그 껍질이 그에게 너무 단단한가 보다. '가부장제 지킴이' 노릇을 하고 있는 그가, 밉다.


태그:#아줌마, #학원상담사, #가사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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