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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상부 국정감사에서는 난데없는 '매국노' 논쟁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국감이 일시 중단되고 정책질의는 실종되었다. 김동철 의원(민주당, 광주 광산 갑)의 '매국노' 발언이 계기가 되었다.

 

김 의원은 최근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언급된 외교부 안모 국장의 언행을 겨냥해 "한국은 미국 쇠고기 수입하고 싶으니 대만에 압력을 넣어달라? 이건 세계에 망신을 줬다"며 "이런 매국노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지역통상국장이에요?"라고 비판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안 국장은 지난해 1월 15일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를 만나 대만이 미국산 쇠고기의 특정위험물질(SRM) 수입을 금지키로 한 데 대해 국내 여론 악화를 우려, 미측에 강력한 대응을 주문한 것으로 돼 있다. 김 의원은 거듭 "이건 매국노예요"라면서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외교, 국정을 농단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서울 강서 갑)은 "국무위원에 대해 매국노라는 단어를 썼다"면서 "속기록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같은 당의 유기준 의원(부산 서구)도 "(그런 발언은) 상원에 해당하는 우리 상임위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에 가세했다. 이후 김 의원이 반발하면서 구 의원과 고성이 오가는 언쟁이 벌어지자 남경필 외통위원장은 정회를 선포했고, 15분 뒤에야 국정감사가 재개됐다.

 

'매국노'로 국회 회의록 검색하면 89건뿐

 

사실 국회에서의 '매국노'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회 회의록을 '매국노'로 검색하면 제헌국회부터 최근까지 89건이 검색된다. 그러나 국회에서 이뤄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회의를 감안하면 89건은 극소량이다. 국회에서 매국노는 '금기어'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매국노(賣國奴)의 사전적 정의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북한에선 매국분자 혹은 매국자라고 한다. 그 반대말은 애국자다. 매국노는 애국을 정치행위의 존재 이유로 삼는 정치인들에게는 최악의 호칭이니 그럴 만도 하다.

 

                   <표> 제헌국회~18대 국회의 '매국노' 발언 현황

 
 본회의
 상임위
 특별위
 예결위
 국정감사
국정조사
 합계
 18대
 8
 3
 5
 
 9
 3
 46
 17대
 3
 9
 1
 
 7
 
 37
 16대
 2               
 8
 3
 
 6
 
 35
 15대
 5
 7
 
 1
 2
 
 30
 14대
 2
 
 
 
 
 
 16
 1대  5   6
 합계
 25
 27
 9
 1
 24
 3
 89

 

제헌국회부터 18대 국회까지 시기별로 보면 ▲1대 6건 ▲14대 16건 ▲15대 30건 ▲16대 35건 ▲17대 37건 ▲18대 46건으로 검색된다. 제헌국회(1948~1950)에서 국회에 처음 등장한 '매국노'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사라졌다가 노태우 정부 말기(14대 국회)에 다시 등장한다. 독재 또는 권위주의 정권 하의 국회에서는 매국노라는 표현을 속기록에서 삭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속기록에서 삭제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89건의 실제 발언 내용을 보면 특정 공직자나 장관을 직접 매국노라고 지칭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를테면 제헌국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 군정청 간의 한미협정에 대해 일부 의원들이 동포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협정인 만큼 상임위가 아닌 전원위원회를 열어 모든 의원들의 동의를 구할 것을 촉구한 것이 눈에 띈다.

 

김대중 정부 때는 IMF 당시 대우차 해외매각과 새로운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과거사 문제 해법 등과 관련 국부를 유출하고 민족의 자존을 파는 매국노 행위나 다를 바 없다는 야당 의원들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민주당 김진애 의원이 본회의 5분발언에서 이명박 정부가 인천공항공사를 매각하려는 것에 대해 "대한제국 말기의 매국노와 같은 행위"라고 비판했다.

 

노무현 때는 김현종-김종훈, 이명박 때는 정운천-정운천-민동석이 '매국노' 비유

 

노무현 정부 때는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이 외환은행 매각에 관여한 공직자들에 대해 "(그 과정에서) 사리사욕을 위해 돈을 챙겼다면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또 같은당 홍문표 의원은 농림해양수산위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김종훈 한미FTA협상 수석대표에게 "두 분께서 국익이라는 문제를 너무 강조하다가 매국노 이완용이 같이 도장 한 번 잘못 찍어 가지고 역사에 두고두고 이러한 오해를 받지 않는 협상이 되기를 두 분한테 바라는 것"이라고 완곡하게 비판했다.

 

반대로 이명박 정부 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옹호한 정운천 장관과 민동석 차관 등이 야당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에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국회 본회의 5분발언에서 "광우병 촛불시위는 지금의 민동석 차관을 한 순간에 매국노로 만들었다"고 촛불시위를 비판하면서 민 차관을 적극 옹호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매국노 이완용'에 비유된 단골은 정운찬 총리였다. 정 총리는 인사청문회에서부터 "아까 후보자께서 '세종시 고향 출신이니까 맡겨 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매국노 이완용이도 나라 팔아먹을 때 내건 명분은 나라를 위한다는 것"(김종율 의원)이라는 따끔한 충고를 받았다. 또 국토해양부 국감에서는 "요즈음 세종시 관련되어서 우리 충청도를 가보면 정운찬 총리가 고향을 팔아먹었다, 세종시를 팔아먹었다, 그래서 '매국노 이완용'에 빗대어서 '매향노 정운찬' 이런 이야기가 아주 횡행하고 있다"(이시종 의원)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 '매국노 논쟁'을 촉발시킨 김동철 의원의 매국노 발언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 의원은 미국산 쇠고기 관련 국정조사특위(2008년 9월 3일)가 외교통상부의 기관보고를 받을 당시 미국이 입장을 바꿔 쇠고기 협상에 강하게 나온 배경에 대해 "정권이 바뀌고 나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경쟁적으로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서 한국 쇠고기 시장 다 푼다고 이야기하고 돌아다녔다"고 질타했다. 그때도 김 의원은 "이런 말 하고 다닌 사람들은 정말 현대판 매국노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위키리크스 외교전문을 보면, 김 의원의 주장이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나라당 "'독재' 빼라"....박지원 "독재를 독재라 했는데 뭐가 문제냐"

 

한편, 같은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헌법재판소 국정감사에선 '독재자' 논쟁이 벌어졌다. 허영 헌법재판연구원장이 조용환 재판관후보자의 인준 지연사태와 관련,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3 대 3 대 3의 지분을 갖고 재판관을 추천하는 것은 박정희 독재정권 때부터 이어 온 패턴으로 지양돼야 한다"고 발언한 게 문제가 됐다.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울산 중구) 등 친박근혜계 의원들은 "할 말과 안 할 말을 구분해 달라"며 속기록 삭제를 요구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이라는 말이 박근혜 전 대표의 심기를 거스릴지 모른다는 '심모원려' 탓으로 보인다.

 

그러자 민주당 박지원 의원(전남 목포)은 "독재를 독재라 했는데 뭐가 문제냐"고 맞섰다. 이에 허 원장은 "학자로서의 사견"이라며 회의록 삭제 요청에 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윤근 법사위원장은 "규정상 회의 중 발언은 속기록에서 임의로 삭제할 수 없다"고 결론내면서 논쟁은 마무리됐다.

 

참고로 국회 회의록에서 '독재'로 검색하면 제헌국회부터 현재까지 '독재' 발언이 나온 회의는 2,084건이 검색된다. ▲본회의 441건 ▲상임위 927건 ▲특별위 106건 ▲예결특위 122건 ▲국정감사 484건 ▲국정조사 4건 등이다. 그런데 '박정희 독재'로 검색하면 ▲본회의 97건 ▲상임위 129건 ▲특별위 23건 ▲예결특위 37건 ▲국정감사 104건 등으로 총 390건이 검색된다.

 

아직도 국회에는 디지털 시대에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아날로그 족들이 많다.


태그:#국감, #위키리크스, #김동철, #박지원,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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