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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보씨
 모정보씨
ⓒ 한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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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가면 원래 미국의 양부모는 그 입양 간 아이에게 미국국적을 취득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입양을 보낸 한국기관과 입양아를 받은 미국기관은 입양아가 새로운 환경에서 정착할 때까지 그 입양아를 양부모가 잘 돌보아 주고 있는지 점검하고 사후관리를 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해외입양의 이론이고 원칙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의 양부모나 입양아를 주고받은 기관들이 그 입양아에 대해 사후 관리 등의 의무나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그 입양인은 어느 날 문서상으로는 지상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해외입양아는 몸은 존재 하지만 기록이나 서류는 존재하지 않는 국제미아로 전락한다. 내가 만난 모정보씨도 그렇다.

그는 3살 때인 지난 1977년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갔고 금년 4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추방당했다. 그는 34년간 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말을 전혀 못하고 영어만 하고 그의 의식구조는 미국인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미국인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도 아니다. 그는 내 앞에 있고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나와 인터뷰를 하지만 그는 문서상에는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흔히 한국정부에서는 해외입양을 보내면 그 입양아에 대한 모든 문제가 해결 된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어느 나라에도 국민의 자격으로 속하지 못한 모정보씨 같은 사람을 4명이나 보았다. 해외입양은 이렇게 국제미아를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리고 이렇게 비인간적이고 불합리한 제도의 맹점은 즉시 개선되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친부모가 아이와 헤어지지 않고 직접 키울 수 있도록 정부가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다. 인간성과 인도주의를 상실한 정부. 그것은 정부가 아니고 인간의 삶과 정신을 파괴하는 리바이어던(괴물) 일 뿐이다.

다음은 9월 22일 뿌리의집에서 지구상의 어느 곳에도 시민권이 존재하지 않는 모정보씨와 주고받은 일문일답이다.

- 생년월일과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 가게 된 사유를 아는가?
서류에 내 생일은 1974년 9월 20일로 되어 있고 미국 도착은 1977년 9월경이다. 그러나 내 생일은 단지 의사의 추정일 뿐이라 별로 의미가 없다. 기록에 의하면 1974년 경 나는 인천의 한 길거리에서 발견 된 후 그 지역 고아원에 보내졌다. 그 후 1976년 4월 경 서울에 있는 대한사회복지회로 보내졌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어린 시절 기억은 입양가는 날 비행기에서 자다가 깬 순간이다. 그 후의 기억은 없다.

- 양부모와 미국형제에 대해 말해 달라? 어떤 분들인가? 또 양부모나 형제들과의 사이는 어땠나?
양부모는 위스콘신 주에 살고 있던 중국계 미국인으로 나를 입양 할 당시 두 분 다 50세 로 좀 늦은 편이었다. 양부는 의사였고 양모는 식당을 운영 하셨다. 1남 2녀의 친자식이 있었고 친자식들의 나이는 나보다 각각 5년, 10년, 15년 많았다.

양부모와의 사이는 한 번 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형제들과의 사이는 그저 그랬다. 미국에서는 4자녀가 있으면 각종 사회복지나 세금감면 등 여러 가지 혜택이 많다. 나는 양부모가 나를 순전히 그런 경제적 필요에 의해 입양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도 양부모와 오붓하거나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양부모가 맞벌이 부부인데도 불구하고 형제 중 입양아인 나만 항상 가난과 빈곤에 시달렸다.

보통 미국가정에서 해외입양아를 받아들이면 양부모는 입양아의 미국국적을 취득시켜 줘야한다. 그러나 내 양부모는 그런 조치를 전혀 취해 주지 않았다. 한국에서 해외입양을 보낸 기관이나 미국에서 입양아를 받은 기관도 입양아에 대한 미국의 국적취득 등 사후관리를 해 줘야하는데 나의 경우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해외입양아로서 당연히 취득해야 할 미국국적도 취득하지 못했다.

- 미국으로 입양 간 한국 입양인이 미국 국적을 못 받는다. 그럼 어떻게 되나?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더 말해 달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때 양부모는 나를 위스콘신 주에 있는 4년제 중학교 과정인 기숙 군사학교(military academy)로 보냈다. 기숙 군사학교에서의 생활은 마치 군대나 교도소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공부 외에 사격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 다른 소년들로부터 인종차별 등 여러 가지 괴롭힘을 당했고 큰 외로움을 경험했다. 마침내 나를 교도소 같은 이곳에 보낸 양부모에 대한 저항심 때문에 나는 결국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내 흡연행위가 학교에서 적발 되었고 결국 2년 만에 학교에서 퇴출당했다.

그 후 양부모는 나를 아예 멀리 집에서 떨어진 미조리 주의 고등학교 과정인 또 다른 기숙군사학교로 보냈다. 이곳은 남녀공학이었고 위스콘신 주의 기숙 군사학교 보다는 좀 나았다. 여자 친구도 사귀고 정서적 안정을 조금 찾은 나는 담배도 끊었다. 그럭저럭 공부했지만 이 기숙 군사학교를 졸업은 못하고 수료만 했다.

- 학교를 졸업 못하면 직장을 얻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하여간 군사학교 수료 후엔 어떻게 살았나?
군사학교를 수료하고 18세가 되자 양부모는 내게 "이제 집에 살지 말고 나가 살아라" 고 했다. 그때가 1992년이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와서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는 로스앤젤레스로 무작정 갔다. 그러나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내가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고 나는  곧 노숙자가 되었다. 18세 최연소 노숙자가 바로 나였다. 로스앤젤레스는 다행히 날씨가 별로 춥지 않아서 노숙하기도 아주 나쁘지 많은 않았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5년간 로스앤젤레스에서 노숙자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삶이 괴롭고 공허해서 마약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내가 노숙자로서 마약을 피우다가 경찰의 검거에 걸린 것이다. 얼마간 마약 복용죄로 교도소에 있다가 석방되었다. 교도소 안에서는 백인경찰로부터 또 많은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그 후 나는 석방되고 얼마 안 된 1997년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선교단체인 '나눔 크리스천 팰로우십'이란 곳을 알게 되었다.

- '나눔 크리스천 팰로우십'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이곳은 기독교 자선단체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미국사회의 취약계층을 도와주는 빈민구호기관 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1997년부터 2004년 까지 7년간 일하며 성경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 '나눔 크리스천 팰로우십'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
과거에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거나 쉼터를 제공해 주는 등의 일을 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돕는데서 보람도 느꼈다. 무엇보다도 내가 태어난 나라인 한국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도 가졌는데 그것이 가장 큰 발견 이었다. 그곳에서는 인종차별도 안 당해서 좋았다. 위스콘신 주에서 나는 한국인을 한명도 구경 못했는데 여기서는 많은 한국인을 구경하고 그들과 이야기 하며 내 나라 한국에 대해서 듣는 것도 재미 있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2004년 나는 하와이로 갔다.

주민번호가 없는 모정보씨 가족관계증명서, 최근 김도현 목사가 신청했다.
 주민번호가 없는 모정보씨 가족관계증명서, 최근 김도현 목사가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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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로 간 특별한 이유가 있나?
LA에서 7년간 생활하다 보니 아시아문화가 더욱 그리워서 졌다. 그래서 하와이로 가면 아시아인이나 아시아 문화를 좀 더 많이 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생각했던 대로 하와이에서 아시아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나? 하와이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예상외로 아시아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하와이 원주민 문화는 좀 접했다. 그러나 직장이 없고 마음이 울적하고 외로웠던 나는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결국 알콜 중독에 걸렸고 예전에 접했던 마약에 다시 손을 대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마약 복용죄로 이번에는 하와이 경찰에 의해 체포되게 되었다. 내 전과를 조사하던 하와이 경찰은 LA에서 내 마약복용에 대한 전과기록을 발견했고 또 내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 입양인 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한국 입양인이라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죄는 아니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정부는 전과자 외국인들에게 추방조치를 시행하는 등 엄격하게 대했다. 그래서 나는 금년 4월 미국정부에 의해서 내가 입양 온 나라인 한국으로 추방 되었다.

-그래도 3살 때 미국에 입양 가서 34년 간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아온 사람을 어떻게 추방하나? 그리고 한국엔 어떻게 입국했나?
가장 큰 문제는 내 양부모님이 내가 미국에 입양 온 후 미국국적 취득조치를 했어야 했는데 게으름이었는지 무책임 때문이었는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입양을 보낸 한국기관과 입양아를 받은 미국기관도 그런 후속조치를 하지 않아서 나는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입국할 때는 미국에서 이민국요원 둘이 나를 인천공항까지 호송해 왔다. 인천공항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내 입양서류와 나를 짐짝처럼 던져주고 내가 범죄자라 미국정부에서 추방하니 한국정부에서 나를 알아서 하라고 한 후 이들은 미국으로 바로 돌아갔다.

- 그럼 금년 4월 이후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나? 한국 주민등록증은 있나?
미국에서 추방당할 때 미국 이민국요원들이 나에게 한국에 가면 이태원 해밀턴호텔 앞에 찜질방을 찾아가면 싸게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이태원 부근은 마치 한국의 아메리카타운과 같아서 내가 한국어를 몰라도 살 수 있는 곳이라 했다. 내가 몇 천 불을 미국에서 가지고와서 처음 얼마동안은 찜질방 생활을 했고 매식을 했다. 그러나 곧 돈이 떨어져서 곧 노숙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이태원에 놀러 온 다른 한국계 미국입양인 제인 정 트랜카(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01394)를 만나게 되어 결국 제인과 다른 미국 입양인들이 나를 '뿌리의집'으로 데려왔다. 지금은 뿌리의집에서 김도현목사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55731) 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최근까지는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김도현 목사님이 나를 위해서 지금 주민등록번호 생성을 신청 중이다. 조만간 주민등록증과 번호를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지금 미국시민권도 없고 적절한 한국시민권도 없다. 나는 이렇게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이지만 서류상 지금 나는 아예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다. 나는 국제미아일 뿐이다. 나의 희망은 한국주민등록번호와 시민권을 빨리 취득하여 한국말도 배우고 나를 인종차별하지 않는 내 나라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태그:#모정보, #김성수, #입양, #김도현, #제인 정 트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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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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