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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봉에서 급경사를 이룬 산세가 형제봉을 지나 골짜기를 만들고 백악으로 향하고 있다
▲ 보토 보현봉에서 급경사를 이룬 산세가 형제봉을 지나 골짜기를 만들고 백악으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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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 정도전이 한성을 설계하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보현봉 아래 보토 문제다.

"추가령에서 말을 갈아타고 뻗어 내려온 백두의 기(氣)가 삼각산을 거쳐 보현봉에 응축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다."

한양 천도 유치전에서 정도전에게 패배한 하륜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가 맞장구를 쳤다.

"보현봉 정상에서 뚝 떨어진 기(氣)가 용트림하여 형제봉을 만들었으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 기를 살리려면 보토해야 한다."

조운(漕運)의 이점을 내세워 무악산을 추천한 하륜은 당대의 도참(圖讖) 대가다. 무학대사 역시 왕사로서 풍수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 맞서 '신생국 조선은 성리학 이념에 맞는 도성과 궁성을 가져야 한다'라고 이성계를 설득하여 백악을 주산으로 한 한양 천도를 따냈다. 헌데, 풍수의 이론 보토(補土)를 수용한다면 자신이 주장했던 성리학 명분이 증발되지 않은가.

성리학과 풍수는 결코 같이 갈 수 없는 관계다. 성리학이 오늘을 말한다면 풍수는 내일을 말한다. 성리학이 인(仁)을 바탕으로 현재를 중시한다면 풍수는 미래를 예견하며 형이상학을 전개한다. 성리학이 충효를 최고의 가치로 숭상한다면 풍수는 장래의 길흉화복이 더 큰 가치라 암시한다.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류들은 국가의 암적 존재로 부패한 불교와 혹세무민 도참을 지목했다. 과도한 토지 소유로 농민들의 원성을 산 불교는 척결 대상이었고 터무니없는 술수로 백성을 현혹한 풍수는 퇴출 표적이었다. 허나,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불교와 도참은 미래에 방점을 두고 있다. 불교와 도참은 조선 개국과 함께 된서리를 맞았지만 생명력이 끈질겼다.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지만 잦은 정변으로 미래에 불안을 느낀 왕실 아녀자들과 사대부가 끼고 돌며 비호했기 때문이다.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지나 백악으로 흐르는 산세에 왼쪽 일자모양으로 보토 흔적이 있다.
▲ 보토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지나 백악으로 흐르는 산세에 왼쪽 일자모양으로 보토 흔적이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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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에 몰린 정도전, 양심과 타협하는 '척'

정도전이 머뭇거리자 '한양 천도를 폐기하고 원점부터 다시 검토하자'며 하륜과 무학대사가 공세를 폈다. '다른 곳을 물색하자'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에 '조선팔도를 뒤져봐도 송악산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며 수구세력이 응원했다. 송도에 눌러앉자는 것이다. 개성과 해주에 집과 농토를 가지고 있던 기득권 세력은 애초부터 천도를 반대했다. 값 비싼 집을 헐값에 팔고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한양에 집을 마련하는 것이 손해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칫 밀리면 한양천도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공연한 기우가 아니다. 한양천도가 현안으로 떠올랐을 때 최초 후보지는 계룡산이었다. 질시의 눈으로 쳐다보는 개성인들의 눈을 피해 개성을 빨리 떠나고 싶은 이성계는 계룡산을 직접 방문하여 즉석 낙점했다. 토목공사가 한창 벌어지던 계룡산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원위치 시킨 동력이 '계룡은 쇠(衰)하고 망(亡)하는 땅이다'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

궁지에 몰린 정도전이 양심과 타협했다. '척'하자는 것이다. 보현봉에서 백악산으로 이어지는 지맥에서 가장 낮은 곳에 역부를 투입했다. 허나, 진심 보토를 하기 위한 인부가 아니라 보토하는 '척'하는 일꾼들이었다. 그렇게 '척'하는 동안 한양성곽과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보토 논쟁이 붙었던 지점 바로 아래에 북악터널이 있다
▲ 보토 보토 논쟁이 붙었던 지점 바로 아래에 북악터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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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묻히는가 싶었던 보토 문제가 세종시대에 다시 불거졌다. 풍수학을 전공하고 잡과에 급제하여 출사한 서운관 최양선이 '왕조의 장래를 위해서는 보토를 더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세종이 흔들렸다. '왕조를 위해서'라니 천하의 세종이 동요한 것이다. 하자니 신하들의 반대가 불을 보듯 뻔하고 안하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일국의 군주라지만 자식과 왕조를 위한 비방이라니 흔들린 것이다. '왕조의 미래'라는 한 마디에 미련을 떨치지 못한 세종이 공사를 명했다. 풍수설에 휘둘리는 군주를 보고 잠자코 있을 유학자들이 아니다. 성균관 유생과 조정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승지 허후가 총대를 멨다.

"산맥이란 본시 천연의 형세가 있는 것이온데 산맥의 장단(長短)과 고저(高低)를 보충한들 국운의 길고 짧은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필요 없는 일입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건국한 나라다. 부왕 태종 때에는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강하게 펴 사찰을 한양에서 몰아내고 승니(僧尼)의 도성출입을 금했다. 왕사 무학대사의 근거지 회암사를 학대하며 불교를 고사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풍수는 백성을 미혹시키는 참언(讖言)이며 학(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가당치않은 설(說)이라고 일축하는 유학자들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정지하기에는 때가 늦었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세종이 얼버무리며 조기에 공사를 종결했다. 그런데 다시 거론된 것이다.

"내가 위업을 달성하면 형제봉 못지않게 흙을 메우리라."

안평이 속으로 다짐했다. 자신이 대권에 오르면 국력을 총동원하여 토목공사를 벌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시인묵객은 간데없고 주택가 사이에 쇠락한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 무계정사 시인묵객은 간데없고 주택가 사이에 쇠락한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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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를 주목해 주시오. 이제부터 김처사가 우리의 사랑방 당호를 발표하겠답니다."

안평이 썰렁해진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기(氣)가 센 땅이기에 너무 높은 당호를 지으면 기에 치일 수 있으니 무계정사라 지음이 가할 줄 아뢰옵니다."
"궁, 궐, 전, 당, 합, 각, 재의 재(齋)도 아니고?"

안평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궁궐이 아니기에 궁, 궐, 전 까지는 조금 과하지만 적어도 당(堂)은 나올거라 기대했는데 급 실망한 것이다.

선조들은 건축물에 당호를 지을 때 궁(宮), 궐(闕),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 원(園)이라는 순위를 존중했다.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라기보다도 스스로 낮추어 부르는 겸양이다. 헌데 김보명은 이마저 뛰어넘어 정사(精舍)로 간 것이다.

"뭔가 이룰 때까지는 몸을 더욱 낮추고 드러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좋아, 좋아, 김 처사의 말이 옳아."

김보명의 속내를 간파한 안평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겐 안평의 웃음이 허허로운 웃음소리로 들렸다.

피를 나눈 한살 터울 형제지만 판이하게 다른 성격

무계정사. 안평만 오늘 처음 듣는 당호이지 장안의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름이다.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좋아하고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김보명이 '안평 당사(黨舍) 터를 내가 잡아주었는데 당호는 무계정사로 할 것이다'라고 떠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도 안평과 수양의 성격이 확연히 갈린다. 격식을 싫어하는 안평은 모든 것을 열어놓고 지내고 수양은 감춘다. 안평은 자기를 싫다고 떠난 사람이 다시 와서 머리를 조아리면 받아준다. 반면 수양은 배신 때리고 떠난 사람이 되돌아와서 용서를 빌어도 다시 보지 않는다. 안평은 자신의 주변에 세작이 얼씬거려도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하지만 수양은 발견 즉시 매질하여 돌려보낸다. 이현로가 매 맞은 게 바로 그것이고. 지금 현재 이 자리에 회색스러운 이몽가가 있어도 안평은 신경 쓰지 않는다.

안평은 내편 네편 편 가르는 것을 싫어했다. 덕을 베풀면 모여들고 실망하면 떠나는 것이 인간군상인데 굳이 부르고 붙잡을 게 뭐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성정은 정보관리에도 뚜렷이 나타났다. 수양은 보안에 철저한 반면 안평은 인간 이용이 감추어야 할 비밀이 뭐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격 차이는 국가관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나라는 임금 혼자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과 조화롭게 끌고 가면 된다는 것이 안평의 생각이었고 '임금은 임금이고 신하는 신하다. 신하가 신권을 이유로 발언의 강도를 높여간다면 종내는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현(擇賢)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것이 수양의 생각이었다. 이러한 시각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무(武)획순
▲ 글씨 무(武)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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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라, 지필묵이 어디 있느냐?"

이현로가 갑자기 부산스러워졌다. 하인들이 붓과 벼루와 종이를 대령했다. 호흡을 가다듬던 안평이 붓을 잡았다. 안평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붓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좌에서 우로 천천히 움직이던 붓이 멈춘 듯하더니만 끝을 감아올리며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 멈췄다. 첫 획이 끝난 것이다.

아래로 내려와 두 번째 획이 시작되었다. 첫머리에 힘을 주던 붓끝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와 그칠 지(止)자 위에 창(戈)이 올려졌다. 무기를 사용하여 병란을 그치게 한다는 무(武)자가 완성된 것이다.

안평의 붓끝이 한획 한획 움직일 때마다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와'하고 함성을 질렀다. 숨고르기를 하던 안평의 붓이 또다시 현란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계(溪)자와 정(精)자에 이어 사(舍)자가 완성되었다. 또다시 '와'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중원에 왕희지가 있다면 해동에 안평대군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의 말씀에 동의하시지요?"

이현로가 바람을 잡았다.

"그렇구 말구요."
"이르다 말씀입니까."
"왕희지가 조선에 왔다 울고 가겠습니다."

갖은 찬사가 쏟아졌다.

"대군께서는 글씨에 능한 것만이 아니라 시문(時文)의 사백(詞伯)이라는 것 또한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이렇게 좋은 날. 대군 나리의 즉흥시를 들어보지 않는 것도 범절이 아니겠지요?"
"옳소!"
"지당한 말씀이오."

무계정사 암벽에 새겨진 무계동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로 추정된다
▲ 글씨 무계정사 암벽에 새겨진 무계동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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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이 글씨 잘 쓰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시문(詩文)의 대가라니, 좀 뭐했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 한껏 고무된 안평이 보현봉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삼각산 마주보며 흐르던 물
방향을 바꿔 흐른다 해도
종내는 서해로 흐르는 것을
뉘라서 탓 하리오 무계동 물

무계동을 시제(詩題)로 한 안평의 시가 읊어졌다.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자, 자, 여러분. 고정하세요. 나리의 시를 듣고 잠자코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붓을 잡았다. 발문(跋文)이다. 성삼문도 잡았고 박팽년도 잡았다. 마지막으로 김종서가 붓을 잡고 발문을 쓴 다음에 맹로(盟老)라 서명했다. 맹세한 사람 가운데 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계정사 낙성식은 지지자들의 단합대회였고 출정식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태그:#수양대군, #안평대군, #무계정사, #보현봉,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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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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