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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내가 있다. 잘나가는 노동전문 변호사인 그는 아이와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들른 가게에서 옛 친구와 우연히 마주친다. 살해 장면이 담긴 테이프를 몰래 건넨 친구는 곧 숨진다. 이어 테이프의 행방을 쫓는 정보기관의 전방위 감시가 시작된다. 변호사는 불법 수집된 은밀한 개인사생활을 이유로 로펌에서 해고된다. '우주의 씨씨티비(CCTV)'라 할 수 있는 첩보위성으로 일거수일투족이 기록된다. 하루의 동선과 만나는 사람이 거리와 가게의 수많은 카메라를 통해 일일이 기록되고, 통화내역과 신용기록은 모조리 정보기관의 손에 들어간다. 도청은 말할 것도 없다.

눈치 채셨겠지만, 영화 이야기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1998년 개봉한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State)란 제목의 영화다. 그나마 영화의 주인공은 운이 좋았다.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던 감시의 실체를 뒤늦게나마 알게 됐고, 이를 통해 통쾌한 복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젊고 유능한 변호사인 주인공은 다행히 최악을 면했다지만, '보통의 일반인'인 우리들은 과연 어떨까.

불행히도, 이 영화는 그저 영화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침에 대문을 나서 하루일과를 보낸 뒤 귀가할 때까지 마주하게 되는 CCTV의 숫자는 모두 몇 개나 될까.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한 대, 주차장에 세 대, 진입로 교차로에 한 개, 담배를 사기 위해 들른 편의점에 두 개, 출근길 버스에 세 개…. 손꼽아 세기도 어려울 뿐더러, 어디에 카메라가 달려있는지조차 모조리 알 도리도 없다. 이미 우리는 감시의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노동현장도 마찬가지다. '자재 도난 방지'와 같은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하나 둘 CCTV가 늘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찍힌 영상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간혹 터져 나오는 뉴스를 통해 CCTV가 사실은 탈의실을 비추고 있었다든지, 노조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데 쓰였다든지 하는 소식을 전해들을 뿐이다. 감시장비 철거를 요구하는 첫 파업이 벌어진 게 2001년이니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지만, 노동부는 아직까지도 이를 '불법파업'으로 해석하고 있다. 회사 계정의 이메일과 메신저 내용을 감시하고, 특정 사이트(주로 민주노총 홈페이지) 접근을 차단하는 식의 통제도 이제 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지경이 됐다.

개인정보보호법과 노동감시

이 와중에 오는 2011년 9월 30일 '개인정보보호법'이 시행된다. 개인정보보호법은 정보인권 운동 진영에서 오랫동안 요구해 왔던 것으로, 이 법 시행과 함께 규제의 사각지대였던 민간부문 노동감시에 대한 규제도 시작된다. 그간 CCTV, 위치추적, 이메일과 메신저 감시 등 노동감시에 시달려 왔던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정보 주권'을 지킬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는 셈이다. 이 법에 따르면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즉 알아볼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개인정보로 정의하고 있다. 즉 개인정보는 성명, 주민등록번호만이 아니라, CCTV 영상처럼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된다. 또 해당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더라도 다른 정보와 결합하면 알아볼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예컨대 회사 컴퓨터에 설치한 프로그램에 의해 인터넷 접속기록 등 자신의 행동정보가 수집되었다면 이 역시 개인정보인 것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 보호의 원칙으로 △수집제한의 원칙 △제3자 제공 금지 원칙 △목적외 사용 금지 원칙 △개인정보 파기 원칙 △민감정보 수집 원칙 △안정성 확보 원칙 등을 정하고, 이를 철저히 준수토록 하고 있다. 모든 개인정보는 개인의 동의를 전제로 수집될 수 있게 했으며, 설사 동의에 의해 수집된 정보라고 하더라도 △열람 △정정 △삭제 △처리정지 등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이 법 시행일 이전에 근거 없이 설치된 개인정보 수집장치는 모두 '불법'이 되며, 따라서 새로운 동의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 또 모든 개인정보 처리자(사용자)는 <개인정보 처리 방침>을 수립 및 공개해야 한다. 개인정보 처리 방침은 △처리 목적 △정보의 처리 및 보유 기간 △개인의 권리·의무 및 그 행사방법에 관한 사항 등의 내용을 담아야 한다. 개인정보 처리자(사용자)의 △거짓이나 부당한 방법에 따른 개인정보 수집 △수집정보 누설 및 훼손, 변경, 위조행위 등이 금지됨은 물론이다.

가장 대중적인 '국민 감시장비'라 할 수 있는 CCTV에 대해서는 별도 조항을 둬 규제를 강화했다. 법적 근거가 있거나, 범죄 예방 및 수사, 시설안전 및 화재 예방, 교통단속 및 교통정보처리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공개된 장소에 대한 CCTV의 설치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위반시 3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법률상 허용된 목적으로 설치한 CCTV는 그 설치 위치, 가동 시간, 촬영 범위 등이 목적에 부합해야만 한다. 기존에 설치된 CCTV라 하더라도 기존의 법령에 따라 적법하게 설치되거나 정보주체의 동의를 받지 않은 이상 이 법에 따라 새롭게 동의를 받거나, 이 법이 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운용할 수 있다. 특히 노동자 휴식시설 등 개인의 사생활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장소의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설치·운영하여서는 안 된다(위반시 5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안내판 없는 몰래 카메라는 불법이다(위반시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 노동자 개인을 촬영하기 위하여 CCTV를 줌(Zoom)하거나 회전하는 등 임의로 조작하는 것은 금지되며 녹음기능은 사용할 수 없다(위반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개인정보보호법 시행을 맞아, 민주노총도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9월 15일 전체 가맹-산하조직에 공문을 시행해 △노동자 감시 규제에 대한 특별 단체협약을 체결할 것 △사용자의 '개인정보 처리방침' 제정에 개입할 것 △근거 없이 설치된 기존 감시장비에 대한 대대적인 점검과 철거, 규제강화 등 적절한 조치에 돌입할 것 등을 지침으로 하달했다. 민주노총은 이를 위해 '노동감시 규제를 위한 특별 단체협약 모범안'을 작성해 배포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사업장의 경우 노동자 감시 실태를 민주노총에 보고해 정보인권 단체와 공동으로 대응해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좋은 놈, 나쁜 놈을 누가 결정하는데?"

노동감시는 노동자 개인의 노동과정에 대한 자율적인 통제권을 박탈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한다. 뿐만 아니라 감시의 강화는 자연스레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다시 산업재해 빈발에 이르는 등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의 직장 내 교류와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감시로 이어져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등 노동권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개별 노동자와 노동조합 모두가 관심을 갖고 대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에서 전방위적 도감청을 가능케 하는 통신보안법 제정을 주장하는 샘 알버트 상원의원은 래리 킹 라이브에 출연해 "국가는 범죄자들만 감시할 뿐이니, 선한 시민은 걱정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이를 티브이로 지켜보던 칼라는 묻는다. "좋은 놈, 나쁜 놈을 누가 결정하는데?" 정보인권과 사업장 노동감시의 핵심도 바로 이 질문 속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승철 님은 민주노총 정책국장입니다. 이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동감시, #개인정보보호법, #민주노총, #프라이버시,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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