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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미국 뉴욕주 항소법원은 “혼인증명서가 면책특권을 갖고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일 수 없다. 기혼 여성도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고 판결했다(People v. Loberta 판결).
 1984년 미국 뉴욕주 항소법원은 “혼인증명서가 면책특권을 갖고 아내를 강간하는 자격증일 수 없다. 기혼 여성도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지닌다."고 판결했다(People v. Loberta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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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2일 서울고등법원 형사9부는 아내를 강간한 남편 J씨에 대해 성폭력특별법 상의 특수강간죄를 인정,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법률상 아내가 모든 경우에 당연히 강간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혀 "아내는 강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1970년 대법원 판례를 뒤집었다. 

2009년 부산지방법원이 최초로 아내에게도 '성적자기결정권'이 있음을 인정한 이후, 2010년 인천지법도 아내강간 피해자의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인정하며 강간죄 유죄를 선고했다. 이후 인천사건의 항소심을 진행한 서울고법은 올해 1월 "강압적인 성관계 요구는 아내의 의무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 명시하며 아내 강간을 인정했다.

이번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법률상 혼인상태에 있는 부부에게 내려진 최초의 항소심 판결이라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지속된 아내강간 판결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어찌보면 당연한 판결이라 할 수 있겠다(지난 1월 서울고법판결은 아내강간을 인정한 최초의 항소심 판결이지만, 1심 재판 중에 이혼했다).

아내강간이라는 말조차 없었던 10년 전에 비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놀라운 일이다. 2000년 자신을 강간하려 한 남편을 살해한 신아무개씨 사건을 계기로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이 아내강간을 사회문제화할 때만 해도 '아내강간'은 낯선 단어였다. '아내'와 '강간'이라는 단어가 실제 사용가능한 조합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아내강간 피해자들은 "내 몸이 더러운 물을 버리는 시궁창 같았다" "죽을 것 같은 구타보다 더 치욕적이었다"며 괴로움을 호소하지만 "왜 남의 집 이부자리 속까지 법이 개입하느냐"며 내동댕이치듯 외면 받았던 것이 바로 아내강간이었다.

암흑했던 시간을 지나 이제 아내강간을 인정하는 판결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지금, 마냥 좋아하기에는 아쉬운 몇몇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2010년 인천사건 항소심 판결과 이번 서울고법 판결에서 연이어 발견된 2심에서의 가해자 감형, 그리고 여전히 심각한 폭력이 동반되었을 경우에만 강간죄로 인정하는 한계가 그것이다.

아내강간은 아내폭력의 연장선이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2002년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내담자 및 쉼터거주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아내성폭력 실태조사는 아내폭력 생존자들에게 아내강간은 특별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2002년 총 281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 빈도는 응답자의 복수문항 체크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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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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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 따르면, 부부 성관계시 강제적인 삽입은 64.2%로 생존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폭력 후 원치 않는 성관계 또한 55.9%에 달했고 가학적 성행위도 21.0%로 나타나 아내강간의 심각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한국여성의 전화는 두번째 항목인 '내가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성 접촉을 시도한다'를 제외한 나머지 항목을 아내강간으로 인정했다).

또한 2003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실시한 가정폭력방지법 시행 실태조사에 따르면 구타 후 강제적 성관계를 당하는 비율은 1999년 35.5%에서 2003년 50.6%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아내성폭력 통계. 2000년 자신을 강간하려한 남편을 살해한 신모씨 사건 이후, 아내들은 자신들의 성적 피해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표는 (사)한국여성의전화에서 가정 폭력 면접상담 내담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2000년 자신을 강간하려한 남편을 살해한 신모씨 사건 이후, 아내들은 자신들의 성적 피해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표는 (사)한국여성의전화에서 가정 폭력 면접상담 내담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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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숙 현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이러한 증가세가 2000년 신씨 사건 이후 아내 성폭력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함에 따라 아내들이 자신들의 성적 피해를 인지한 것으로 분석한 바 있다. 아내들이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그 순간을 스스로 '성적 폭력'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연구가 주요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내폭력과 아내성폭력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벗어"라는 말 한마디 만으로 아내강간은 가능하다

이번에 서울고법에서 아내강간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 역시 아내폭력의 연장선에서 강간이 일어났다. 가해자는 가정폭력 가해자들이 흔히 하듯이 "죽이겠다. 혼자 죽으면 억울하니 같이 죽자"고 위협하고 가스선을 뽑았다. 주먹도 휘둘렀고, 칼을 들어 피해자의 얼굴과 가슴, 머리, 팔, 어깨, 다리도 찔렀다. 강간은 이러한 정황 이후에 일어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상해의 정도가 무겁지 않다", 구타와 강간 사이에 시간 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남편이 강간을 하기 위해 피해자를 상해한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쉽게 말해 폭력이 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강간하려고 때린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강간은 맞지만 강간상해죄는 아니고, 결과적으로 강간 이전에 있었던 폭력 상황은 강간과 무관한 것으로 제외됐다.

법적으로, 어느 정도로 심해야 심각한 폭력인지, 구타와 강간의 시간 차이가 왜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많이 안 맞았고, 시간차를 두고 강간을 해서 2심 형량이 줄게 됐는지도 알 길이 없다(1심에서의 5년은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하지만 법적인 논쟁을 떠나 분명한 건 그날 피해자는 구타와 살해위협(살인미수), 강간을 '패키지'로 당했다.

그리고 이런 폭력 3종세트는 아내폭력에서는 매우 흔한 형태라는 사실이다. 이미 남편의 소유물로 낙인찍힌 폭력관계에서는 "벗어"라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아내는 강간을 경험한다. 한마디 말로도 충분히 아내가 자신의 몸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 순식간에 구조화되는 것이다.

구타가 심했든 아니든, 강간 당시에는 칼을 들지 않았고 위협만 했든, 아니면 다시 칼로 베었든, 재판부가 이 대목에 집중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감형이 아닌 가중형이 마땅한 아내강간

이번 서울고법 형사9부는 1심에서 선고한 5년을 깨고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했고, 상해 정도가 심하지 않고,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는 점, 가해자가 벌금형 이상의 전과가 없다는 점" 등을 양형 이유로 들었다. 여전히 술은 강간죄를 봐주는 데 중요한 변수이고,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올린 피해자의 '적극적인' 선처 요청은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통상 강간사건은 피해자가 탄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지 않는다. 아내강간이기 때문에 이런 기이한 현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경향은 아내폭력 소송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내들의 주요한 호소내용은 "남편을 제발 풀어 달라, 벌금이 나오면 맞아죽는다"는 류의 이야기다. 남편을 고소한 못된 아내로 가족과 이웃에게 외면당하는 것도 두렵고, 벌금을 낼 돈도 없고, 더 주요하게는 이후 이어질 남편의 보복이 더 두렵기 때문에, 이들의 간절한 호소는 지속되고 있다.

피해자가 갖는 두려움과 불안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재판부는 강간 가해자에 대한 아내의 선처 요청을 곧이곧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럴수록 아내폭력과 강간을 다시는 시도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 법은 가해자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어야 하고, 피해자에게는 비빌 언덕이 되어 주어야 한다.

지난 1월 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도 강간상해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가해자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바 있다. 뒤이어 이어진 항소심 판결에서도 가해자는 집행유예로 감형받았다.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특수강간의 양형기준이 5~8년, 감형되더라도 3~5년 6월인 것을 감안하면, 아내강간 가해자에게는 유독 관대한 판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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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강간은 피해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범죄다. 가해자와 함께 살고 있고 벗어나기 쉽지 않으며, 자녀들이 목격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돼야 한다. 때문에 피해의 심각성을 따지면 아내강간은 감형은커녕 가중형돼야 한다.

남자도, 아내도 강간의 피해자일 수 있다

국내법상 아내강간은 명문화 돼 있지 않다. 아내가 강간의 객체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고등법원의 이번 판결이 기사화 될만큼 부부사이의 강간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일이다.

지난 7월 뉴욕에서 열린 UN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회의에서 CEDAW 위원들은 한국정부에 아내강간 명문화를 권고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한국은 하급심 판결이 아내강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오고 있으니 명문화가 필요없다"고 답변했고, CEDAW 위원들은 "법해석을 잘못할 우려가 있으니 명문화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1994년 '형사정의 및 공공질서법'에 아내강간을 명문화했고, 미국은 1984년 이후 배우자 면책규정을 대부분의 주에서 폐지하고 있다. 독일은 1997년 강간죄 객체를 '부녀'에서 '타인'으로 바꾸고 아내를 포함했고(독일형법 177조 3항), 캐나다는1983년 개정형법에서 아내강간을 포함했다.

국내에서는 형법과 가정폭력방지법상에 아내강간의 명문화 논의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개정이 시급한 것은 형법 297조(강간)이다.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에서 '타인(사람)'으로 바꿔(형법 297조) 아내는 물론 남성도 강간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정폭력방지법상 가정폭력의 정의에 "성적 폭력"을 명시해야 하며(처벌법 제2조의1), 가정폭력 범죄항목에는 형법 297조 강간을 추가해야 한다(처벌법 제2조의3).

아내강간을 인정하는 판결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아내들의 고통을 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반갑지만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아내강간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했다. 여전히 아내강간을 가정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서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등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반복하고 있다. 아내강간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움직임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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